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자기 자랑이 어리석은 줄 알고도 왜 어리석게도 자기 자랑을 합니까?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거짓사도들이 너무나 많이 자기 자랑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6.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내 자랑을 하더라도)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17.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거짓사도)와 같이 기탄 없이 자랑하노라 18.여러 사람(거짓사도들)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그러면 거짓사도들이 자기 자랑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사도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높이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또 자기를 스스로 높임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고 하면서 고린도교인들을 지배하고 착취했습니다.
“19.너희(고린도교인들)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거짓사도)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20.누가(거짓사도들이) 너희(고린도교인들)를(을)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교인들은 누구보다 더 지혜가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고린도교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인 사도바울은 용납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고린도교인들의 빰을 치는 거짓사도들은 잘 용납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 고린도교인들이 참사도인 사도바울을 따라가지 않고, 거짓사도들을 따라갔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외모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7절에 사도바울은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 합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얼굴이나 신체의 생김새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외모라고 하는 것을 쉽게 말씀을 드리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사도들은 눈에 보이는 많은 영광만을 받았습니다. 또 거짓사도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특별한 은사나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짓사도들이 자랑했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영광을 받았는가를 자랑했습니다.
또 자신들이 눈에 보이는 특별한 은사나 능력이나 기적이 나타나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거짓사도들의 어리석은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거짓사도들의 자랑과 반대의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것을 자랑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거짓사도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표적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게 보이는 자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어리석게 보이는 자랑을 하는 사도바울을 내가 보낸 참 사도라 인정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무엇을 분별해야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되느냐, 못 되느냐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는 무엇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잘 분별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광복 70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 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 이 시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가 거짓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잘 사는 것보다 옳은 것인가 거짓이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겉으로 드러난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에게 복만 주시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집요하게 무엇이 옳고 그르냐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잘해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 틀리면 언젠가는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기에 못해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 바르면 하나님께 언젠가는 흥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대도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분별해야할 시기에 왔습니다.
지난 오후예배시간에 보았든 고린도교회는 참 사도를 따르지 않고 거짓 사도를 따라갔습니다. 거짓사도들은 죄를 지어도 무조건 복만을 준다고 하는 다른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참된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을 따라갔고, 또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기복주의적인 다른 복음을 따라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 참 사역자를 따르지 않으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자랑을 통해서 누가 참 사역자인지 거짓사역자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된 예수님, 참된 성령하나님, 그리고 참된 십자가의 복음만을 따라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된 사역자와 거짓된 사역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그들이 무엇을 자랑하느냐에 있습니다.
1)먼저 참 사도인 사도바울은 영광 받음이 아니라 고난 받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그들이(거짓사도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23.그들이(거짓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23하.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합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많은 영광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고, 또 참된 사역자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의 거짓 사도들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영광을 받았는가를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받았던 영광을 근거하고 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영광 받음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하는 거짓사도들에 대해서 “그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하느냐 그들은 지금 정신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들이 미친 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 증거가 무엇입니까? 혹 내가 영광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말대로 하다면 지금 우리는 정신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광의 목록이 아니라 고난의 목록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고 내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당했던 고난이 있습니까? 불이익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는 조금이라도 내게 어려운 고난이 있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벌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은 증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내가 고난 받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고난을 절대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그 모든 고난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신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의 증거로 고난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 모든 고난 중에서 제일 큰 고난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교회 안에 있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이 모든 외적인 고난은 고사하고도 아직 날마다 내 속에 더 큰 고난이 있으니 교회의 연약한 지체를 위하여 염려함으로 받는 고난이다. 이 교회에서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하지 아니하냐 누가 실족하면 나도 내 속에 불이 탈 정도로 애타지 아니하겠느냐” 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교회의 연약한 성도들을 염려함으로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0절에서 “30.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연약한 성도들 때문에 염려함으로 약하게 된 것)을 자랑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연약한 성도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약하게 된 것을 자랑 한다”고 합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인간적인 염려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우리가 볼 때 절대 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연약한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누구 때문에 연약해져있습니까? 누구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할 정도로 애타고 있습니까? 고린도교인들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관의 짐을 지지 않고서는 교회에 대해서 진정한 관심을 가질 수 없다. 사실 교회를 통치하는 것(섬기는 것은) 우리가 즐겁고 기쁘게 수행할 수 있는 유쾌한 업무가 아니다. 