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보면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도 많이 회자되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국회의원이 방송에서 나와서 “성경에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서 누가 어떤 죄가 있는가를 추궁하는 것은 잘못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판사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엄마가 아이에게 혼을 낼 때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고 배웠어 엄마 죄가 없어 엄마도 죄가 있잖아 그러면서 왜 나보라 뭐라고 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또 학교에서 학생이 잘못했을 때 선생님이 잘못이라고 할 때 학생이 “선생님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죄가 없습니까? 선생님 죄 없는 자가 돌로 치십시오”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내가 보고 싶은 데로 볼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의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그 한 말씀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문맥을 살펴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는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오셔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때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무리들 가운데 세웁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문제를 냅니다.
4절과 5절입니다.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따라서 극형으로 다스리는 죄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둘째는 살인죄입니다. 셋째는 간음죄입니다. 간음죄는 가정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특별히 엄하게 다루는 죄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령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6절을 보시면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고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한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신22:23.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24.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동안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서로 사랑하고 고 하신 말씀에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만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죽이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최고 자치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합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그들이 하지 못하니까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도 고발합니다. 이 여인을 죽이라 하면 로마법에 고발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유대인의 법에 고발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6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하--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어떻게 말씀하시던지 고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돌에 십계명을 직접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쓰셨습니다.
어떤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레위기의 말씀을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레22: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남자)와 음부(여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모세의 율법에 보면 간음하는 자는 여자만 아니라 남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남자는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간음하는 현장을 가보니까 남자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대 여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있는 남자는 도망하게 하고 힘이 없는 여자만 데리고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처음부터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을 잡기 위해서 어떤 남자로 이 여인을 유혹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도망가게 하고 여인만을 데리고 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는 간음하는 남자와 여자를 다 죽이라고 하는데, 왜 여자만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7하--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직 간음한 여인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을 보면 분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의 사회에서 이런 간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서 이 여인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이 여인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땅에 쓰신 글을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약자에 대해서는 강하고, 강자에 약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또 모세의 율법을 겉으로는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땅에 글을 쓰십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 땅을 무엇을 쓰셨는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결국 예수님은 다른 율법들을 쓰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는 말씀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수 많은 율법들을 땅에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겠습니까?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여러 율법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0절입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니까 이 여인이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기준에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을 따라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이 여인을 돌로 죽이라고 하는데, 왜 힘있는 남자는 도망가게 했습니까? 왜 힘도 없는 약한 자에게만 엄한 율법적 잣대를 내세웁니까?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이 법정에서 판사도 죄를 판결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학교 선생님이 잘못한 학생에 대해서 잘못을 말하지도 말씀도 아닙니다. 엄마가 잘못하는 아이를 혼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판사는 자기 자준이 아니라 명백한 법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결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학생이 잘못했을 때 자기 기준이 아니라 학칙에 따라서 엄격하게 벌을 내려야 합니다. 요즘 선생님들이 왜 분노하고 있습니까? 학생이 분명히 잘못했는데 그 잘못을 말하면 고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니까 요즘에는 학교에서 학생이 잘못했을 때 청소를 시키는 벌을 주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잠언 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사부일체라고 하면 여기서 자식을 학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매를 대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예전에 일부 선생님들이 기준이 없이 학생들을 무조건 때리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 학생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엄마도 자녀가 분명한 잘못했을 때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이 그 어떤 징계도 내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정확한 성경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첫째는 바른 말씀의 선포입니다. 목사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바른 성례전의 집행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성찬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교회는 바른 성례가 있어야 합니다. 