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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요한복음

요한복음강해(54)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는가?(요19:1-16)

by 금빛돌 2024. 4. 27.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우리는 제일 먼저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 군병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우리는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총독이 시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도 총독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가능하면 예수님을 살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군중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또 유대군중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를 충동질해서 예수님을 죽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책임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팔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가? 라고 질문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립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하면서 유대인 600만 명을 죽였습니다.

또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에서도 중세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대인 3분의 1을 죽였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님을 죽인 죄가 유대인 자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는 대사 때문에 유대인들의 큰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3: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이 말씀 앞에 보면 종교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롬39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종교인들보다, 양심가들과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죄가 나에게도 있습니다. 또 빌라도의 죄가 내 속에도 있습니다. 또 가룟 유다와 예루살렘 군중들의 죄가 내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간들의 어떤 죄악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의 죄 속에 나의 죄와 우리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1)먼저 우리 안에 유대인들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유대인들의 마음 안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37절에서 8:38--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 속 에는 항상 육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공동체, 어떤 교회를 원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나 혼자만 잘 믿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 보복이 아니라,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함께 실천하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과연 우리 마음 가운데 그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올 자리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보다 우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공동체 보다 나 자신만을 위하지 않습니까? 또 서로 용서하기 보다 남의 작은 허물과 실수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방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 안에 내가 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또 나를 모독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기보다는 여전히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또 서로 함께 실천하기 보다는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안에도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마음에 들어갈 곳이 없음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2)또 우리 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1510절을 보면 15:10. 이는 그(빌라도)대제사장들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해서 시기와 질투심을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기와 질투의 죄가 우리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시기심이란 서로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깁니다. 라이벌(rival)이라는 말이 rival 즉 강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물을 먹는 사람들끼리 시기합니디. 여성이 남자의 근육질을 보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여성은 같은 또래의 여성이 자기보다 예쁘게 보이면 시기심이 생깁니다. 또 시기심은 열심히 없는 사람들에게 생기지 않습니다. 시기란 말의 어원을 보면 열심에서 나왔습니다(jealously). 그러니까 열심히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기심이 없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심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항상 시기라는 말 다음에는 분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쟁이 있고,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기가 있기에 분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33절에 고전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무엇을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할 때도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이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니다. 시기 때문에 자랑과 교만과 무례히 행함과 성냄과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잠언서에는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1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나와 비슷한 사람이 영광을 받고 잘 되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시기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했습니다.

3)또 우리 안에 빌라도의 죄를 보아야합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의 대표로 고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주일 모든 교회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빌라도가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의 대표가 되었습니까?

15: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면 왜 빌라도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가 진정으로 국민과 군중의 만족을 위해서 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은 항상 국민을 위한다고 합니다. 또 국민들의 만족을 위해서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정치인들은 그들을 위한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백성을 위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요즘에도 정치인들의 이런 행태를 보지 않습니까? 모두 말은 다 국민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어떤 것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빌라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가 무리의 만족을 주고자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무자비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갈릴리 사람들을 목 베어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총독의 자리와 세상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보통 유대총독은 길어도 5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오직 자신의 총독의 자리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에만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신의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빌라도는 사마리아 사람을 처형시킨 일 때문에 로마 황제가 총독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결국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도 빌라도처럼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력, 물질의 힘과 권세를 더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을 희생해서라도 세상에서 잘 되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4)또 우리 안에 가룟 유다의 죄와 예루살렘 군중들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예루살렘 군중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했습니까? 가룟 유다가 단순히 돈 때문에 예수님을 판 것만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와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메시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힘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에서 자신들의 모든 욕망들을 다 이루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이루어 주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자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또 예루살렘 군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 안에도 예수님을 통해서 나의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들이 없습니까?

바로 우리 안에 세상적인 욕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바로 우리가 죽였습니다. 내가 죽였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한때는 교회가 수적으로만 성장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다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이 서 있는 환상이었습니다. 그애서 유기성 목사님은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눈물 흘리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세상적인 욕심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우리가 2000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 뿐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누구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1.예수 흠도 죄도 없는 당신이 깊이 감춰둔 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속죄의 제물 되어 저주받은 나무에 달리셨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박았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일 모든 약속을 다 잊고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았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당신을 못 박았습니다 나의 모든 죄를 지고 아버지께 인도하시는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는 가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다고 고백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인간의 죄악의 관점에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에서는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강조하는 줄 아십니까? 예수님 자신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8.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 자신을 팔 가룟 유다가 오는 줄 아시고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는 로마 군인들에게 내가 너희들이 찾는 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기쁨이었겠습니까? 슬픔이었겠습니까? 기쁨이었습니다(16::3).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기쁨이겠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는다 하더라도 자녀를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살리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왜 예수님께서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까?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을 보시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빌라도입니다. 그런데 본문 10절과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하나님)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죽일) 권한이 없었으리니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죽일 총독의 권한을 주신 분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할만했기 때문에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원수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이 세상에 의인이 죽을 때 그를 변호하면서 같이 죽은 자가 쉽지 않습니다.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는 말씀에서 용감히라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어떨 결에라는 말입니다. 혹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떨어졌을 때 용감하게 구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구조하게 되었는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어떨 결에 뛰어내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깊이 생각하고 오래 생각했으면 절대 뛰어내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은 얼떨결에, 아무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계획 없이이루어진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랫동안 계획되었던 사랑이었습니다.

또 우리가 어떨 때 사랑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아갈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입니다. 또 우리가 아직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누구도 사랑하십니까?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우리도 사랑하십니다. 나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원수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혹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언제나 나는 외롭고 혼자라고 느껴지십니까? 여러분 절대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하나님 한분만은 여러분들을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계속된 좌절이 있었습니까? 실패가 있었습니까? 힘든 일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그 어디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때는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지금도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살아가야할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하서 당신의 아들까지 죽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용기가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여 넘어졌더라도 또 일어 설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 죄가 여러분을 누르고 있습니까? 정죄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그 죄를 능가하시고 이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부서질 만큼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부서질 정도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현재에 어떤 일을 겪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현재에 어떤 일을 겪고 있더라도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끊을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날마다 내가 부서질 정도의 사랑을 받으시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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