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림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의사가 있습니다. 그분은 부자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랄 때도 남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남편도 의사입니다. 남편은 방송을 하는 유명한 의사이고 또 이분도 건강과 의료사업을 크게 하고 있습니다. 외모도 아름답습니다. 자녀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평생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의 그런 모습을 남편에게 보이기 싫어서 남편과 떨어져서 산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기 않습니다. 주시더라도 한 가지는 항상 부족하게 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라헬은 외모도 아름답습니다. 자랄 때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라반은 언니는 일하는 암소라는 뜻에서 레아이라고 지었고, 라헬은 사랑스러운 암양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여성의 이름가운데 라헬의 영어 이름인 레이첼이 많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엘을 위해서 7년을 일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라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녀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 1절을 보시기바랍니다.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합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라헬에게 자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헬은 야곱에게 자녀를 낳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지만 억지로 자녀를 낳게 하라는 라헬에게 성을 냅니다. 그러면서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3절-5절을 보면 그래서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아들을 낳습니다.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내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셨다”는 뜻에서 이름을 단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라헬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8절에 보면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는 뜻에서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니까 레아도 자신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주어 아들을 낳았는데, 11절에 보면 보면 “복되도다”는 뜻으로 이름을 갓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낳았는데, 13절에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는 뜻에서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밀을 거둘 때 라헬의 아들 르우벤에 들에 나가서 합환채를 얻어서 어머니 출산이 끊어진 레아에게 줍니다. 합환채란 여성으로 임신을 하게 하는 약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그 합환채를 자신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아이를 낳게 하는 약초를 빼앗고, 레아로 야곱과 동침하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출산이 끊어졌던 레아가 다시 아들을 낳습니다(17). 그래서 20절에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는 뜻에서 이름을 스불론이라고 합니다. 또 그 후에 레아는 딸을 낳는데 이름이 디나입니다(21).
/지금까지 라헬은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부족함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왜 내게 자녀를 낳게 하지 못했느냐고 합니다. 또 자신의 시녀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또 임신하게 하는 약초를 빼앗아서 자녀를 낳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임신하게 하는 약초를 빼앗긴 레아의 태를 다시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20절-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의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라헬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라헬은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분은 남편도 아니고 다른 사람고 어떤 인간적인 방법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낳고 하나님께서 다시 내게 다른 아들을 더하시기를 원한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베냐민을 낳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 목사님은 왜 자꾸 이상하게 아들을 낳는 이야기만 하십니까? 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아들을 낳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레아와 라헬의 경쟁을 통해서 얻은 아들들이 바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족장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구원받은 백성들을 12지파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도 예수님은 신약시대 구원받은 백성의 대표로 12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가 어떻게 태어나느냐가 아니라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들이 어떻게 태어났느냐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레아와 라헬을 통해서 구원받은 12지파가 태어난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의 부족함을 가지고 사람에게 나가지 말고 하나님께 나가야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창세기를 보면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선택하신 백성들은 모두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택하심을 받은 백성은 장자가 아니라 차자입니다. 이삭도 장자가 아닙니다. 야곱도 장자가 아니라 차자입니다. 또 여성의 경우에는 모두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사라를 선택하셔서 모든 믿는 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자녀를 낳지 못하는 리브가를 선택하셔서 야곱을 낳게 하셨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라엘도 하나님께서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항상 인간적인 부족함을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말못).
그러면 왜 택하신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고 항상 부족함을 주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있는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천국을 직접 보고 오고, 또 모든 계시의 비밀을 알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부족함이 은혜의 통로가 되고 능력의 통로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족함이 무조건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가 되고 일하심의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함이 있을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습니다. 부족함을 가지고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또 합환채라고 하는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1절부터 14절까지 라헬의 모습입니다. 1-14절까지 라헬의 경쟁의 대상은 레아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으면서 내가 레아와의 경쟁하여 싸워서 이겼다는 뜻에서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울의 부족함을 가지고 사람에게 나가면 서로 사람과 서로 경쟁합니다. 그리고 싸웁니다. 이겼으면 이겼다고 하고 졌으면 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두 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싸움은 다른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싸움은 내 안에 내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싸움은 내가 인간적 것들을 의지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족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부족함을 가지고 사람에게 나가지 마시고 하나님께 나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한나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고통이 있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상1장 10절에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상 1장15절에서 “삼상1:15.-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하나님께)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택하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왜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는 고통들을 주십니까? 사탄은 욥의 아내처럼 우리에게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 고통을 가지고 낙심하고 절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사람에게 통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苦痛)이 괴로울 고(苦)에 아플 통(痛)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과 통하는 높을 고(高)에 통할 통(通)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고, 능력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둘째,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라헬은 언니가 네 아들을 낳는 것을 보고 시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을 때 언니와 경쟁하여 이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볼 때 어떻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가운데서 이런 시기와 질투와 경쟁과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인간이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심에 의해서 일을 한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태어나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빌1장에서도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어도 복을 전하는 것을 보면서 더 용기를 내어서 겁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빌 1장 14절에 “빌1:14.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감옥에)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빌1장 15절에 “빌1:15. 어떤 이들은 투기(시기)와 분쟁(경쟁심)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 즉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바울이 감옥에 갇혔느니까 더 이상 복음을 더 많이 전하지 못하겠지 라고 하면서 바울과 경쟁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착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빌1: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빌1:17. 그들은 나의 (감옥에서)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빌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어리석은 모습으로 일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행복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출생은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12지파에 대해서 신명기에 보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 33장29절에 ”신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신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벧전 2장 9절에서는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신33: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33:3. 여호와께서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왜 우리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우리가 비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부족하여 연약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수중-즉 하나님의 손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사탄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손안에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셔서 예수님의 손안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자도 예수님의 손안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행복한 사람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33:3.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우리가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보다 행복한 이유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발아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가정을 심방하니까 눈이 침침하신대 시편 119편을 읽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장로님의 가정을 심방하니까 신약성경을 요약해서 그것을 달도록 보고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가 행복한 사람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33:12. 베냐민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살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마치도록 보호하시고 그를 자기 어깨 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
베냐민은 라헬이 요셉을 출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은 죽으면서 베냐민이 어떻게 될지 얼마나 걱정하면서 죽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베냐민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은 하나님 곁에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이 마치기까지 보호하시며, 하나님의 어깨사이에 있게 하시리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베냐민과 같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를 돌보고 보호할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을 어떻게 보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어깨사인 당신의 품에 우리를 안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어깨사이인 하나님의 등에 업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입니다. 또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앉기면 그 어떤 걱정도 없습니다. 또 등에 업히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품에 앉으시고, 하나님의 등 뒤에 우리를 엎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머니와 같이 품에 안아주십니까? 이사야 46장 3절과 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사46:3.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여러분 왜 광야와 같은 우리 인생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아주시고, 업어주십니까?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를 어머니와 같이 하나님의 배에서 낳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까지 안아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46:4.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안아주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낳았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육신의 어머니는 우리가 어릴 때만 품에 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백발이 될 때가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영원한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배에서 나온 내 사랑하는 자식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며, 내가 너를 항상 내 품에 안아줄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사 우리를 세상의 모든 위협에서 우리를 보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상한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또 상한 영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모든 상한 영혼을 다 품어주시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님의 넓으신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품에 있는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까지의 생활이 광야의 생활이었습니까? 그러면 그 광야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에 우리를 앉으시고, 또 당신의 등에 업으셔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여리고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등 뒤에 업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으사 요단을 건너가게 하시고, 여리고성을 물리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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