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너무 조급한 것 같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금방 만났다가 금방 헤어집니다. 많은 가정들도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결혼했다가 사랑이 금방 식어집니다. 우리는 연초에 무슨 일을 처음 맡았을 때는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의욕적으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쯤 되면 그 사랑이 식어질 때입니다. 지칠 때 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합니다. 이번 연말에는 절대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이 그럴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모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부부간의 사랑이란 무엇인지, 또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또 성도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3장까지에서 계속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호세아1장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긍휼히어기지 않겠다 로- 루하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에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호1:7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또 호1장9절에 보시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 하나닝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호1:10.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하였지만 그러나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너희는 내 백성보다 더 귀한 내 아들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매주 우리에게 그 어떤 새로운 지식보다 하나님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을 계속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또 듣고, 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왜곡된 사랑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정말 사랑이 메마른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서 진정한 부흥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진정으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 어떤 가정이 되어야 복된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진정한 사람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참으로 복된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호세아서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모습이고--고멜은 이스라엘과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 것처럼 --고멜과 같이 영적으로 음란하고 죄악 된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내로 맞아주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고멜은 이런 사랑을 받고도 어떻게 합니까? 고멜은 그렇게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를 더 사랑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도 섬겼지만, 바알도 섬겼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쫓아갈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가만두지 않습니다. 시기하기까지 질투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징계와 채찍을 통해서, 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버리기까지 해서라도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듣고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과 고멜이 하나님을 떠나고 호세아를 떠나 도망합니다.
그래서 3장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호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호세아가 이스라엘과 고멜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남편을 떠납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과 호세아가 지독하게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고멜이 하나님과 남편의 품을 떠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남자에게 가고, 또 다른 신에게 가면 건포도 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건포도 과자가 무엇입니까? 건포도는 달콤함을 줍니다. 또 과자는 맛이 있습니다. 옛날 성경에서는 건포도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건포도 떡이니까 배부름을 줍니다.
이스라엘과 고멜이 왜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하는 남편을 떠납니까? 무언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 찾으면, 남편 외에 다른 것을 찾으면 무언가 달콤함을 줄 수 있을 같기 때문입니다. 또 배부름을 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달콤함과 배부름이 신앙생활의 목적이고, 결혼생활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달콤함이 있습니다. 또 그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배부르고 풍성한 삶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을 단순히 달콤함과 배부름에 두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생활은 그전과는 다른 달콤함이 있습니다. 또 혼자 살 때보다는 여유와 배부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매일 달콤하고 배부른 생활을 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 그럴 때도있죠--그러나 저는 혹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이고--또 배고픔이라 하더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결혼생활을 오래하신 분들에게도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남편하고 사니까 매일 달콤하고 배부른 생활을 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또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예 그럴 때도 있죠—그런데 어떨 때는 내 남편이 왠수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아니 내 남편이 고통의 근원일 때도 있었습니다. 또 남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남자에게로 가고, 또 다른 신에게로 가면 순간적인 기쁨을 준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고멜은 몹쓸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남자를 만나서 처음에는 즐거움을 주고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여인을 이용해 먹을 때로 이용 먹고 나서 이 여인을 노예 창녀로 팔아버립니다.
이제 고멜이 노예 창녀가 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인신 매매에게 잡혀 끌려간 몸을 파는 여인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들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포주에게 잡혀 성 노리개로 전락합니다. 인격적인 대우를 받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빚이 져서 그 빚 때문에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철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하고-호세아가 사랑하는 고멜의 상태가 이런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갑니다. 그런데 못된 남자를 만나 잡혀가서 그런 곳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 이상 돌아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찾지도 않을 지도 모릅니다. 찾더라도 이혼하자고 할지 모릅니다. 또 속으로는 벌 받았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런 고멜에 대해서 다시 그에게 다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하려고 하는데-이제는 인간적인 단순한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마음으로는 사랑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멜은 노예 창녀로 팔려갔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녀를 데리고 오려면 값을 지불해야합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2.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라고 합니다.
여기서 노예가 되어 있는 이 여인을 값을 지불하는 돈을 속전이라고 합니다. 또 값을 지불해서 노예의 상태에서 구출해내어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것을 속량 또는 구속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은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우리에게 무엇을 연상시켜 줍니까?