또 세 번째는 참된 교회는 바른 권징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권징의 기준은 성경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그 어떤 징계도 내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돌로 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른 성경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실수한 자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4절에 보시면 “이 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이러한 여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간음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0절에 보시면 “여자여”라고 합니다. “간음한 여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여자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돌로 죽이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 형제를 죽인 살인자 모세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모세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실패자 베드로야” 하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0년 전에 어떤 학생이 50만원 하는 일제 사진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할부로 사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비싼 사진기였습니다. 수학여행을 가서 기차에 두고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수학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들과 즐겁게 놀지도 못했습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그 학생은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아끼시던 사진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아 사진기는 나중에 다시 사면 돼, 괜찮아, 그런데 너 이것 때문에 즐거운 수학여행을 즐겁게 보내지 못했지, 그래서 사진도 찍지 못했지. 아들이 내가 가슴 아픈 것은 사진기 때문이 아니야. 그 사진기 때문에 즐거운 수학여행을 보내지 못한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자녀가 잘못했을 때 ”이 바보 멍충아 이것도 못하니, 이 게으름뱅이야 왜 이렇게 게을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돌대가리야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부모가 자녀가 잘못한 행동을 가지고 그 자녀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그런 행동을 하니 너는 그런 놈이야 라고 하면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으면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탄은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있는 사탄에게 너를 책망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불에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대제사상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불에 약간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 금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금화가 불에 그슬려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이 금화는 불에 그슬렸어 쓸모없어 버려야 해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것은 불에 약간 그슬렸을 뿐이야 그을음을 닦으면 이것은 여전히 금화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불에 그슬린 금화입니다. 닦아 내면 빛나는 금화입니다”.
여러분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참소하여 낙심하게 하는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너 혹시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넘어졌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딸이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실수하거나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어려운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안돼"라고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또 이런 것이 거듭되면 사람은 실패의 운명론에 빠집니다. "나는 안되는 놈이야--별수 없는 놈이야--나는 이 땅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자로 운명지어졌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납한다하더라도 사람들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너는 실패자야,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안돼"
무엇보다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실패했단 말인가? 도무지 내 양심에 거리껴 감히 예수님 앞에 못서겠다고 합니다. 그때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이 너를 정죄하고 네 양심이 너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백번이라도 넘어진 우리에게 단 한마디의 말씀을 하십니다. “괜찮아 앞으로 다시는 그리지 않으면 돼, 다시 용기를 내, 다시 시작해, 넌 할 수 있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께 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저는 신학대학을 다닐 때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제 마음대로 살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배울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말씀 앞에서 날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크고 깊은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안돼--나는 절대 말씀대로 살 수 없어---아무리 노력해도 또 말씀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에 항상 용기를 주었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라고 말씀 하십니다
정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마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여기저기에 실패와 좌절의 올무를 놓습니다. 뒤에서 숨어서 가만히 엎드려서 우리가 그 올무에 걸려서 넘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실수하여 넘어지면 사탄의 왕국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또 동네방네 다니면서 우리의 실수를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올무를 점점 더 크게 조이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를 인한 고통의 멍에를 끊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담궈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인해 사유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혹 예수님의 건망증을 아십니까?
우리가 같은 죄를 가지고 99번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제 100번째입니다. 이제 너무 죄송해서 감히 예수님께 회개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나옵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 이번이 처음이구나“고 말씀하십니다. 100번째의 죄로 보지 아니하시고, 첫번의 죄로 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건망증입니다. 우리는 죄를 기억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회개하고 용서한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과거의 죄의 올무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의 행동으로 우리의 미래의 삶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그 사람은 과거에 저런 사람이야, 그러니 앞으로 저럴 수밖에 없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과거의 삶이나, 심지어 현재의 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고, 또 현재에도 자주 넘어지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아직도 온전치 못한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내 마음의 바른 태도만 가지고 있으면,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태도만 가지고도 우리의 미래를 봐 주십니다. 그리고 격려해주십니다.
"지금은 네 모습이 아직 그런 모습이지만--네 마음의 중심을 내가 알고 있어--너는 반드시 앞으로 네가 마음에 소원하는대로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떤 이유로 인해 실수하시거나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절대 좌절하시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날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힘을 입어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새롭게 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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