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보기 전에 사도바울이 왜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빌2장은 빌 1장 27절에 있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빌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너희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빌립보교회가 열심히 있는 교회였지만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음의 신앙이란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사도바울이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하나가 되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습니까? 2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2:1 그러므로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 말씀은 빌립보교인들이 무슨 권면이라 사랑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래서 2절에 “빌2:2. 마음을 같이하여한 마음과 한뜻이 되지 못했습니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 마음과 한 뜻이 될 수 있습니까? 3절입니다.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교만)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기 위하여 교만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5절입니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그것이 6-8절의 말씀입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본 받아야할 예수님의 마음을 철저히 자신을 비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종의 형체 종의 모습을 가지는 마음입니다.
또 자기를 낮추시는 마음입니다.
어디까지 자기를 낮추시는 마음입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실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것이 9-12절에 나옵니다. 먼저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 이러므로(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겸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였습니다. 여기서 높여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켜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낮아지신 예수님에게 어떤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까?
10절과 11절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주라고 하는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라고 하는 것은 당시 황제에게 칭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라고 하는 것은 사실 황제보다 더 뛰어난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늘의 영적인 세계만의 주가 아니라 이 온 세상의 주가 되십니다.
믿는 자들의 주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왕보다 더 위에 계신 주가 되십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여기서 지극히 높여주심이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 앉으심, 주가 되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부활이 높여주심의 대표적인 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는 부활을 낮아지심에 대한 높여주심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3장 10절과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높여주심)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 즉 높여주심의 권능을 알고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활 즉 높여주심의 권능을 알 수 있습니까?
빌3:10하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높여주심)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알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가에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현재에 내가 십자가를 본받아서 죽기까지 낮아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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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 왜 우리가 낮아지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가 겸손해지지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내가 낮아지면 사람들이 나를 깔보면 어떻게 하나를 생각합니다.
또 내가 죽으면 손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정말 죽기까지 낮아지면 허망한 죽음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무엇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장차 나를 부활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또 내가 죽기까지 낮아지더라도 하나님께서 현재에 나를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더 낮아지시고 더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반드시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왜 이 말씀을 드렸는가 하면 오늘 본문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인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의 모범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의 첫 번째 모범은 예수님입니다.
또 겸손한 마음의 두 번째 모범은 사도바울 자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앞을 보시기 바랍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여기서 보시면 사도바울은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전제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제사입니다. 제물 위에 포도주나 기름을 부으면 어떻게 됩니까? 날라 가서 없어집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을 자신이 너희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전제의 기름과 같이 부어져서 완전히 없어진다 할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은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전제의 기름처럼 부어져서 완전히 죽어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활시켜주실 줄 믿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또 지금 내가 나를 전제의 기름처럼 부어져서 완전히 죽어서 없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도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자신을 겸손의 모범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는 겸손한 마음의 세 번째 모범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먼저 디모데를 보시기 바랍니다.
빌2장 4절에서 사도바울은 겸손이란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겸손한 마음이란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로 디모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1절에 보시면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합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 일만 구합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자기 일만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디모데는 어떻게 자신의 일만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겸손한 사람입니까?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먼저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빌립교인들에게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감옥에 있는 바울의 사정을 빌립보교인들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을 걱정하는 빌립보교인들을 위로하기 위함입니다. 또 디모데를 보내어 빌립보교인들의 사정을 앎으로 사도바울도 마음에 위로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과 빌립보교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통해서 서로의 사정을 잘 알려줌으로 서로 위로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사정을 빌립보교인들에게 알려주고, 또 빌립보교인들의 사정을 바울에게 알려주는데,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20절입니다.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과 뜻을 같이 하여 빌립보교인들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할 자가 디모데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냅니다.
또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만을 구하지만 디모데만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는 일을 구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데모데가 어떻게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는 일을 구하는 자였습니까?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고난가운데서 연단을 받은 자로서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과 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는 일에 수고를 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23과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바울은 감옥에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먼저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나와서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먼저 보내고 난 다음에 자신도 감옥에서 나와서 빌립보교인들에게 속히 가게 될 것을 어디 안에서 확신한다고 합니까?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주가 되게 하셨다고 했을 때 주입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것은 원래 황제에게 붙이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은 누구를 황제보다 더 높이 있는 주님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황제보다 더 높이 있는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록 바울은 “내가 감옥에 있을지라도 내가 믿는 예수님은 황제보다 위에 있는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님이시다. 그래서 내가 비록 감옥에 있지만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감옥에서 풀어서 너희에게로 가게 할 줄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 어떤 감옥과 같은 곳에 있어도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서 반드시 풀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다음에는 에바브도디도를 겸손의 모범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사역자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교인들의 선교헌금을 전달 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빌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바울에게 온 에바브로디도는 사도바울 옆에서 헌신적으로 바울과 함께 동역했습니다. 그래서 25절에 보면 “25. -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무 헌신적으로 수고하다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이렇게 죽을병에 걸렸어도 빌립보교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드로디도는 죽을병에 걸렸지만 그런 가운데서 빌립보교인들이 보고 싶어서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바울도 그랬습니다. “빌1:8. 내가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또 자신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교인들이 근심할 줄로 생각하여 심히 근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누구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세상에 있을 제자들을 더 자신보다 걱정하시고 근심하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에바브도디도도 예수님과 같이 죽기까지 헌신하고 희생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7절입니다.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살려주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근심을 면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28절에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에바드로디도가 헌신하다가 병에 걸렸습니다. 이것을 빌립보교인들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또 빌립보교인들이 근심하는 것을 보면서 에바브도디도 근심하였습니다. 또 빌립보교인들이 근심하는 것을 보면서 바울도 근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에서 나은 에바브도디도를 급히 보냄으로 빌립보교인들의 근심을 덜어주고, 또 그로 인해서 바울의 근심도 덜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란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교인들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근심해 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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