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십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십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유심히 보시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2절입니다.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의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것을 죄의 문제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태중에서 잘못된 일을 하면 불행하게 태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또 부모가 죄를 지으면 그 죄의 결과로 자녀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예수님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3절입니다.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4절과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세상의 빛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도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맹인을 고쳐주십니다.
6절입니다.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말씀으로만 하실 때가 많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실 때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맹인을 고치실 때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십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신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빛을 보여주시기 위해 눈에 진흙을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눈에 진흙을 발라주신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실로암 못에 보내어 그의 눈을 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시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사람이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사람의 이웃이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무엇보다 여러분이 이 사람의 부모라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런데 요9장을 보면 이 사람이 눈을 보게 된 것 때문에 큰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사람의 이웃입니다. 이웃 사람들은 이 사람이 전에 구걸하던 맹인이 아니었는가 라고 합니다(8).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에 구걸하던 사람은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비슷하고 합니다(9).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가 그 맹인이었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9하). 그러니까 이웃 사람들이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합니다(10). 그러니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가서 씻으라 하여 씼었더니 내가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11).
그러니까 그들이 그 예수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바리새인에게 데리고 갑니다(13).
그러면 여러분 왜 이웃사람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바리새인에게 데리고 갑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맹인을 고쳐주신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식일에 맹인의 눈을 고쳐주신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이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에게 갑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16절을 보시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자가 어떻게 하나님께로 부터 온 자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인 자가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는가” 라고 합니다.
여러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의 눈이 밝아지면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함께 같이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함께 기뻐하기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맹인을 고치신 것때문에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유대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유대인의 사회에서 쫓아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인자 즉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내가 믿고자 합니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절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의 불행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을 무조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생각각합니다. 그 운명 중에도 불행한 운명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든 불행을 죄 때문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평생 부모의 죄를 원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이것이 운명이라면 평생 그 운명 가운데 낙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당한 그 어떤 어려움이 단순히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운명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서 어려움을 당히는 분이 계십니까?
누구의 죄 때문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햐시는 일이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육신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가족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 병을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어떤 육신의 병도 낫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치유의 기적을 베푸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맹인도 눈이 낫고, 나중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족 가운데서 육신의 어러움이 있는 분들은 분명히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분명히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분명히 있음을 믿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신앙은 홀로서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이 맹인이 눈을 보게 되었다는데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보게 된 후에 예수님을 믿는 과정이 과정이 나옵니다. 처음 10절과 11절을 보시면 이웃사람들이 어떻게 네 눈이 떠졌느냐고 하니까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내 눈을 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너는 예수를 어떤 사람이라고 하느냐고 하니까 “선지자”라고 대답을 합니다. 또 33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여 내가 믿나이다고 하고 예수님에게 절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생각할 때 예수님 때문에 눈을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육신의 눈이 보게 되었어도 아직 이 사람은 예수님을 단순한 예수라는 그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단순히 병이 낫는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어떤 분이 암에 걸려서 기도해서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교회도 나오지 않고 예수님도 믿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 것은 유대인에게서 쫓겨난 후입니다(34). 유대인의 사회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개와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언제 이 사람을 다시 찾아오신 줄 아십니까?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그 하나님의 아들/메시아)를 믿느냐” 고 물으십니다.
그때 36절에 보면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37절에 “지금 네가 보고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메시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38절에 이 소경이 말하기를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눈이 보게 된 후에 보게 된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을 뜨고 사람들을 보니까 너무 이상합니다. 그 당시 가장 종교적이라고 하던 바리새인들도 이런 상황을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눈을 보게 했다고 해서 출교를 시킵니다. 그래서 당시에 종교인 중에서 제일 잘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또 이웃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유대인에게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서 예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합니다(21). -그러니까 지금 이 맹인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이 세상에 정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5절에 보면 예수님이 “네가 인자(메시야)를 믿느냐” 라고 했을 때, 36절에 보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기도 전에 “내가 그 인자(메시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고, 예수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언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만나게 됩니까?
그것은 이제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 아무도 없고 나 혼자라고 느껴질 때 --그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정말 예수님을 언제 만났느냐 하면 제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님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습니다. 며칠을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선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교회를 떠난다고 하니까 그 선배는 “어디를 가느냐”는 말 한마디 없이 내가 떠난 그 자리에 “누구를 넣어야겠네” 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때 저는 매일 눈물을 흘리면 “큰 물결히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저어 항해 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는 찬양을 매일 불렀습니다. 그때 저 등대의 불빛은 바로 내가 믿었던 그 선배였습니다. 저는 그 선배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다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을 것은 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홀로서기입니다.
