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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요한복음

요한복음강해(53)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에 나타난 사랑(요18:1-9)

by 금빛돌 2024. 4. 20.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입니까? 아니면 억지로 지신 것 입니까? 자발적 순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고통으로 생각했겠습니까? 영광으로 생각했겠습니까?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고통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고난의 잔을 내게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은 완전하신 인간으로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고통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실 때도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이었습니다. 요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지신 것이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지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지셨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래서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란 요13장에서 16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17장에 나오는 기도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요17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된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어디로 가셨습니까? 공관복음서를 보면 겟세마냐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이 고난의 잔을 거두서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스럽게 기도하신 일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말도 없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으로 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겟세마네 동산이라 하지 않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이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영광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특히 기드론 시내는 다윗왕이 도망을 갈 때 건넜던 시내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기드론 시내라고 하면 다윗 왕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 왕과 같이 기드론 시내를 지나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역서 주목해야 할 말씀은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는 표현입니다.

왜 기드론 시내 건너 편을 강조합니까? 기드론 시내 건 너편은 예루살렘 성문 밖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어린 양을 제사의 희생제물로 사용하고, 그 육체는 성문 밖에 버리도록 했습니다(4:12). 그래서 히브리서에도 예수님께서는 성문 밖에서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3;11-12). 예수님께서 기드론 건너편인 성문 밖으로 가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실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는 것을 가룟유다가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눅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서 겟세마세 동산에 가셨기 때문입니다(22:39). 그래서 본문 2절에서도 “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는 게세마네 동산에 가면 그를 팔려는 가룟유다가 올 줄을 알았겠습니까? 몰랐겠습니까? 아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면 가룟유다가 와서 그를 팔게 될 것을 아시고 그 동산에 가셨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단순히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8. 이를(목숨을)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자발적으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그래서 여러분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은 단순히 누구에 의해서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셨습니다.

그때 3절에 보면 “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고 합니다.

유다는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는 작게는 400-600명 정도가 됩니다. 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지키는 경호원과 같은 사람들도 40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0명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는 결국 군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하십니다.

5절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예수님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니라를 원문으로 보면 나는 이다는 말입니다. 원래는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나는 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에서 나는 이다고 말하는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도 여호와가 누구냐고 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나는 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나는 그니라고 하신 것도 그냥 나는 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는 나는이다는 말씀을 일곱 번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는 너희들이 찾는 그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어떤 일이 벌어 집니까?

6.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것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땅에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것을 유럽에서 그림으로 그린 것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

여러분 이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놀랄만한 큰 소리로 나는 이다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여기서 예수님께서 손으로 장풍을 불어서 군인들이 넘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당시 세계 최고의 군인들입니다.

그러면 왜 이들이 나는 이다는 한 말씀에 넘어졌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에 땅이 있으라 하니까 땅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큰소리를 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장풍을 휘날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하게 나는 이다는 말씀을 통해서 세계 최강의 군인들을 넘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우리에게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줍니까?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을 이길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할 길은 십자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을 한 말씀으로 물리치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힘이 있으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그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힘을 사용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만 잡으러 왔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를 따라는 제자들도 같이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만 죽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도 같이 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찾는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시고 이 사람들, 즉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1712절에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는 힘을 사용하셨습니까?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힘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자셨습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기쁘게 지셨다는 것이 예수님에게 십자가가 큰 고통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자 인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무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기쁘게 지셨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십자가의 고통을 이기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출산할 때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 고통을 이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을 잊을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강합니다.

그래서 이 한 주간동안 여러분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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