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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죽음에 이르는 죄⑥탐식을 이기는 길(잠언23:2-3)

by 금빛돌 2013. 1. 18.

오늘은 그리스도인들이 경계해야 될 7가지 죄 가운데서 탐식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분노의 죄, 시기와 질투의 죄, 영적인 게으름의 죄, 교만의 죄, 탐심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죄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공감이 합니다. 그런데 음식을 탐하는 탐식이 과연 죄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저도 몇 주 전부터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과연 이 주제를 가지고 설교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해왔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탐식을 죄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네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이거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3. 그의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속이는 음식이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음식을 탐하는 자가 되면 네 목에 칼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죽을 각오를 하고 탐식을 절제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잠언 2320. 술을 즐겨 하는 자들과 고기를 탐하는 자들과도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절대 음식 자체에 대해서 거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재미중에 하나는 음식을 즐기는 일입니다. “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먹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또 음식을 먹음으로 오는 삶의 즐거움과 재미와 활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43절에 보면 “3. (거짓선생들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음식)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음식에 대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먹는 것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지만, 그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가 바로 이 탐식의 죄였습니다.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가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따 먹었습니다. 먹지 말아야할 것을 먹은 것 때문에 이 땅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또 노아도 술에 취해서 자녀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결국 노아의 아들인 함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에서도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백성들도 만나를 먹으면서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고기를 입에 문 상태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다니엘은 바벨론 왕이 제공하는 술과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 하나님께 건강과 지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음식을 먹는 행위는 우리의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음식을 먹는 일에 있어서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탐식의 죄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그레고리우스가 다섯 가지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 음식을 급하게 먹는 속식(速食)을 탐식의 죄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빨리 먹는 것이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음식을 빨리 먹는 편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이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음식을 빨리 먹는 것입니다. 또 이 음식을 준비한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그냥 음식만을 먹고 빨리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시고 음식을 준비하신 분들에게 반드시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빨리 먹고 가시면 그것이 바로 속식의 죄입니다.

두 번째는, 음식을 게글스럽게 먹는 탐식(貪食)을 탐식의 죄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을 때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에 음식을 가득히 넣고, 맛있는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먹는 과식(過食)을 탐식의 죄로 보았습니다. 요즘에 일일 일식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배에서 꼬르르 소리가 날 때를 기다렸다가 밥을 먹으라고 합니다. 배에서 꼬르르 소리가 날 때 몸에서 몸을 치유하는 성분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적게 먹는 것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사자들 옆에서 사슴들이 뛰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동물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계속해서 먹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걸리는 질병들은 대부분 먹지 못해서 생기는 질병이 아니라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기는 질병들입니다.

넷째는 까다롭게 먹는 미식(美食)도 탐식의 죄로 보았습니다. 미식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짜서 못 먹겠다. 이것은 너무 싱거워 못 먹겠다. 이것은 너무 매워서 못 먹겠다고 하면서 음식에 대해서 아주 까다롭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미식가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아주 피곤하게 만듭니다.

다섯째는 음식을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好食)도 탐식의 죄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색상까지도 보암직하고 세련되게 요리된 정찬에, 우아한 식탁의 느낌, 아늑한 분위기 등의 여러 조건을 갖춘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호식가들은 음식자체만 아니라 음식을 먹는 분위기를 매우 중요시합니다. 여자 분들의 경우가 호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앞의 세 가지 유형은 어떻게 먹는가와 관련이 되고, 뒤의 두 유형은 무엇을 먹는가와 관련이 됩니다.

그러면 왜 이런 탐식이 죄가 됩니까? 탐식이 죄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먹는 것이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는데, 왜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금욕주의자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또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또 초대교회도 예배 후 반드시 음식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감사하게 먹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먹음으로 오는 즐거움과 기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즐거움을 오직 음식을 먹는데서만 찾으려는데 있습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십자가의 원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의 원수는 그들의 신을 배-즉 먹는 것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3:19). 그래서 마치 먹는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맛있는 맛 집을 성지순례 하듯이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찰스 벅은 들의 예배당은 부엌이고, 그들의 성직자는 요리사이고, 그들의 제단은 식탁이고, 그들의 신은 곧 그들의 배다고 했습니다. 요즘 TV를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시는 시간에는 어김없이 맛 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옵니다. 요즘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도 오직 어디가면 맛있는 음식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즘 시대는 먹는 것이 우상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먹는 것이 우상이 되다보니까 생기는 기현상이 다이어트 열풍입니다. 음식을 많이 먹다보니 살이 찌게 됩니다. 또 그 살을 빼기위해서 다이어트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건강을 위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합니다. 저도 뱃살이 너무 나와서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살이 찌면 나쁜 것이고 말라야 좋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한편으로는 음식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또 한편으로는 날씬 한 비너스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음식을 먹고 즐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음식을 먹는 것에만 두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 탐식이 죄가 되는 이유입니다.

