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는 계속해서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하고 있습니다. 7장까지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비방하는 자들에 대해서 변호를 하다가 8장과 9장에서 예루살렘교회에 하기로 했던 구제헌금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10장부터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7장까지는 조금 부드럽게 변호를 하는데, 이제 10장부터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하는 거짓사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거짓사도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10장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후10: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여기서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이라는 말은 거짓사도들이 사도바울에 대해서 비난한 내용입니다. 거짓사도들은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 큰 소리를 치는데, 가까이에서 직접 대면하면 큰소리치지 못하는 비겁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성경학자는 똥개에 비유를 했습니다. 저기 겁이 많은 똥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으면 큰 소리를 찢어댑니다. 이와 같이 거짓사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멀리서는 큰 소리로 찢어대지만 가까이가면 깨깽하면서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는 똥개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편지의 글을 읽으면 “너희는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된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분명한 원리다. 그렇게 하다가는 너희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식으로 아주 강력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에 글을 쓰 놓고 나중에 직접 만나면 원칙대로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아주 유순하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거짓선생들은 좋지 않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편지의 글에서는 강력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막상 개인적으로 만나면 아주 부드럽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도 10장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를 멀리 떠나 있으면 편지들에서 담대하게 이야기를 하고, 가까이서 직접 대면하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사실 원래 사도바울은 온유와 관용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과 생각이 맞지 않다고 해서 스데반을 돌려 쳐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그의 삶의 주로 섬기고, 또 하나님의 성령이 그의 심령 속에 있게 되자 이제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와 관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온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온유란 절대 연약하거나 비겁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힘이 있으되 사랑을 인하여 그 힘을 절제할 수 있는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또 분명히 할 말이 있지만 사랑을 인하여 내가 할 말도 절제 할 수 있는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또 관용이 무엇입니까? 관용이란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도 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 인체는 어떤 이물질이 들어오면 문제가 생깁니다. 만일 우리 몸속에 피에 물이 들어가거나 다른 피가 들어가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 인체에 모든 것을 다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위장입니다. 위장에는 모든 것을 다 소화할 수 있는 물질이 있습니다. 그 물질을 가리켜서 톨러런스, 관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다 타협이나 관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후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13.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합니다.
거짓 사도들과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짓사도들에 의해서 잠시 미혹된 고린도교인들에 대해서는 사도바울 온유와 관용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종합하면 사도바울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다 같이 따라하겠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맙시다”.
죄는 미워하고 배척하되 사람은 온유와 관용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거짓사도들이 바울은 어떻게 비난하고 있습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거짓사도들은 바울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원래는 육신을 따라서 사람을 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을 따라서 행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갈라디아서에 “갈5:19. 육체(육신)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육신의 죄악된 본성을 따라서 행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쉽게 분노하고, 남이 조금이라도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파당을 지으면서 내 편이면 무조건 선이고 남의 편이면 무조건 악이라고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구의 죽음을 뜻합니까?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절대 사도바울은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육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따라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왜 거짓사도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거짓사도들이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뭐 눈에는 뭐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사도들이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서 행하는 사도바울도 그들과 같이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로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을 육신에 속한 거짓사도들은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다고 보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이 성경공부모임을 합니다. 그러면 육신에 속한 거짓사도들은 사도바울이 사람들을 자기편을 만들기 위해서 성경공부모임을 한다는 식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바울이 육신을 따라서 행하는 자라고 하는 비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라는 말은 “내가 육신의 몸을 입고 다니고 있으나”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절대 육신의 몸을 입고 다니고 있지만, 절대 육신의 본성대로 행하거나 육신의 본성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4상.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육신을 따라서 행하지 않는 증거로 그가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거짓사도들과 이 세상 사람들은 오직 육신을 따라서 육신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큰 무기로 삼는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외모입니다. 이 외모라는 말속에는 얼굴만 아니라 몸매, 학벌, 또 돈이 많은 것, 높은 지위에 있는 것,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있는 거짓사도들과 그들을 따라가는 고린도교인들조차도 그들의 무기가 다 육신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육신에 속한 고린도교인들에게 어떻게 말합니까?
고후10장7절에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육신의 몸을 입고 있지만 육신을 따라서 행하지 않는 사도바울의 무기는 어떤 것입니까?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외모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서 사도바울이 싸우는 무기는 무엇입니까?
4절에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바울의 무기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고전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왜 십자가가 우리 영적인 싸움의 유일한 무기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되겠습니까?
1)십자가만이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인간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사탄과의 영적싸움이라고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유일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우리의 외부에서 우리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내부에서 매일 낙심을 줍니다. 무기력을 줍니다. 영적인 게으름을 줍니다. 절망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과 밖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2000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사탄의 심장에 칼을 꽂으셔서 이기셨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사탄과 영적인 싸움을 우리 대신 싸워주시고, 마지막 심판 때 사탄의 모든 권세를 완전히 이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여전히 사탄이 우리는 넘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예수님의 피 흘린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고 있으면 그 어떤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들고 있으면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의 권세가 절대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탄 불안 낙심 절망 침체 어두움 결국 멸망
2)십자가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롬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고 합니다.
인간의 그 어떤 의나 철학으로도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십자가만이 우리 자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따라서 사는 자라면 우리의 대적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항상 다른 사람입니다.
육신은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항상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들과 싸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따라서 사는 자가 아니라 반대로 육신을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워야합니다. 내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날마다 싸워야합니다.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자신이 육신의 정욕과 함께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나 자신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 육신에 속한 자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5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교만)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교만한)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굳게 붙들고 날마다 사탄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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