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보면 드디어 야곱과 에서가 화해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서와 야곱이 화해를 하는데 2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20년의 시간이 흘러서 에서와 야곱이 화해를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서와 야곱이 화해를 하게 된 것은 앞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얍복강 사건입니다.
우리가 얍복강 사건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야곱이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기 전에 이미 창32장9-11절에서 야곱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나안땅에 가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창32:9) 그리고 그 동안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습니다(창32:10). 그런데 에서가 자신과 처자를 치려고 하는 상황에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내 형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야곱은 기도했습니다(창32:11).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창32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2:12.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로 에서와 그 군대를 물리치시는 은혜이겠습니까? 아니면 야곱이 힘을 얻어서 에서의 군대를 물리치는 은혜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옛 자아가 죽는 은혜였습니다.
어떤 조폭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전에 조폭두목에게 찾아가서 형님 이제 저는 착하게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조폭두목이 부하들에게 이놈을 땅에 묻어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땅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흙을 단단하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조폭이 땅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폭두목에게 전화가 옵니다. 형님 나를 땅에 묻어서 죽인다고 하셨는데 왜 나를 살펴주셨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때 조폭두목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야 이전의 너는 이미 땅에 묻혔어. 이전에 너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새 사람으로 살아라 고 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그렇습니다.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적으로는 절름발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적으로는 야곱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야곱의 환도 뼈 힘줄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야곱의 옛 자아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얍복강 사건은 신약시대로 말하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의지했던 힘의 근원이 끊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무조건 남을 이기고 높이 되려고 하는 옛 자아가 죽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단순히 공짜 구원을 얻는 티켓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주님의 십자가를 믿습니다 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삶의 실재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과연 십자가와 함께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없는 기도는 자기 고집일 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성경공부는 자기 신념일 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예배는 단순한 종교행사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가 없는 삶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삶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도 야곱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육신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삶이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변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얍복강 이후 야곱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먼저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야곱이 밤새워 하나님과 씨름했지만 여전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야곱을 환영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여기서 보시면 야곱이 누구를 더 사랑하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여종과 그 자식들보다는 레아와 그 자식들을 더 사랑하고, 또 레아와 그 자신들보다는 라헬과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앞에 여종과 그 자식들을, 또 그 뒤에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리고 마지막 라헬과 그 자식들을 두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변화받기 전의 야곱과 같습니다.
그런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창32장에 보면 야곱은 가족들이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했습니다(창32:22-24). 그리고 야곱만 맨 뒤에서 얍복강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어떻게 합니까? 모든 가족들보다 앞에서 나갑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야곱은 그동안 모든 사람들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에서에게 죽더라도 자신만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에서에게 죽더라도 맨 앞에서 나갑니다.
그리고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여기서 완전히 변화된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뺏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서보다 더 높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냥 머리를 숙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몸을 땅에 굽힙니다. 이것은 온 몸을 땅에 완전히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이 아니라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은 에서에게 주(아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이것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에게 배운 대로 나는 당신에게 졌습니다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아닙니다. 야곱이 몸을 땅에 완전히 굽혔다는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겠다 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계속해서 은혜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5절을 보시면 “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고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내게 주신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또 11절을 보시면 “11.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고 합니다. 야곱은 그동안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더 가지고 높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내 소유에 족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소유가 얼마나 되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절대 자신의 소유로 만족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내 소유로 만족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만족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만족합니다” 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분에게는 늘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몸을 완전히 엎드린 야곱은 에서 앞에서도 완전히 몸을 굽힐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겸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은 남을 나보다 낮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은 형 에서 앞에서 자신을 낮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겸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무조건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겸손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만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이고, 몸을 땅에 엎드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굴종일 수 있습니다. 