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 1-3장 까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지독하고 끈질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여주셨습니까? 호세아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호세아는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음란한 여인인 아내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세아는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특히 내가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다.
가정에서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호세아는 입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아내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먼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입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도 가정에서 삶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정말 사랑하는 삻을 통해서 말씅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호세아는 가정에서 삶을 통해서 말씀을 전한 뒤에 이스라엘백서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전합니까?
여호와께서 이땅 주민과 논쟁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논쟁이라는 말은 법정에 세워 놓고 잘못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이스라엘백성들을 지금 법정에 세워 놓고 말씀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있어야 할 것인데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1절).
그런데 호세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없어야 할 것인데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절입니다.
2.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여기서 저주란 무슨 말입니까?
서로를 칭찬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벌 받을 것이라 저주하는 것입니다.
속임이란 서로 거짓으로 속이고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살인은 서로 끊임없이 미워하고 죽이것입니다. 또 도둑질은 서로의 것을 힘으로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완악하여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죽기까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런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적질과 간음과 포악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 서로 죽고 죽이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의 교회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렇게 없어야 할 것들이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세상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정직입니다. 공의입니다.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진실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예배의 자리만 아니라 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무엇보다 진실해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실과 정직이 없이 서로 속고 속이는 것만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애입니다. 인애란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호세아서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인애의 사랑입니다. 인애란 헤세드란 말로서 희생하는 사랑,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만일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것도 잘못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진실하고 정의로 와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하면서도 희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책임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예를들어보겠습니다.
가정에서 두 형제가 서로 청소를 하지 않습니다. 왜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형이 하지 아니하니 청소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애가 무엇입니까? 형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청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인애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대해 바른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는가 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바른 말하는 것만으로 내가 할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가운데 아무도 책임을 못 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인애란 무엇입니까? 왜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는가 하고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자신이 얼마라도 책임 있게 선교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아무도 선교사로 안 간다면 자신이 선교사로 가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계속해서 선교 이야기를 하시다가 자신이 선교사로 직접 가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애입니다.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헌금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 헌금을 정말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오해일 수도 있고, 또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정말 가난한 사람을 위해 과연 얼마나 돈을 쓰고 있습니까?
/자신은 가난한 자를 위해 한 푼도 쓰지 않는 사람이 교회가 구제하지 않는다고 헌금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애가 없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노숙자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은혜로운 예배였습니다. 그때 어떤 청년이 있었는데, 항상 가난한 자를 돌아보며 약자를 돌아보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노숙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 교회가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가 구제하지 않는가 라고 바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진실이 있고 인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에 책임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왜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모이지 않느냐고 말로만 비판하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이라도 전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인애입니다.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거짓 선지자는 입으로만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하기를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참 선지자는 입으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요13장에서 누가 서로 높으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자리에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왜 너희가 서로 발을 씻겨주지 않느냐 왜 섬기지 않느냐 왜 서로 사랑하지 않느냐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로 비판하기 보다 몸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이것이 호세아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모습입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아내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진실과 함께 희생하고 책임지는 인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호3장에 보면 고멜이 도망을 가서 노예 창녀가 되었을 때—은15개와 보리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해서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과 함께 인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우리에게 인애의 사랑이 필요합니까? 왜 우리에게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희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희생하는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일3: 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도 입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왜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었습니까?
