오늘은 신년 첫 주일입니다. 신년 첫 주일을 맞이하여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교만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C.S. 루이스는 “교만에 비하면 다른 죄는 벼룩에 물린 자국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살펴보았던 모든 죄의 근원은 교만입니다. 나의 생각만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교만에서 분노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또 영적인 게으름도 교만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는 우리가 싸워야할 최대의 적은 교만과 게으름이라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나는 다 됐다고 하는 교만이 영적 게으름을 낳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큼 교만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는 책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교만에서 대하여 무수히 많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교만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 또 잠16:18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는 것은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호세아시대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제일 부흥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호13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교만하니까 하나님은 사자같이, 표범같이, 새끼 잃은 곰같이 그들의 심장을 찢으라고 말씀하십니다(6,7). 그러니까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패망의 원인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인 불안정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적인 쇠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원인은 교만이었습니다.
/올 한해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제일 불안 해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만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옛날 보다 더 부요하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보다 교만을 더 무서워해야합니다. 우리가 만일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은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교만의 죄를 바로 보지 못하고, 교만의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절대 보장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만의 죄를 이기고, 더욱더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서 제일 문제가 되는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만일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저는 겸손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여러분들에게 교만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다면 제가 제일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제일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이 말씀을 저 자신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목사로서 내 안에 교만의 죄가 없는 지를 살피면서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순서는 먼저 교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교만의 결과가 무엇인가? 그리고 교만을 이기는 길인 겸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교만이라 무엇입니까?
교만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존감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자존감을 가지는 것과 교만하다는 것은 다릅니다.
교만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이 있습니다. 사탄이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 유혹했던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사탄은 네가 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높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 땅에 교만이라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인간은 이 교만의 죄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높이 되어서 이 땅과 자신의 삶의 주인노릇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기 전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또 내 삶의 주인도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교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높이며,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1)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렘13장 15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내 말이 너희 마음 가운데 들어갈 자리가 없는 고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입니까? 아무리 많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내 마음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교만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만 가지로 너희에게 전하였거늘 너희가 그 말씀을 너희와 관계없는 것으로 여기는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드렸던 분노에 관한 말씀, 시기와 질투에 관한 말씀, 영적인 게으름에 관한 그 모든 말씀이 내게 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다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 자신을 포함한 설교자들이 제일 교만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교만에 관한 이 말씀 먼저 나 자신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2)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병중에 있는 어떤 권사님을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은 그 병에 대해서 그 어떤 염려와 근심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사시니 권사님의 마음이 너무나 평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겸손한 분이십니다. 사람이 왜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염려와 걱정이 많습니다.
3)또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자랑합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이것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니버는 교만을 권력에 대한 교만, 지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영적인 교만으로 분류했는데, 그 중에서 영적인 교만이 제일 위험한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눅18:9. ○또 자기를 (하나나 앞에서)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신원하 교수님은 기도를 많이 하는 성도일수록 이런 영적인 교만에 빠질 위험성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힘들어 하는 성도를 볼 때 “당신이 기도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좀 더 기도하라고 하십니다”고 조언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이런 말들이 힘들어하는 성도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친구들은 욥에게 바른 소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크게 책망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일 경계해야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교만입니다.
또 이런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이제 사람들 앞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빌립보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권면이나 사랑으로 하는 위로나, 또 성령으로 말미암은 교제나 서로 불쌍히 여기는 긍휼이나 자비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인들은 그런 좋은 일들을 하면서 다른 사람은 자신보다 낮게 여기며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교만의 다른 이름)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고 라고 말씀합니다.
또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사람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최고라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능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능욕의 죄를 짓지 말아야합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많이 하는 사람이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삼성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에게 제일 첫째가 되는 기업가 정신은 “경청”이라고 합니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제일 먼저 남겨주었던 붓글씨로 쓴 두 글자가 바로 경청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장사를 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제일 먼저 고객들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남들에게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배우려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죄인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의인에게서도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교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패망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셨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십니다. 그 사람이 물질 때문에 교만했다면 물질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 사람이 권력 때문에 교만했다면 그 권력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영적으로 교만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셨던 은혜를 거두어가십니다.
