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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45)신앙의 위기는 고난이 아니라 평안이다(창34:30-35:15)

by 금빛돌 2022. 7. 8.

여러분 신앙의 위기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평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이 신앙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극심한 환난가운데서 신앙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고난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다윗도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궁에 평안히 거하게 된 때에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면 더 감사하게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내 삶이 더 평안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고난보다는 평안의 때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기기 더 쉽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야곱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3장에서 야곱은 20년 동안 힘들었던 에서와의 관계가 풀렸습니다. 20년 동안 야곱의 마음의 마음이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의 마음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야곱에게 같이 에돔 땅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정중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3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18. 야곱이 밧단아람(하란)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에서와의 문제가 풀리자 이제 야곱은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릅니다.

여기서 평안히라는 말에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평안히라는 말은 샬렘이라는 말로서 외부에서 위협하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라고 했을 때도 평안의 도시라는 말로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외부의 위협이 없는 평안의 도시를 꿈꾸었습니다. 이제 야곱의 삶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장막을 칩니다.

이렇게 야곱이 세겜 성읍에서 장막을 친 것까지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3: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여기서 보면 야곱은 장막을 친 밭을 세겜 사람들에게 백 크시타에 삽니다.

왜 이렇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이제 여기서 계속해서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특별히 왜 하필이면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사서 계속해서 살기를 원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세겜은 당시에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또 물이 풍부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겜에 살면 육신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이 풍요롭게 더 잘 살줄 알았습니다. 또 세겜에 살면 자녀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랄 줄 알았습니다. 이 세겜은 요즘으로 말하면 강남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부요하고 자녀를 교육하기에도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곱이 한 가지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갈 때 벧엘에서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다시 가나안땅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으로 갈 때가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야곱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습니다.

33: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여기서 보시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셔서 가나안땅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제는 하나님을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창3322절을 보시면 33:22. 내가 (벧엘에서)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평안을 주시면 야곱은 다시 벧엘로 돌아와서 벧엘에서 기둥으로 세운 이 돌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집으로 삼을 것이라고 서원했습니다. 또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 즉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서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계속해서 거주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대략 10년 정도 야곱에 세겜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 거기에 거주하면서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셔도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어려울 때 이렇게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내게 평안을 주시면 저는 절대 주일예배를 빼먹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면 내가 선교헌금을 내겠습니다 고 서원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평안을 주시면 하나님께 했던 모든 서원들은 다 잊어버립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평안을 주니까 벧엘에서 하나님께 했던 모든 서원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실 때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한 서원조차 잊어버리고 세겜에서 완전히 정착하여 살려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4장에 보면 야곱의 유일한 딸인 디나가 세겜 성읍에 갔다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그래서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를 아내로 맞으려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 동생을 줄 수 없다고 하고 세겜의 모든 남자들로 할례를 받게 합니다. 할례를 받으면 3일째가 제일 어려운데 그 3일째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서 같은 배에서 난 디나의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세겜 성읍의 모든 재산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노비로 잡아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의 주민들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수가 적은데,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모여서 나를 치고 죽이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에도 이스라엘이 중동의 국가를 치면 다른 중동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것처럼 얼마든지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은 이 일로 가나안족속들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창34장을 보시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디나가 세겜 여인들을 보러 갔을 때 하나님께 물어보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리고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했을 때도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저는 몇 주 동안 창 34장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는데, 도무지 어떤 말씀을 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창33장에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창 34장에서는 여전히 야곱이라고 불립니다.