그 이유가 6절에 나옵니다.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고 합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가장 부흥했을 때였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제사를 드릴 때였습니다. 가장 하나님을 향해 가장 열심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종교적으로 열심인데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그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으로 열심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데니스 레인 목사님 강해 설교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은 영국교회가 50, 60년 전에 우리 한국교회와 같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넘쳐나고 많은 선교사를 보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영국 교회는 한 목사님이 여러 교회를 맡아야 할 정도로 거의 황폐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살펴보니 교회가 부흥했을 때, 목회자와 평신도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50년이 지난 뒤 영국교회는 거의 고사위기에 있고, 오히려 그곳에 한국 목회자가 가야 할 상황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집회 같은 곳은 차고 넘칩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지성보다는 너무 감정에 치우쳐 있습니다. 한국교회 초장기와 같은 말씀 사경회는 없습니다. 또 말씀 집회라는 것도 강사의 재미있는 말만 있고,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합신의 조병수교수님은 향후 50년의 과제가 신앙의 감정주의와 세속화의 극복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감정주의가 결국 교회의 세속화를 낳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이겨야 한국교회가 살아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는 단 두 종류의 신자만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강 한자와 말씀이 약한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에 있어서 감정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감정에 따른 신앙생활은 내가 느끼는 대로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말씀중심이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세상에 대한 축복의 통로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대하여 축복의 통로가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부모의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잊어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의 세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감정주의와 주관주의에 빠져서 제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종교생활을 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 없이 단순한 종교생활을 하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당시의 일반백성들의 책임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제사장이나 선자자들의 책임이겠습니까? 모두의 책임입니다.
4절 하반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하--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 제사장입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과 다툰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제사장이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을 하나님말씀으로 안 듣습니다. 그래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제사장들과 다투는 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사야 28장에서도 유다백성들은 선지자와 다투는 자가 되었습니다.
사28:9. 그들이(유다백성) 이르기를 그(선지자)가 누구에게 지식(말씀)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말씀)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어린 아이)들에게 하려는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선지자라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당신이 누군데 우리에게 지식을 가리키며 당신이 누군데 우리에게 말씀을 가리키려고 하는가 우리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어린 애인 줄 아느냐 우리를 애 취급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누구든지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내게 맞지 않는다 해서 말씀을 전하는 자와 다툰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자와 다투는 자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6절에 보면 바른 말씀의 지식을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시고, 또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하나님도 우리 자녀를 잊어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백성들만 문제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들도 문제였습니다.
8절에 보면 “8. 그들이(제사장들이) 내 백성의 속죄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 바치는 속죄 제물은 제사장의 양식입니다(레6:26). 그래서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더 많은 속죄제물을 바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그로 인해서 많은 속죄제물을 바치게 되고, 그 속제제물은 제사장들의 양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제사장들은 오히려 백성들이 범죄 하기를 더 바랐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사장들은 죄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합니까?
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동일함이라 내가 그들의 행실대로 벌하며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런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의 문제 때문에 어떤 결과가 있다고 합니까?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여기서 왜 이스라엘에 진실과 인애가 지식이 없는 것 때문에 이 땅이 슬퍼하고, 바다에 고기가 없게 됩니까?
이것은 진실함과 참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잘못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 때문에 이 땅을 벌하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왜 그들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제사장이 말씀에 순종하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복을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바로 살면 그 제사장 때문에 이 땅에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일 제사장이 바로 살지 못하면 그도 복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단순한 민족이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진실과 인애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조차 잊어버리게 되니까 땅조차도 저주를 받게 되고, 바다의 고기조차도 저주를 받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의 책임은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 되어야할 교회에 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정직과 사랑을 회복하지 못해서 이 땅에 모든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미에서 있었던 부흥에 관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까 무당이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윤리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을에서 심은 농작물이 다른 곳에 있던 농작물보다 더 크고 싱싱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호세아에게 하신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교회가 교회답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며 정직하며,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참 인애의 사랑을 회복하고, 우리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때문에 이 땅이 복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국교회를 비판하시거나 누구를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비효과란 말을 “나 하나의 변화로 비로소 시작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효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나 하나가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모두 이기적으로 살아가며, 아무도 책임지지 못하며 비판과 비난만 하는 세상에서 나 하나라도 희생하고 책임지는 인애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나 하나만이라도 내 주관적인 기분과 감정에 따른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참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나 한 사람이 변하면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하면 이 세상이 변화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진실과 인애와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하여 우리도 복을 받고, 이 세상도 복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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