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너머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인생에 있어서 도무지 인간적으로는 넘지 못할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하나님의 은혜로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큰 산이 내 앞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그렇습니다. 야곱은 외삼촌라반이라는 그가 넘을 수 없는 산이 있었습니다. 창31장 23절에 보면 그는 도망가는 야곱을 7일을 쫓아와서 그를 붙잡으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선악 간에 그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창31:24). 그래서 외삼촌라반은 미스바에서 야곱과 언약을 맺습니다(창31:44). 이후 이 미스바는 장차 이스라엘백성들이 위기 때마다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더 큰 산이 있습니다. 바로 에서입니다. 외삼촌라반은 야곱의 품삯은 빼앗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야곱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가면 형 에서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여기서 보시면 야곱이 길을 간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그의 길이라고 합니다. 누구의 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때 누가 야곱을 찾아옵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야곱을 만납니다.
그래서 야곱이 어떻게 말합니까?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하나임이란 두 무리의 군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야곱의 길을 인도하고 뒤에서 야곱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을 찾아와서 그를 만나주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길을 가는 야곱에게 왜 하나님의 군대가 나타났겠습니까?
그 이유는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야곱을 죽이러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군대를 미리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군대를 미리 보내주셔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맞춤형으로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과 같이 한 개인이 우리를 헤치려하면 그에게 찾아가셔서 막아주십니다. 그런데 에서와 같이 군대가 우리를 헤치려하면 하나님께서는 두 군대를 우리 앞뒤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켜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할일이 무엇입니까? 나의 길을 걸어가지 마시고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군대가 우리를 위협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군대가 여러분들을 보호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현실가운데 그 어떤 문제도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가 에서의 군대를 물리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니까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고 합니다. 이 400명이 야곱을 환영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는 사냥꾼입니다. 사냥꾼은 절대 사냥감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죽이기 위해서 오고 있습니다.
이때 야곱의 심정이 어떠합니까? 7절입니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을 두 떼로 나눕니다. 그래서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도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9절-11절에 보면 야곱이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이 이렇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현실을 보니까 여전히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보냅니다(13).
이렇게 야곱이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보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0절 하반을 보시기 바랍니다.
20.ᆢ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이렇게 예물을 에서에게 주면 에서의 마음이 풀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야곱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21절에 “21.(에서에게 보내는)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라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제 야곱을 홀로 남습니다. 이때 야곱이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합니다. 여기서 씨름하다고 하는 것은 격렬하게 먼지가 나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처음에는 이 사람이 누구인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왜 이렇게 싸웁니까?
그 이유는 이것이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어느 누구에게도 싸워서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싸워서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형과의 장자권의 싸움에서도 무조건 이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팥죽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도 빼앗았습니다. 또 축복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라반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많은 재산을 빼앗아 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지금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그 앞에 있으면 그 사람과 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진짜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졌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 야곱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이기려고 하는 야곱에게 져 주신 것입니다.
무조건 싸움에서 이기려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형과 싸웁니다. 이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한번 씨름을 해 볼래 그러니까 아이가 씨름을 해보자고 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버지는 힘으로 얼마든지 이 아이를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져 줍니다. 이때 아이는 이겼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힘을 느껴 본 아이는 아버지가 져 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 야곱과 같습니다. 야곱은 이 사람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그가 만났던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고 합니다.
이 사람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때 그 사람이 어떻게 말합니까?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잘 몰랐기 때문에 야곱의 이름을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은 야곱이 그의 이름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란 “발꿈치를 잡는 자. 속이는 자, 빼앗는 자” 그래서 “무조건 이기려는 자라”는 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평생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경재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누구이든, 어떻게 해서라도 싸워서 이겨보려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평소대로 그 누구라도 만나면 싸우고 무조건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도 야곱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장 많이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조차도 싸워서 이겨야 하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봐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기지 못하신 것은 진짜 야곱을 이기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져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무조건 이기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얍복강에서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조차도 이기려고 하는 야곱에게 져 주실 정도로 낮아지신 하나님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은 그동안 야곱이 살아왔던 삶을 상기시켜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나라의 백성과는 상관없이 그의 이름대로 무조건 이기려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적인 이름이 됩니다. 우리도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정말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 인간이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모든 인간을 이기려고 하고, 심지어 하나님조도 이기려고 하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져주셨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나라와는 다른 하나님나라백성의 삶입니다.
