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샘 세상 사람들은 평생 너를 샘으로 보지 않고 자폐증을 가진 아이로 볼 것이다. 그런데 샘 자폐증이라고 하는 것은 꼬리표에 불과해, 너는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아이야. 그리고 비록 그런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해도 네 영혼이 다친 건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우리 영혼의 평안만 유지하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만큼은 잃어버리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우리 영혼의 평안을 잃지 않고 있으면 다시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평안을 네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영혼의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는 영혼의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영혼의 평안, 그것은 먹고 살기에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다. 나는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영혼의 평안이냐” 라고 말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혼의 평안이란 육신적으로 어려운 일이 없는 편안한 가운데 사치와 여가로 즐기는 평안이 아닙니다.
//육신의 극심한 고통과 상처와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누리는 평안이 영혼의 평안입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일제시대 감옥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채찍을 맡으시고 오시면 “하나님이여 일본 사람들 앞에서 그 어떤 육체적인 고통이 있더라도 영혼의 평안만큼은 잃어버리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을 얻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영혼의 평안을 가지고 있으면 그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영혼의 평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영혼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1절입니다.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가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첫째는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말아야합니다.
마음의 교만이란 마음가운데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무언가 가지고 있고 이루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비워야합니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비워야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의 평안을 누릴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비우고, 우리 영혼에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4가지를 적게 해야 합니다.
첫째는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에서는 우리가 말을 많이 할수록 우리의 영성이 약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말이 많으면 영혼에 평안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고 말로서 쏟아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할 때도 우리가 말을 많이 하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도 필요 합니다.
//무엇보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묵상보다는 사람에 대한 묵상이 되기 쉽니다. 그러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말을 내려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에 평안이 있습니다.
둘째는 내 마음의 생각을 적게 해야 합니다.
말을 적게 해도 우리 마음에 생각이 많으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드는 염려의 생각들, 근심의 생각들, 부정적인 생각들을 비워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마음의 교만입니다.
//우리도 진정으로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며,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너무 많이 생각도 하지 마시고, 걱정도 많이 하지 마시고, 염려도 많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서 모든 어리석은 생각들을 다 비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염려의 생각이 들면 그 염려를 기도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과 우리 영혼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셋째는 내 배속에 음식을 적게 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우리 영혼의 평안에 좋지 않습니다. 적당히 먹어야 되고, 또 어떨 때는 금식함으로 우리 영혼을 하나님 앞에서 갈급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적게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약간 배고프게 지내는 것도 영육간의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넷째 일을 적게 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바쁘지 않습니까? 너무 일이 많지 않습니까? 바쁜 것은 좋은데 우리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 너무 바쁘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일에 왜 우리에게 쉬어라하십니까?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가운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함입니다. 또 우리가 쉬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 평안과 안식의 힘으로 한 주간을 힘 있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교만하지 말고, 항상 비워 있어서 우리 영혼에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다윗처럼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말아합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평생 그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할 일을 힘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상 다윗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 왕이 되었을 때도 그 왕의 자리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세 왕 이야기에 보면 압살롬이 반역하여 왕궁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권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질 것도, 보호할 것도 지킬 것도 아니란 말이지요. 나는 성을 떠나겠습니다. 왕권은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 왕국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진정한 왕은 돌아서서 왕실 밖으로, 궁전 밖으로, 그리고 성 밖으로 조용히 걸어나갔습니다. 그는 걷도 또 걸었습니다. 마음이 순결한 모든 사람의 가슴속으로--”.
또 다윗은 넓은 영토와 많은 권세를 누려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만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큰일과 기이한 일들을 그를 위해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위한다는 핑계로 너무 큰 일과 미치지 못 할 기이할 일들을 꿈꿀 때가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로또가 당첨이 되어서 대박이 터지는 꿈을 꿉니다. 그러면서 로또가 당첨이 되면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먼저 사용하겠다는 꿈을 꿉니다.
//또 과거에 강남에 어떤 땅을 내가 사두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항상 미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지날 때마다 헛된 미련가운데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안산땅 5만평?).
//또 세상적인 영광을 버렸다고 하면서 종교적 영광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도 큰 교회목사가 되려고 하고, 또 평신도라면 더 큰 직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가 무엇인자 큰일을 원했을 때는 결코 주시기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심지어 그 큰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비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절대 하나님은 그것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부수시는 일을 먼저 하십니다.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꿈을 통해서 무언가 굉장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을 때--하나님을 철저히 그 꿈을 부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더 이상 꿈이고 큰 일고 생각할 여유가 없게 하신 후 하나님은 그에게 요셉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모세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위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런 꿈을 꾸었던 40년만큼이나 같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해서 그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꿈을 다 부수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스라엘백성들 구출하겠다고 생각하는 꿈도 못 꿀 때 하나님을 그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복을 세상적인 복으로만 생각하고 복만 따라갔습니다. 심지어 그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세상적인 복만 누리려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참된 복의 근원의 삶을 살게 된 것은 그 삶의 복의 중심인 이삭을 포기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며, 통로가 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하려는 일과 되어지는 일을 잘 구별해야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아직 내가 무언가 하려는 일에 집착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아직까지 더 부수어지고 깨어져야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언가 하려는 일이 아니라--하나님의 뜻에 모든 삶을 다 맡겼을 때--되어지는 일을 기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보다 더 놀랍고 크신 일들이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2절 말씀입니다.
1절에 내 마음이 교만치 않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고,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2절 진실로 내가 내 심령(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평안)케 되는 일입니다.
--다윗은 한 평생 무엇을 꿈꾸어 왔다고 합니까? 세상적인 성공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성공도 아닙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 앞에서 평생 심령이 고요하고 내 영혼이 평안케 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무엇이 있고 없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에게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영혼의 평안만큼은 잃어버리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젖뗀 아이와 같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젖뗀 아이처럼 되었습니다.
--젖을 떼지 않는 아이는 젖 때문에 어머니를 찾습니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는 젖이 아니라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어머니를 찾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데 그 주님이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은 아직 젖을 떼지 않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젖 뗀 아이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만 바라보고, 그 주님이 주는 참된 평안과 안식 때문에 주님을 찾을 수 있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누구든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젖뗀 어린 아이는 무엇을 주지 않아도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어린 아이는 그 목소리 안에 사랑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신뢰심 때문에 어린아이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이 신뢰심 때문에 마음껏 놀이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 쉽니다. 어린아이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바로 우리도 이런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삶을 살 때 참된 영혼의 평안과 쉼과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일에 집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또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믿는 삶을 말합니다.
어른들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해 타산적입니다. 그래서 믿다가도 유혹이 있으면 그것에 넘어갑니다. 그런데 어린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를 바라볼 때 뒤돌아보거나 옆 사람을 곁눈질 하느라 눈길을 흩트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강직하고 순수하게 이해타산이 없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게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을 말합니다.
3)어린 아이와 같이 희망과 기대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은 그 앞에 무엇이 있느냐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또 내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희망과 기대감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젖뗀 아이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바랄찌어다”-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고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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