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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빌립보서

빌립보서강해(16)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빌3:10-11)

by 금빛돌 2021. 10. 23.

사도바울은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자랑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먼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고상하다는 것은 가장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에게서 발견되기 위해서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발견되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10절 상반 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내가 그리스도(1)그 부활의 권능(2)그 고난에 참여함(3)을 알고자 하여-

여기서도 사도바울은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3가지를 알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여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8절에서 사도바울은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이 다 해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더 알고자 하여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여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깁니까? 2장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다 버리셨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단순히 머리로 알 수 있습니까? 지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안다는 동사는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신 예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도 우리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버릴 때 비로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은 사도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더 알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다 비우고 버릴 것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여러분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 아니라 내가 예수님 때문에 버리고 비운 것이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사도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고자 하여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해여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사도바울이 알고자 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의 고난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다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제일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습니까? 또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기 조금이라도 삶을 통하여 알기 위해서 내가 자랑하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을 자신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나가기를 바라지만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나갔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의 고난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목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또 이제 사도바울은 무엇을 알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10절 중반 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10. 내가 그리스도(1)그 부활의 권능(2)그 고난에 참여함(3)을 알고자 하여-

사도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아내조차도 잃어버렸다고 하기도 합니다. 부르스라는 신학자는 빌 3장에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어버렸던 것 중에 하나가 아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대교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내에게서 조차도 버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만이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목숨조차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2장 17절에서 사도바울은 내가 전제의 기름과 같이 부음이 되어 완전히 내 생명이 없어질지라도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왜 사도바울이 자신의 생명조차도 다 배설물로 여기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같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모든 생명조차도 다 잃어버리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죽어도 나를 살려주시는 그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빌2장에서 부활을 높여주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부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래서 부활은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부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에서도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받아서 끝까지 낮아지고 낮아지는 삶을 살 때 현재에 우리를 높여주시는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전체를 보시기 바랍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밑 줄 친 부분만을 읽으면 내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라고 합니다.

말씀을 드린 것처럼 여기서 부활은 우리가 죽어서 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 부활이란 죽기까지 낮아진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쉬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3:10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부활의 권능(능력)을 체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낮아지며 죽으려 합니다. 11 그래서 나도 예수님과 같이 (낮아져) 십자가를 짐으로 부활(높여줌)의 기쁨을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죽으면 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면 높여 주시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비우면 채우리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낮추면 사람들이 나를 더 깔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면 사람들이 나를 더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낮아지라 해도 낮아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죽여라 해도 죽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죽어서 부활도 되지만 낮아진 자를 현재에도 높여주시는 부활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부활을 믿습니까? 또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더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죽어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부활의 권능으로 높여주시고, 살려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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