예수님이 은30에 팔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핏 값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호세아가 은15개가 속전이 되어 노예상태에 있던 고멜을 구속시켜주는 것은//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속전이 되어-----죄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받지 들이지 않고 도망을 가고 또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완전히 세상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완전히 세상에 빠져서 살아갈 때, 그때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죽이시기까지 하면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주일은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십자가는 날마다 매주 기억되며 묵상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피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날마다 피의 의미를 깊이 묵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의 피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따라가다가 세상의 노예가 된 우리를 위해 피흘려주시는 하나님의 그 끈질긴 사랑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또 은15개로 고멜은 산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호세아가 고멜을 은15으로 산 것은 고멜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돈이라면 노예창녀가 아니라-힘 있는 남자노예를 살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가치보다 엄청난 돈을 지불한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값을 지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예를 값을 주고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다시 포주가 그 노예를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노예를 달라고 한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노예를 판 돈을 다시 돌려주어야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 노예를 살 때에 그 노예의 가치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했다면, 다시는 그 노예를 찾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해주고 있습니까?
호세아가 이 여인의 가치보다 더 이상의 가치로 속전을 지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그 포주가 데리고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포주가 도무지 값을 지불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절대로 내 손에서 이 여인을 데리고 갈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값비싼 속전을 지불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상태에서 구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과 사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다시 죄와 사탄의 노예상태로 우리를 다시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소유된 내 자녀를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다시 꺼내려면 하나님이 아들의 피 값과 같은 것을 지불해야합니다. 사탄도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도 이 세상과 권력과 부귀영화의 권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그 어떤 힘과 권세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우리를--그 하나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아무리 권세가 많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의 핏 값을 지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망이나 음부나 죄악의 권세가, 또 천만인이 나를 누르고 위협하고 겁주고 좌절케 하고 넘어지게 해도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그 하나님의 피 뭍은 사랑의 손에서 절대 빼낼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롬8:35-39).
또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를 샀다는 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줍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핏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의 가치는 예수님과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나는 실패했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고멜보다 못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멜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사랑했는데-실패한 우리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는 버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인간적인 조건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우리가 조금 부족하다 해서 실패했다 해서 자신에 대해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절대 나를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더라도 오뚜기처럼 날마다 일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가정도 절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남편이나 자녀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우리 자녀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 가정을 포기하지 않았는데—우리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인내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내 생명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13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그의 등에 칼을 꽂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베드로도 배신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도무지 사랑하지 못할 사랑을 사랑할만한 사람이 될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속전을 지불하면서까지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신 사랑을 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호세아 3장3절입니다.
3. (값으로 산)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제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같이 지내자”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지내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적인 부담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같이 지내자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날마다 나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날마다 우리 마음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도 우리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의 핏 값으로 산 나의 고귀한 신부다, 이제 너는 나를 떠난 그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아니하니 절대 나를 떠나지 말라, 너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가지 말라, 너는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게 하라 너는 절대 나보다 다른 그 무엇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포기하지 말고, 또한 사람들을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첫째, 사랑의 수원지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사랑의 수원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사랑의 수원지를 사람에게서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사랑할 만한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랑할 만하니까 사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할 만하니까 하는 사랑은 절대 오래가지 않습니다. 나중에 사랑할 만한 조건들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금방 식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절대 사랑의 수원지를 사람에게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찾으시면 그 사랑은 곧 식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식어지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할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사랑의 수원지를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찾아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입니다.
여러분 지쳐 있습니까? 사랑이 식어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함께 하셔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공급받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사랑의 수원지인 하나님께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랑이 감정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의지리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사랑이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우리의 사랑은 곧 식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사랑이 감정이라면 오늘 본문에 호세아는 절대 고멜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가 어떻게 그를 떠난 고멜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까?
1절을 다시 보시면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합니다.
여기서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할 감정이 생겨서 고멜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고멜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c.s.루이스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고 했습니다. c.s.루이스는 사랑할 감정이 생기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할 감정이 생기지 않아도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c.s.루이스는 감정이 없어도 사랑하면 사랑은 복리로 더 사랑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워한다고 해서 계속 미워하는 행동을 하면 복리로 더 미워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은 고멜과 같은 사람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해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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