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약성경연구/요한복음

요한복음강해(52)하나 되게 하옵소서(요17:20-23)

by 금빛돌 2024. 4. 13.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세 번째기도입니다. 첫 번째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11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11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될 모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 즉 11제자들만 위함이 아닙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우리를 위해서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제일 먼저는 구원입니다. 또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세상이 믿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세상이 알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성자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구속하신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17절입니다.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그 다음 8절과 9절을 삽입구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목적이 10절에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10. (이는) 하늘에 있는 것(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것(땅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하나)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도 우리가 서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성부하나님께서 성령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목적도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3절에 보면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신 목적,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목적이 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서로 하나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어느 정도로 하나가 되어야합니까? 오늘 본문 22절을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됨과 같이 우리도 서로 하나가 되기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시는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인격체인데, 그분들이 서로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따라서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어떻게 서로 하나 됨을 드러내셨습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분들 사이에 영원하고 끊임 없는 교통하심과 교제하심으로 하나 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사이에 영원하고 끊임없는 교통과 교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에 드리는 이 예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기쁨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시편683절을 보면 68:3. 의인은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기쁨의 교제를 나눈 뒤 성도들과 기쁨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했을 때 가르칠 교자 모을 회자라고 하기 보다는 교제할 교자, 모을 회로 쓰는 것이 더 성경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 교통하시고 교제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교통하고 교제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은 어떻게 서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셨습니까?

제일 먼저 요171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함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두 번째 21절을 보면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음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세 번째 25절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잘 앎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25.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네 번째로 26절을 보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함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26. --이는 나를 사랑하신 (아버지의)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함으로 교통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서로를 볼 때, 무시하거나 질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교회에 왔어라고 해서는 그 어떤 교제도 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당신을 보니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을 보니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교회에서 이렇게 해보라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 사람을 아는데, 어떻게 이 사람을 보고 영광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영광스럽다는 말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두고 영광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을 보면 깨어지기 쉬운 아무 것도 아닌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영광스러우시고, 보배로우시고, 존귀하신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그 자신이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보면 절대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계신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을 보면 얼마든지 서로가 서로를 영광스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임을 할 때 항상 마침 송으로 내 안에 사는 이 예수그리스도니를 불렀습니다. 1절은 내 안 사는 이 예수그리스도니라고 부르고, 2절은 너 안에 사는 이 예수그리스도니라고 불렀습니다.

너 안에 사는 이 예수그리스도니 너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너의 왕 네 노래 네 생명 또 네 기쁨 너의 힘 너의 검 네 평화 너의 주 너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너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교회가 서로 싸울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서로 싸울 때 서로 안에 계시는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웁니다. 여러분 서로를 보실 때 겉으로 보이는 인간의 질그릇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계시는 영광스러우신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봄으로 광스럽습니다라고 고백해 줄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는 서로가 서로의 안에 있음으로 교통하고 교제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의 심장을 갈라보면 그 안에는 사도바울의 심장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심장을 갈라보면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면도칼로 그의 심장이 도려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18절에서 1:8.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예수님의 심장을 가진 바울의 가슴을 더 들어다 보면 그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 안에는 그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이나 욕망이나 비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가지고 있는 사도바울 안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교회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노예 죄수였던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 줄 때 준 편지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오네시모 한 사람을 위해서 성경책 한 권을 썼습니다. 거기서 사도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소개할 때 어떻게 합니까? 빌레몬서 112절에 1:12 --그는 내 심복이라고 합니다. 심복이란 내장기관을 뜻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안에 사랑하는 교회의 지체들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또 옆에 사람에게 당신이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교회생활이 무엇입니까? 생업을 제쳐놓고 매일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서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사랑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늘 가슴에 품고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교회의 지체들을 늘 가슴에 품고 중보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 교회에서 그 지체를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반갑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생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기도의 가슴으로 품음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서로 교통하고 교제해야합니까?

셋째 서로가 서로를 잘 앎으로 교통하고 교제해야합니다.

여러분들은 곁에 있는 성도님들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교회생활을 몇 십년하면서도 우리는 곁에 있는 성도들에 대해서 서로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빙산의 일각과 같습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처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한 교회의 지체라면 서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 대해서 깊이 있게 잘 알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난 다음에 나는 알았네, 그 사람의 문제를라고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 비난하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저의 입 모양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고 난 다음에 아 그럴 수가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구나”.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구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절대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도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변화시키겠습니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잘 받아들이시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제가 죄를 용납하고 이해하고 받아주라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거나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잘 알고 이해함으로 교통하시고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서로가 사랑함으로 교통하고 교제해야합니다.

여러분 사랑한다는 것과 좋아한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좋은 점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그 교회를 떠나거나 부정할 조건을 제공하지 않고, 도리어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교회를 다닙니까? 이 교회 가운데 아무런 문제나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이 교회가운데 많은 어려움과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 아무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는 교회를 찾아다닌다면, 그런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처음 서울에 오니까 사랑의 교회는 사랑이 없고, 소망교회는 소망이 없고, 순복음교회는 복음이 없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어려움과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금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그 교회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한다면 교회의 어려움과 문제를 사랑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어려움과 문제를 헌신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이란 사랑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만한 사람이 될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순교자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를 저주하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저주하면 할수록 더욱 나는 당신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게 침을 뱉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숨결을 뿜어 낼 것입니다.

나를 때리십시오. 나는 신음 소리로 사랑을 고백할 것입니다.

나를 찌르십시오. 나는 사랑한다고 절규할 것입니다.

나를 짐승의 먹이로 던지십시오. 나는 사랑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나를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랑의 열기로 당신의 증오의 가슴을 녹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체들을 끝까지 사랑함으로 서로 교통하고 교제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따라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