/여러분 왜 야곱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20년 동안 그를 괴롭혔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할 문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이 평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하나님이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의 최대의 위기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고난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잘 될 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우리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악취를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자녀를 망치는 제일 큰 지름길은 우리 자녀들이 무조건 세상에서 잘 되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보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서 성공만하면 된다. 무조건 육신적으로 잘 살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녀를 망치는 제일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해답이 창35장에 있습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여기서 보시면 주어가 누구입니까?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야곱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잘못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없어질 위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위기는 고난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고난은 신앙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완벽한 평안을 주지 않으십니까? 왜 큰 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 왜 항상 하나만은 남겨두십니까? 고난가운데서 여러분에게 찾아오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가운데 야곱과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먼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은 이라는 말로서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낙담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쿰이라고 하셨습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일어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사용되었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동안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로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또 여러분의 삶 가운데 무거운 짐들도 힘들어하고 계십니까? 그래서 내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설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러하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으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합니까? 벧엘이 어떤 곳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까? 벧엘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사닥다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은 그 곳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사닥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절대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남 때문이 아닙니다. 34장에 보면 야곱과 그 자녀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딸이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였을 때 세겜 사람들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딸 디나도 세겜에게 여성으로서 말로 할 수 없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또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세겜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 어디를 보더라도 도무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없는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또 우리도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닥다리로 날마다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힘을 얻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절망과 고통, 우울과 낙심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영상).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고 불안하고, 앞서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붙들어주고 기댈만한 곳도 없어서 결국 우울증이 빠지는 비참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사는 힘입니다. 우리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힘입니다. 절대 기죽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비틀거릴 때마다 붙들어 주는 강한 손입니다. 어떤 형편에도 자족하는 힘입니다. 힘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없는 힘이 필요합니다. 밖으로부터 오는 힘이 필요합니다. 십자가에 가까기 나아가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붙들고 놀라운 사랑을 다시 체험할 때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가 바보 같고 쓸모없고 어리석고, 경쟁에 뒤처지고 살맛이 안난다고 말하지, 그러나 나는 너가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단다.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 매달려 죽었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니?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해주는 데 이것 가지고 만족 못하겠니? 인생의 짐이 무겁다고? 나는 너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졌단다. 다 지나가는 거야, 내가 너에게 안겨줄 하늘의 영광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도 비교가 안되..”

십자가 앞에서 이런 음성을 듣는다면 힘이 안 생길까요? “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이구나, 나는 절대 시시하게 인생을 살수 없어, 가난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나를 가볍게 취급하시지 않는구나, 나는 소중한 존재야

그래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벧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날마다 경험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에라는 말입니다. “이에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대한 야곱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고난이 신앙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대한 반응해야합니다. 또 나를 사랑하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응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반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을 다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이제 야곱은 혼자서 벧엘로 가자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와 함께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고 합니다. 또 그들에게 모든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기를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고 벧엘로 올라가자 라고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단순히 예배당에 오는 것만이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곳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내 삶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우상을 제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로 물든 나를 십자가의 피로 정결하게 씻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옛 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의 모든 우상을 버리고, 죄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집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동안 하나님은 야곱의 환난 때마다 그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는 길에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앞으로 내 환난 날에 반드시 내게 응답하시고, 앞으로 내가 가는 모든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려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 더 가까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평안의 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평안의 때에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환난의 때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시편55: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이란 고난이라는 말보다 더 극심한 것입니다. 고난이란 어려워도 인간적으로 조금 기댈 언덕이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 아무도 그를 도울 자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겠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을 생각한다, 묵상한다, 바라보기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환난 날에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합니다. 평상시에는 우리가 혹 적당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할 때는 더 간절히 기도해야합니다. 불안과 침체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 가운데 불안할 수 있습니다. 또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안과 두려움은 괜찮찬습니다. 불안하니까-기도할수 있습니다. 두려우니까 기도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침체가 무엇입니까? 영적 침체는 환난가운데 두려운도 느끼지 않고, 불안도 느끼지 않기에 전혀 기도할 기력조차 없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염려가 깊습니까? 환난이 깊습니까? 그러면 그 염려와 환난이 깊은 만큼 우리는 더 간절히 더 깊이 기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묵상하는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 때는 부르짖어야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큰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소리를 내지 않아도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어떨때는 정말 큰 소리로 소리를 내어서 기도해야할때도 있습니다- 환난 때의 기도는 단순히 의식적이고 형식적인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환난때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굳이 미사여구를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하면서 그저 울부짖으면 되는 것입니다----새벽에 기도하시는 것을 들으면 어떨 때는 어떤 성도님이 그저 하나님께 울부짖는 기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바로 그런 기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이고--또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입니다---이 기도는 또 단순히 기도회시간에 나와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길을 가다가도-- 세수를 하다가도 하루종일 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울부짖는 마음으로 기도할수 있습니다----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시고, 그 환난가운데 거져주실 줄 믿습니다0-평안은 신앙의 위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신앙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환난을 하나님을 만날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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