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16절에서 거짓사도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16 하여간 어떤 이(거짓사도들의) 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사례금을 받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예루살렘의 구제헌금을) 취하였다 하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의 거짓사도들은 예루살렘에 주는 구제헌금을 바울과 디도의 일행이 몰려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17절과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디도의 일행으)로 너희의 이득(예루살렘의 구제헌금)을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굳이 자기 변명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사도바울이 굳이 자신의 결백함을 말로 할 필요가 있었느냐?”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고후 12장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거짓사도들의 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이 단순히 사도바울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자기 변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거짓사도이고, 또 뒤에서 돈을 가져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참된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단순히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여태까지 여러 가지 말들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린도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자기변호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는 이렇게 거짓 사도들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자기변호만을 했는데, 이제 그 20절부터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단호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14절에 보면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에 있는 대로 처음 복음을 전하려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듣고 슬픔의 방문을 했습니다. 이때 고린도교인들은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눈물을 편지를 쓰고 난 다음에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린도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세 번째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갔을 때 그가 보기를 원했던 것은 어떤 것입니까?
고린도교인들의 고린도 전, 후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전히 회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 번째 방문했을 때 염려하는 것은 그들이 사도바울의 말을 듣고 완전히 회개하지 않고, 예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이 예전의 어떤 모습을 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20절 중반 절부터 있습니다.
“20중. 또 (내가 다시 갈 때)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 문제를 다룰 때 제일 먼저 다루었던 문제가 무엇입니까? 나는 바울파다 베드로파 게바파다 그리스도파 라고 하면서 서로 당을 지어 하나가 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잠시 회개를 했는데, 세 번째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여전히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21절 하반 절에 “21하.--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4장까지 파당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고, 또 5장에서는 음행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음행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는데, 여전히 그런 죄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파당과 음행의 문제를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제 그들에 대해서 사도로서 분명한 권징을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후 13장 1절과 2절의 말씀입니다.
먼저 고후 13장 1절의 말씀입니다.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마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여기서 보면 예수님은 권징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만일 어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그 사람과만 상대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그 사람과 상대하지 않고, 그 사람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아니면 공적으로 말하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에 위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권징을 하는 제일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 사람의 죄를 들추어서 그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잘못을 모를 수 있습니다. 이때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서 그 사람의 잘못을 말해주고,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고 용서를 구한다면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해 주어야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한 것에 대해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공적으로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위배가 되는 것입니다.
또 권징에 관한 두 번째 원칙은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내세우라는 것입니다.
왜 두 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합니까? 만일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하면 객관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두 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두 사람과 세 사람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죄에 대한 지적에 객관성이 있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파당과 음행의 죄에 대해서 단순히 사도바울이 개인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들의 증언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명백한 죄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증인을 내세워서 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객관적으로 분명히 밝혀진 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권면을 해도 회개하지 않고, 또 증인을 내세워도 회개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징의 세 번째 원리로서, 예수님은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13장2절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서 파당과 음행의 죄를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들에게 찾아갔을 때 눈물로 회개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세 번째 갔을 때도 여전히 회개하고 있지 않으면 이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교회의 참된 표지로서 첫째 바른 말씀의 선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이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고,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참 교회인가 거짓교회 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 교회가 성경대로 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느냐에 있습니다. 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주의적으로 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구약성경을 우리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으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른 말씀의 선포는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린 복음만을 전해야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성경에 나타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바른 복음만을 바르게 전파하는 참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칼빈은 교회의 참된 표지로서 바른 성례전의 집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른 권징의 집행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나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침투해 들어오기 쉬한 죄는 음행과 이단의 죄입니다.
어떤 선교단체에서는 이단도 사랑해야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이 많든 사도요한도 어떻게 말합니까? “요이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이단의 교훈을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죄에 대하여는 분명히 분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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