여러분 이 한해를 보시면서 제일 두려우신 것이 무엇입니까? 혹 내가 물질적으로 더 어렵지 않겠는가? 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지 않겠는가? 하는 것보다 정말 더 두려운 것은 내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에게는 남들을 향한 끊임없는 정죄와 증오만 남습니다. 그래서 결국 남을 정죄하여 죽이려 하다가 자신이 죽게 됩니다.
/지난주에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제가 봤던 영화중에서 제일 성경적인 영화였습니다. 명절에 부모님들에게 꼭 보여드리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는 경감이 나옵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는 장발장이 나옵니다. 경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은 오직 법과 심판의 하나님이라고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경감은 빵 한쪽을 훔친 죄를 지은 장발장을 정죄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장발장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선을 베풉니다. 또 그를 죽이려했던 경감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죽이지 않고 용서해줍니다. 그런데 경감은 끊임없이 장발장을 정죄하고, 죽이려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살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가시면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정죄와 증오만 남습니다. 이와 같이 교만은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또한 교만은 공동체를 파멸시킵니다. 빌립보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였던 것은 서로 자신을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는 모두 자신이 최고라고 하기 때문에 절대 하나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교만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겸손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첫째로 겸손이고, 둘째도 겸손이고, 셋째도 겸손밖에 없습니다. 겸손만이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1)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만 서 있으면 우리는 결코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교회를 다니는 어떤 청년이 “존애하는 목사님께”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결혼 날짜와 장소를 잡아 놓고 무조건 신부를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먼저 사람을 정해 놓고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존애하는 목사님 저는 목사님과 결혼관이 맞는 것 같습니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존애, 즉 존대하고 사랑한다는 말인데, 저는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정말 저를 존대하고 사랑한다면 제 말을 들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인간적으로 자신을 겸손한 체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체하면 그 겸손은 비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나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그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가 언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려집니까? 사6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볼 때였습니다. 그 엄위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직접 보고 나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 날마다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아가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섰습니다. 그는 매일 기도를 드렸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그가 일주일 동안 매일 기도했어도, 절대 그 기도가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그 기도가 절대 자신의 의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 많이 기도를 해야 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절대 겸손해 지려고 노력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겸손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교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며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2)또 우리의 삶 속에서 교만을 이기고 겸손해 질수 있는 비결은 고난입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교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직접 천국을 보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고, 또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육체의 가시와 같은 그런 고난을 주셨습니까?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12:7)”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더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한없이 끝까지 낮아질 수 있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3)또 사도바울은 우리가 겸손해지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올해 표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교회가 되자”입니다.
예전에 어떤 장로님이 말씀하셨는데, 어떤 교회는 회의를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대고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과연 예수님이라 어떻게 말씀하실까 하면서 회의를 한다고 합니다. 지금 그 교회에는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한번 해 볼까 하다가 형식적이 될 것같이 참았습니다. 정말 올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들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진 자는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할 때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 만만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가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만 제일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깨어지고 나니까, 모두 나보다 크게 보이고 낫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배워야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평생 모든 것을 배우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 목사님이 말씀을 했던 것처럼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95가지의 단점 중에서도 5가지의 장점이라도 배우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의 95가지의 장점을 보지 않고, 5가지의 단점만을 보고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내가 열 사람을 만났을 때 과연 그 중에 몇 사람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한 사람은 10사람 모두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합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공동체의 뜻과 조화를 이루려는 사람입니다. 내 뜻이 있더라도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따라서 자신의 뜻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기에 일을 혼자서 하지 않고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또 겸손한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낙심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다는 것은 내가 그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내가 부족한 것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자신의 부족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실패하여 넘어져도 자신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의지함으로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절대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또 누가 나를 왜 알아주지 않는가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을 향해서도 왜 나를 높여주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더 낮은 곳에 항상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장발장처럼 연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높아지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이 땅 끝에 있다하더라도 찾으셔서 친히 높여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늘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높여주실 것입니다.
교만의 죄에 대한 회개기도문
하나님 저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남을 나보다 못하다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 생각하여 마음으로 분노했던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내가 나를 너무 높게 생각하여 실패했을 때 낙심하였던 나의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왜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 더 좋은 자리로 인도하지 않는가 하였던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는 이만하면 말씀을 다 알았다 생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부지런히 공부하지 못하였던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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