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아주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논리적인 사람은 항상 말을 할 때 문맥을 따라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볼 때 항상 문맥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빌 1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고 하였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빌1:27하-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런데 빌2장에 보면 빌립보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가 되지 못하는가 하면 그들에게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품어라 고 합니다. 겸손한 마음의 모범으로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서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빌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여기서 대적하는 자는 유대 율법주의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빌 3장에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은 전혀 문맥에는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빌 3장 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빌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고 합니다.
여기서 끝으로란 결론적으로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바울은 아직 결론적인 이야기를 할 단계가 아닙니다. 빌립보서의 결론은 빌 4장에 있는 것처럼 너희들이 준 선교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갑자가 문맥과는 관계없이 결론적인 이야기를 싶어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논리적인 사람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은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문맥과는 관계없이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이야기를 왜 반복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롭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수고로움이 없다는 말은 나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을 하면 할수록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은 사도바울 자신에게도 힘이 되고 좋은 말씀이기에 자꾸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이 너희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기 쉽습니까? 우리가 주안에서 항상 기뻐 할 때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잃어버릴 때 죄를 짓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언제 마귀가 틈타가 쉽습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잃어버릴 때 마귀가 틈이 타기가 쉽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사도바울 자신에게도 수고롭지 않고, 빌립보교인들에게는 안전하기 때문에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우리에도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입니다.
사도베드로가 말하였던 것처럼 “벧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분이나 감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행동할 때 대부분 무엇을 따라서 행동합니까? 이성입니까? 감정입니까? 특히 한국 사람이 경우에 이성에 따라 행동하기 보다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분과 감정이 하나님말씀의 통제를 받아야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에 대해서 너무나 친절하게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우리의 이성적 사고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도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우리가 분내는 것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4장26절에 보면 무턱대고 우리가 분을 내지 말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엡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내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 고 합니다. 또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을 잘 처리하지 않고, 매일 매일 그것을 가지고 살면 마귀가 틈 탈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은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분의 감정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또 분을 내더라도 성급하게 분을 내지 말라고 합니다. 야1장19-20절에 보면 “약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
-분을 내더라도 천천히 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성급하게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의분도 조심해야합니다. 보통 우리가 분을 낼 때는 분명 의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바른 동기로 분을 내었는데, 분을 급하게 내다보면 내 감정이 격해져서 말하는 가운데 내가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8절에 보면 “시37:8.(의)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하고 합니다.
--또 성경은 분을 낼 때 말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잠언15장1절에 “잠15:1.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기분 좋을 때만 아닙니다. 분이 격해질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잠16장32절 “잠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그래서 여러분 신앙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 기분과 감정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신앙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우리가 무조건 분을 더디 내라 참으라 자제하라고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한 감정을 반드시 풀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그 어떤 상한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개역성경 로마서 12장 8절에 보면 “롬12:8. 권위 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위란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감정이 상해 있을 때-우리가 아무에게나 말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또 그것을 자신 안에 두고 처리하지 않고--- 마음의 상처가 되게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상해있을 때—상한 감정을 풀어줄 수 있는 권위자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는 우리의 격한 감정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성경은 어떻게 말합니까? 삼상1장10절에 보면 “삼상1:10. 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고 합니다. 또 삼상 1장 15절에 보면 “삼상1: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라고 합니다. 통했다라는 말은 “솥아 부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상한 감정을 하나님께 솥아부으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상한 감정을 솥아부을 수 있습니까?
시34편 6절에 보면 “시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상한 마음을 절대 외면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이 상하여 부르짖으면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환난에서 건지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상한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또 내게 상한 감정이 있더라도-오늘 말씀대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감정이 기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이 되어서 기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 어떤 감정이나 기분이나, 기뻐할 수 있는 조건이나 상황이 되지 않아도---------우리는 주안에서—항상 기뻐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주님을 만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만 내 아버지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루 종일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감정이 좋지 않아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밤새도록 십자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마음속에 모든 어두운 그림자 답답한 그림자가 사라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또 그 주님께서 이제 부활하셔서 사탄을 이기시기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그 주님이 살아 계서서 성령으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사람과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의 함께 계십니다. 우리 속에 세상을 이기신 부활의 성령이 계시니 우리는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시고 승리하셔서 이 온 우주와 만물의 주님이 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신 이 사실을 믿으시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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