//세상나라는 무조건 이기려고 하는 야곱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내가 이길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인해서 져 주는 삶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다스리고 지배하는 하나님나라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이기려고 하는 세상가운데서 져 주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형 에서를 이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형 에서를 이기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형 에서의 분노를 쌓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야곱의 모습을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보면 야곱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무조건 이 세상에서 이기려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도 야곱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도 이루고, 또 사회에서도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또 많은 물질적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공한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분노를 쌓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이제 우리가 어떤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모습을 이 세상에 보여주어야겠습니까?
이제 야곱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이란 져 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해리 킴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에게, 자식에게, 성도에게 이기려 드는 것이 자신의 야욕인지, 영력인지를 세심히 살펴야 한다. 우아하게 지는 게 사역이다. 멋지게 당해주고, 거절당하고, 잊혀지고, 배신당하고, 배척당하는게 사역자의 평범한 일상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말없이 그냥 푸욱 곰삭아져야한다. 그때야 비로소 제대로 된 종이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지기 위한 무기가 필요하다. 설교도, 신학도, 영적 지식도, 성경공부도 다 전하는 자가 지기 위한 무기여야한다”
//우리 가정에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서로 이기려는 삶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이겼다고 해서 그것이 참으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져 주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도 누가 누구를 이겼다고 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져 주는 것이 이기는 삶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야곱의 삶에서 이스라엘의 삶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서로 이기려는 삶에서 져주는 삶이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진짜로 이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 힘줄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야곱은 그가 의지했던 인간적인 힘의 근원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면 모두 이런 과정을 겪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항상 우리의 힘과 지혜를 의지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에 우리의 삶 가운데서 직접 나타나셔서 우리의 힘의 근원을 치십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주 건강했습니다. 그래서 내 힘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큰 병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으로 내 환도 뼈를 치십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물질로 내 환도 뼈를 치십니다. 그래서 물질의 힘을 의지하는 야곱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삶을 살게 된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낸 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내 삶의 환도 뼈를 치시는 것을 경험하신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계속 성공하다가 하나님께서 실패를 주셨습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환도 뼈를 치시는 것을 경험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인간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까지도 내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를 아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계속해서 끊임없이 한 순간도 아니 하시고 우리의 환도 뼈를 치시고 계십니다.
//이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의 환도 뼈를 치시면 그것 때문에 낙심하여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환도 뼈 힘줄을 치시면 그것 때문에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는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치신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이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기도하였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에서의 마음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람들과 씨름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신과도 씨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사람과 씨름하는 자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시면 이 모든 문제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야곱은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는 야곱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혀 죽어야합니다. 그러면 야곱의 삶에서 이스라엘의 삶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한 방 얻어 맡아서 평생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절름발이가 되고, 불구가 되었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브니엘에 태양이 떠올랐습니다(창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여기서 태양에 돋았다는 말은 실제 태양에 돋았다는 말도 되지만 그의 삶의 희망의 태양이 돋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에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자신을 못박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삶 가운데서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창33장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3:3. 자기는 그들(가족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은 형 에서에게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힙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에게 졌습니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한 수 배운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창33장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창33장4절 “창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어떻게 할 때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할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해가 돋을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이기려고 하는 세상에 속한 나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합니다. 무조건 이기려는 이 세상가운데 져 주어야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그럴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희망의 해가 떠오르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진정으로 이기는 삶을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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