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는 ad90년 경에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때였습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도들도 없는 때였습니다. 특별히 이때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교회에 들어왔다가 나간 때라고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나갔지만 그들의 사상이 교회에 퍼져 있는 때라고 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머리와 지식으로만 믿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일 일서를 시작하면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귀를 들었고, 손을 만졌다고 합니다(요일1:1-2). 그리고 하나님은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고 사귀고 교제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과 사귐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요일1:4).
그런데 우리의 사귐은 단순히 우리 인간들끼리의 사귐이 아니라 우리가 각자가 하나님과 사귀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요일1:3).
요일1장 3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면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고 합니다.
한번은 학생들과 같이 밤을 같이 세운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잠을 한숨도 자지 않고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새벽이 되니까 거의 모든 학생들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한 학생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서로 교제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학생들이 밤새도록 이야기하면서 교제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교제가 부족하다고 합니까?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교제하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만날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각자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와 사귐이 있을 때 우리의 진정한 교제와 사귐이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왜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강조하겠습니까?
이 글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만난 사람들이 거의 없기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생명이 없습니다. 활력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가슴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그들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에 기쁨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에 생명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신앙생활에 사랑을 회복할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진정한 사귐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남을 통한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생명이 흘러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귈 수 있습니까?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여러분 날마다 하나님과 사귀고 계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사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는 것은 전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6절을 보시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5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란 어떤 삶이겠습니까? 죄가 전혀 없는 삶이겠습니까? 그래서 빛 가운데서 행하는 삶이라 죄를 전혀 짖지 않는 삶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 그(하나님)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서로 사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죄가 전혀 없는 삶이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갑자기 7절 마지막에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7절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귀는 삶입니다. 그런데 빛 가운데 행하는 삶은 죄가 전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의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백하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과 사귀는 삶입니까?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입니까? 내가 죄가 없다고 하는 삶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의 죄를 빛 이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빛 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드러내놓고 자백하고 회개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빛 이신 하나님 앞에 자백하면 예수님을 믿을만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 가면 사람들은 더러운 갠지스강이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할 것이라 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씻을 수 있고, 깨끗하게 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고 빛 가운데 행한다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죄를 짖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우리 속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빛이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렇다면 날마다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백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여러분들을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남자 성도님들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라고 약속하고 모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일 때마다 한 사람씩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하였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고 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회개하는 모임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을 때 서로 정죄하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모임이 나중에는 정말 믿음으로 사는 모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귐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빛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깨끗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가 깨끗하게 할 때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있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귐을 통한 기쁨이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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