그것은 사단이 할 수 있는 한 많은 고통을 거듭거듭 우리에게 불러일으키고 하나의 돌멩이도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 뒤집어놓음으로써 우리를 괴롭히는 힘겹고 비통한 전투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또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교회의 연약한 성도)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사도바울과 같이 그리스도 때문에, 또 교회의 연약한 성도들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자랑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받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참된 사도인 사도바울은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인한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2장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2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보았던 환상과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삼층천에 올라가서 천국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내가 본 천국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보고 왔다고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바울이 왜 그가 삼층천에서 낙원을 보고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가 천국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거짓사도들이 “특별한 환상을 보았다. 계시를 받았다. 성령의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특별한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자랑하는 것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빌립보서에도 바울이 할례를 받은 것을 자랑하는 거짓선생들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자신도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거기서도 사도바울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이유는 할례를 받은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 그것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천국을 보고 온 것에 대해서 말하면서 삼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안 에서 한 사람”이라고 하고 또 “이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놀라운 환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이 참 사도의 증거이고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의 증거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가 환상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천국을 본 것을 자랑한다면 결국 그것을 통해서 사도바울 자신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도바울이 천국을 본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특별한 사람이구나, 사도바울은 참으로 능력이 있는 강한 사람이구나” 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가 천국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약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고후12장 5절에 “--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누구를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능력이 있는 사역자라고 말합니까?
특별한 환상을 보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을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고 능력 있는 사역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환상이나 계시를 받아서 더 강한 사람이 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사도인 사도바울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참된 사역자의 증거는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기적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참된 사역자의 증거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표적과 능력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칼빈은 육체의 가시를 가축을 모는 채찍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하나님 채찍으로 치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몰아가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게 육체의 가시가 있어도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충분하다. 네게 육체의 가시가 있느냐? 그러면 나의 사랑의 품으로 나아오라, 너에게 있는 나의 충분한 사랑으로 너는 얼마든지 그 가시를 이겨낼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의 강함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인간의 약함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후12:9하.--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환상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고) 나의 여러 (육체의 가시들로 인한)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 때문이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설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못생긴 외모, 그리고 눈의 안질과 같은 육체의 질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전체 문맥을 보면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을 대적하는 거짓사도로 볼 수 있습니다. 또 고후12장을 보면 바울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도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바울에게 있어서 이런 육체의 가시가 없었다면 바울은 더 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되었고 고린도교인들에게 더 인정을 받는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로 더 약함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사도바울의 약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런 바울의 약점이 강점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눈에 보이는 큰 표적과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강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의 증거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의 증거가 강함이 아니라 약함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종들이 다 이런 약함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김창인 목사님과 옥한흠목사님은 젊었을 때 페병을 앓았던 분이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고 또 평생 통풍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격었고, 발작이 일어날 때마다 지옥에 갔다 오는 고통을 격었습니다. 또 우울증을 앓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과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살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칼빈은 다 아시디시피 25가지의 병을 가지고 살면서 걸어다는 병원이라고 불려졌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제일 좋아했던 프란시스 쉐이퍼는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기장 측에서 제일 큰 교회를 이루었던 별세신앙을 부르짖었던 이중표 목사님은 평생 암과 투병하시다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아는 고신 총회장을 하셨던 어떤 목사님도 큰 아들이 큰 병을 가지고 있어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격고 계셨습니다. 또 ivf간사 출신의 어떤 목사님은 사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꼼짝도 못한 상태에 있어서 평생 그 사모님을 돌보면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는 얼마 전에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렇게 훌륭하신 박윤선 목사님의 가정에도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온전하게 쓰임을 받았던 모든 사역자들에게 육체의 가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게 있는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하는 것은 내게 하나님의 능력을 제거하여 달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능하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약해도 세상에서는 강한 척해야 살아남습니다. 더욱이 우리 개인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강대국들 속에서 약한 민족으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하는 것이 아직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도 강한 자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조금이라도 약하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나의 약점을 외식으로 숨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의 약함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약함을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약함을 절망과 좌절로 이끌지 말고, 너의 약함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육체의 가시들이 있습니까? 육체의 가시들로 인해 약한 것들이 내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시들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게 가시들로 인해서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가시들로 인해서 한 순간도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육체의 가시들을 그리스도 십자가 앞으로 앞에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약함을 능력의 하나님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흐르는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참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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