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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46)삶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창35:16-21)

by 금빛돌 2022. 7. 15.

어떤 사람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계속해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랬는데 갑자기 어디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삶은 계란이요

그래서 그 사람은 계란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신앙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신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삶의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 속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 상황을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인데,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 상황을 불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벌어진 일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왔습니다. 그들은 눈앞에는 가나안 땅이라는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이때 열 정탐꾼은 저 가나안 땅은 두려운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사 죽이시려고 이곳으로 인도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저 가나안땅으로 들어 가자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은 삶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야곱이 벧엘을 떠나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이렇게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벧엘에서 길을 떠나서 에브랏에 가까운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라헬은 요셉을 낳았을 때 한 아들만 더하여 달라는 뜻에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아이를 낳으면서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낳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산파는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지금 또 아들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라헬이 아들을 낳다가 어떻게 됩니까?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부릅니다. 베노니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벤은 아들이란 뜻이고 오니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이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이 아들이 어머니가 없이 살아갈 것을 생각해서 너무 슬퍼서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자신이 살아서 이 아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아야하는데, 그렇지 않자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또 그 후에 야곱의 아들인 르우벤이 라헬의 시녀로 야곱의 첩인 빌하를 범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것은 참으로 야곱에게 수치스럽고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창 35장 마지막에는 아버지 이삭이 죽는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좋은 일만 벌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보면 아내가 죽는 일도 벌어집니다. 아들이 속을 썩이는 일도 벌어집니다. 아버지가 죽는 일도 벌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라헬이 죽으면서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불렀으나 야곱은 어떻게 부릅니까? 이 아들은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베노니가 아니라 베냐민이라고 부릅니다. 베냐민이란 오른 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른 손이란 하나님의 권능을 뜻합니다. 또 오른 손이라 축복을 뜻합니다. 그래서 축복을 할 때도 오른 손으로 축복을 합니다. 또 오른 손이란 행복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 동안 야곱은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한 번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냐민의 경우만 야곱은 즉각적으로 나서서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말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곱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내 현실은 슬픔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나의 슬픔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아들이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축복의 아들이고, 행복의 아들이 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슬픈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슬픈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삶을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전도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항상 웃는 분이십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신데 항상 웃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보면 전혀 어려움이 없이 사신 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너무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종이 박스로 바람을 막아주는 그런 곳에 아이들과 같이 지낸 적도 있었습니다. 또 반찬이 없어서 간장으로 반찬을 대신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항상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우리 집에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집이야, 이렇게 박스가 바람도 막아주지 안니”. 또 아무 것도 없는 밥상위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들아 오늘은 어떤 반찬을 먹을까? 사랑반찬을 먹을까 희락반찬을 먹을까 화평반찬을 먹을까 오늘 하나님께서 너무 맛있는 반찬을 많이 주셨구나이렇게 하면서 아이들을 길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자녀들이 한 자녀도 어긋난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먼 곳에 있었지만,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행복한 인생입니까? 불행한 인생입니까? 우리 인생이 행복하냐는 내가 살아온 객관적인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은 환경에 살았다 하더라도 내가 불행하게 해석을 하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살았더라도 행복하게 해석하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 행복한 인생인가 아닌가는 객관적 사실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해석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의 사건과 아픔들을 격습니다. 그때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 모든 사건들과 상처들과 아픔들을 세상적이고 인간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만 해서는 감사하고 찬송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감사하고 찬송을 하고, 집에 들어가서는 원망, 불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은 가정에서 나와야합니다. 또한 우리의 처절한 삶속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어떻게 항상 하나남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야곱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축복의 아들이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해석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베냐민을 낳은 곳이 에브랏이라고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라고 합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입니다. 이 베들레헴은 다윗 왕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이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그래서 미가서 52절에 보면 "5:2.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에브라다가 바로 에브랏이고 베들레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축복의 아들, 행복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그 베들레헴이 나중에 다윗의 출생지가 되었고, 예수님의 출생지가 되었습니다.

또 룻122절에 보면 1: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그때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이 아들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축복의 아들이라고 하고 행복의 아들이라고 하였을 때 그가 태어난 곳이 슬픔이 변하여 회복이 시작이 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또 이 베냐민의 자손 가운데서 누가 나왔습니까? 사도바울이 나왔습니다. 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방인인 우리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주 동안 어떤 일을 격으셨습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격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입니다. 무엇보다 그 일을 내가 신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 어떤 일을 겪든지 그 모든 일들을 인간적인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 해석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베노니의 삶, 슬픔의 삶이 아니라, 베냐민의 삶, 권능의 삶, 축복의 삶, 행복한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슬픔의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이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첫째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시편 166절에서 다윗은 16: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제로 다윗이 있었던 그 땅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왕으로 제일 먼저 통치하게 하신 곳이 헤브론 땅이었습니다(삼하5:3-5).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의 열 정탐꾼이 가나안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악평을 했던 땅입니다. 또 수14장에서 갈렙이 사람들이 들어가기 싫어하는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그 산지가 바로 헤브론 땅입니다.

/그런데 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그 헤브론 구역을 아름다운 곳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단순히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다윗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십니까? 우리가 단순히 환경만을 바라보고, 또 남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처럼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게 주신 것이라고 해석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일 수 있습니다.

//내 얼굴이 남들과 비교했을 때 아름답데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얼굴이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얼굴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요즘 자폐를 가지고 있는 변호사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자폐는 분명

장애입니다. 그런데 그 장애조차도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으로 보면 그 장애조차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신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자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아내나 남편을 볼 때도 이렇게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남편을 아내를 만나게 해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남편이 아내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어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입니까? 다른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내게 주신 이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지금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으로 바라보시고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고,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2)또 우리는 우리 인생을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욥은 한 순간에 모든 재산도 잃어버리고, 또 자식도 잃어버리고, 또 육신의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욥의 아내는 이런 욥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2:9).

또 욥의 친구들은 욥의 인생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죄의 관점에서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욥이 무언가 죄가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욥의 인생을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인생을 해석하고 있습니까? 1:21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로다(개역한글)”

욥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또 욥은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개역한글)” 고 했습니다. 이것은 욥이 자신의 인생을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가 죽게 하십니다. 또 왜 큰 아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하십니까? 왜 아버지 이삭을 죽게 하십니까? 왜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야곱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듬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힘든 일들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과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아름답게 나오게 될 줄을 믿으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해석해야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하나로 압축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까? 그 이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성령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까? 그 이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 모든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지난주에 장례식에 다녀왔습니다. 10여년에 어머니를 하나님께서 먼저 데려가셨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 아버지도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시고,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40의 나이에 왜 일찍 데리고 가셨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하시고 왜 아버지조차도 60대 초반에 데리고 가셨습니까? 이것은 요11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와 그 가족들을 누구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가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왜 예수님 일찍 오시지 않았습니까? 왜 내 오라비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사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40대에 돌아가신 어머니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셨습니까? 60대 초반에 돌아가신 아버지도 사랑하셨습니까? 예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 가신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젊었을 때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그 꿈을 빼앗아가셨습니다.

또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사람도 빼앗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내가 꿈꾸고 사랑하고 바랐던 것을 다 빼앗아 가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가시를 돋게 하십니까? 왜 내 삶에 담장을 놓으십니까? 왜 내가 가는 길들을 막으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사랑하는) 본 남편(하나님)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래서 여러분 질투하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로 날마다 돌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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