겸손은 비겁한 굴종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사야5장까지 이사야는 유다백성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랄하게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합니까? “사6:5--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야곱은 전날 밤에 하나님을 만난 여운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 앞에서도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몸을 땅에 일곱 번씩이나 굽히고 엎드린 야곱을 보고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야곱의 목을 치기 위해서 온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고 그와 입맞추고 서로 웁니다. 1절에서 분명 에서는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장정 사백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랬던 에서가 어떻게 이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린 야곱의 모습 때문입니다. 또 형 앞에 완전히 엎드린 야곱의 모습 때문입니다. 무조건 이기려는 야곱에서 져 주는 야곱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완전히 설명이 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있지만 이렇게 에서가 변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앞에서 야곱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하나님 나로 가나안땅에 가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게 은혜를 주셔서 에서의 손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어떤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까?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옛 자아가 죽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에서는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동생 야곱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별이 야곱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한 방 맞아서 다리를 절뚝거리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내 동생 야곱아 네가 내 장자권을 빼앗아가고 내 축복까지 빼앗아 갔을 때 나는 정말 분노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이를 갈았다. 그래서 너를 만나면 죽이려고 장정 400명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내 동생 야곱아 네 모습이 왜 그렇니 너 왜 그렇게 다리를 저니/너 집을 떠날 때는 그렇게 건강했는데 왜 이렇게 약하게 되었니/네 얼굴이 왜 그렇니, 어제 밤에 또 누구와 싸웠구나, 사랑하는 내 동생 야곱아 이제 너나 나나 나이가 99세나 되었구나, 우리 모두 다 늙어가는구나, 불쌍한 내 동생아” 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8장에 보면 성전에서 솔로몬의 기도가 나옵니다. 왕상8:50.-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사로잡아 간자로)그들을(이스라엘백성)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떻게 바벨론포로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들이 이스라엘백성을 불쌍히 여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일 야곱의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지 않아서 야곱이 건장한 모습으로 왔다면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또 야곱이 그동안 했던 것처럼 형을 이기려고 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에서는 야곱을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은혜입니까?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또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합니다. 지금 야곱은 브니엘에서 본 하나님의 얼굴을 에서에게서 보았습니다. 브니엘에서 본 하나님의 얼굴은 어떤 것입니까? 야곱을 죽일 수 있지만 그를 불쌍히 여겨준 얼굴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에서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둑거리는 야곱을 불쌍히 여겨주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20년간 헤어졌던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서로 화해할 수 있었습니까? 야곱이 수많은 예물을 에서에게 주었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9절에 보시면 에서도 육신적으로 넉넉해서 야곱에 준 예물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준 예물이 에서의 마음을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오늘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야곱은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에서는 야곱을 불쌍히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 은혜란 위로부터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의 힘입니다.
금요기도회 때 은혜의 힘이라는 찬양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고난 중에도 찬송할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내가 실패했어도 감사할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나를 대적하는 자 사랑할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내게 고통주는 자 풀어줄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날마다 기뻐집니다/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여 질수록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내가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낮고 천한 나에게 주의 능력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값진 옥합을 깨뜨려 헌신할 수 있음은 은혜의 힘입니다/나의 생명 다하여 사명 감당한 것도 은혜의 힘입니다/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모든 염려가 사라집니다/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여 질수록 견디고 이길 힘이 생깁니다/주님의 은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나는 날마다 기뻐집니다/은혜 위에 은혜가 더하여 질수록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은혜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또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엎드릴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또 서로가 서로에게 완전히 엎드릴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자녀의 낫지 않는 건강문제로 기도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기적으로 낫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이것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결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자녀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나라에 하나님의 은혜를 주옵소서,
내 사업에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가 풀리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얍복강 이후 야곱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야곱은 그동안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에서는 야곱에게 우리가 같이 세일로 가자라고 합니다. 그때 야곱은 우리 자녀들이 어리기 때문에 당장 따라가기 어렵다고 합니다. 야곱이 왜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에서가 있는 곳은 가나안땅을 떠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이 가나안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땅에 속해 있는 세겜으로 갑니다.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창12장7절에서 가나안땅에 가서 제일 먼저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벧엘로 갔다가 헤브론으로 갑니다. 마찬가지로 야곱은 아브라함처럼 세겜으로 갔다가 벧엘로 갔다가 나중에 헤브론에서 묻힙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20).
이 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는 이제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십자가를 통과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 이제 나는 내 욕망대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가지 않겠습니다.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고 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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