홀로서기의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홀로서기의 신앙이란 이 사람처럼 사람에게 실망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주님 앞에서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거나 신앙생활하면서 주로 누구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대부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내가 믿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특히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들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조차도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지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실망을 해서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버린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정말 전도하기 가장 어렵습니다. 교회 옆에 있었던 닭갈비집 사장님도 그렇고, 교회 앞에 가게 사장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 때문에 낙심하고 실망하여 하나님 앞에도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홀로서기의 신앙입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리 실망을 주어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홀로서기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왜 우리가 사람에게 실망을 하고 낙심을 합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을 내가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고 의지하고 바라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우리는 실망을 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믿지 못할 존재가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2: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하고 환호했던 예루살렘의 군중들이--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가 언제 높이 들린 보좌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그가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웃시아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그가 믿고 희망했던 인간적인 희망이 사라질 때--그때 비로소 그는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가 가장 믿었던 남편이나 자녀를 먼저 보낸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나를 떠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절대 그것 때문에 낙담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이 믿고 의지할 사람이 떠날 그때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 나를 떠날 때 그때가 정말 여러분이 주님만을 믿고 의지할 때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란 믿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해야 할 존재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 홀로 서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예수를 믿고--또 누구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에게 신앙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보다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내게 무엇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실망스러워도 여러분은 끝까지 주님 한 분만 믿을 수 있습니까? 또 내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떠나도 끝까지 주님 한 분만 믿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릴지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홀로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소경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9장에 진정한 소경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날 때부터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자를 맹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를 진정한 맹인으로 보십니까?
육신의 눈을 뜨고 있지만 영적인 눈이 어두운 바리새인들을 진정한 맹인이라고 보십니다.
그래서 3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맹인)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을 영적인 맹인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니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가 우리 보고 맹인이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정말 맹인인가 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 자신이 영적인 맹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너희가 영적인 맹인이라 고 하였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영적인 맹인이 아니라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맹인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셔도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신 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계신 것을 보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에게 있는 현실의 문제가 더 크게 보이십니까? 아니면 여러분들 가운데 그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십니까?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사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아람 군대가 엘리야가 있는 도단성을 에웠쌋습니다(왕하6:14) 그러니까 엘리사의 종이 엘리사에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라고 합니다(왕하6:15).
이때 엘리사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눈이 있습니다. 엘리사의 종처럼 이 세상을 인간적인 시각으로만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시각에서만 세상을 보면 무엇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어렵게 하고 함들게 하는 현실과 사람들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적인 눈은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듭니다.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가슴이 막히고 숨이 막히게 합니다. 결국 이런 인간적인 눈은 하나님을 불신앙하게 만들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눈은 엘리사처럼 영적인 세계를 보는 영안의 눈입니다.
왜 엘리사가 사환을 보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까? 단순히 심리적인 위안만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영안의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그를 위협하고 있는 아람의 군대 보다 더 많은 하늘의 군대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병거와 불 말을 보내주셔서 엘리사주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이것이 환상입니까? 아니면 사실입니까? 이것은 절대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아람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의 군대를 보내주셔서 지금 엘리사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이것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사실입니까?
예 오늘 나에게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불병거와 불말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약시대에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 안에 계시고, 또한 우리 곁에 계셔서 친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불 말과 불 병거는 불과 같이 우리가운데 계신 성령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엘리사 곁에 있는 불 말과 불 병거가 단순히 숫자적으로만 아람의 군대보다 많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엘리사를 에워싸고 있는 불 말과 불 병거는 그 힘에 있어서도 아람의 군대보다 더 강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운데 계신 성령하나님이 우리를 위협하고 에워싸고 있는 그 사탄의 권세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이 말씀에 보면 우리가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또 예수를 믿는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하여 이긴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하여 이긴 자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자보다 더 크고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이 세상에 있는 자보다 더 크고 강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사탄의 권세가 크고 세어도 결코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 안예 계신 하나남이 이 세상보다 더 크시기 때문입니다.
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넘어지려고 할 때 언제든지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의 눈이 열리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에서도 엘리사는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세상이나 현실이 아니 사람에 대한 연구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밤이 세도록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만을 묵상합니다. 그러다가 새벽에 갑자기 자살하여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상황에 대한 묵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영안의 눈을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문제보다 더 강하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볼 수 있는 영안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안의 눈이 열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해서 날마다 현실의 절망과 낙심을 이기시고 승리하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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