또 탐식이 죄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둘째는, 육신의 배부름 뒤에 영혼의 메마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원하 교수님은 탐식에 대해서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텅 빈 가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그 텅 빈 가슴을 채우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탐식이 죄가 되는 것은 그 텅 빈 가슴에 하나님을 채워 넣기 보다는 음식만을 채우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번 음식을 먹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배가 고플 때 어느 맛있는 식당에 갑니다. 그리고 내가 이 음식을 먹으면 정말 기분이 좋고 만족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맛있게 음식을 먹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만족입니다. 그런데 배가 차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만족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식을 먹고 나면 내가 이 음식을 먹으나 저 음식을 먹으나 배가 부르면 모두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음식이 우리 영혼의 진정한 만족과 배부름이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의 육신의 배부름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너무 메말라 있고,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임금이 되어 달라는 사람들을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줄 진정한 떡은 이 떡이 아니라 바로 내가 진정한 떡이고 음료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찾으려는 것은 결국 그 영혼이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의 메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탐식의 결과는 온갖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또 영혼의 공허함입니다. 또 그 영혼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음란의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에바그리스우는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탐식의 죄를 이겨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탐식의 죄를 이길 수 있습니까?

첫째는 음식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과 갈급함이 있어야합니다.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그의 영혼이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탐식을 이기는 첫 번째 길은 음식만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영혼의 배고픔이 채워져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에서 한순간도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가 없으면 배고파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를 “(광야에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루라도 만나가 없으면 살수 없었던 것처럼 날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살아야합니다. 욥은 일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23:10)”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부른 삶을 사셨습니까?

/또 이 시간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말씀의 은혜는 배고픔의 정도입니다. 사모함의 정도입니다. 오늘 이 하루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가 없으면 배고파 죽습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말씀의 은혜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은혜로 배가 불러서 육신의 배고픔조차도 잊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무슨 음식이 먹을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식객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보면 주인공이 전국에 최고의 맛 집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찾게 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주인공인 군대에 있을 때 배고플 때 함께 먹는 라면이었습니다. 라면이 최고의 음식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라면을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탐식의 문제는 항상 무엇을 먹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먹었을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면 그 맛있는 음식이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은 집에 가니까 저희 부모님들께서 생식을 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건강강좌에 가니까 음식을 요리해서 먹지 말고 그냥 먹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또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것도 먹지 말고, 저 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명절에 내려갔는데도 별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 자형이 김 목사 정말 생식이 성경적이냐, 무엇이 성경적인 가르침이냐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음식이든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고 했습니다.

딤전3:4에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음식물)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단에서는 채소만 먹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돼지고기와 같은 음식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어떤 음식을 먹을까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고 했습니다. 돼지고기 먹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음식이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음식을 먹을 때 믿음의 마음으로 먹어야합니다. 37:3절에 보면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양식)로 삼을지어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더라도 염려하면서 먹으면 그 음식의 참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염려를 잊기 위해서 더 자극적이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합니다. 그러니 탐식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먹더라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양식으로 먹어합니다. 밥을 염려를 씹어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먹지 마시고, 밥을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이 귀한 음식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합니다. 또 음식을 먹으면서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습니다라고 하는 믿음의 마음으로 먹어야합니다.

/그러면 초라한 음식을 먹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진수성찬이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무슨 음식을 먹을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먼 곳을 여행을 할 때 어디에 가느냐 하는 것보다 누구와 여행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보다 누구와 음식을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일 음식을 내 배만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만 먹는다면 탐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은 나눔과 교제를 위해서 먹을 때 참 맛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어떤 집사님의 집에 함께 교제하면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음식의 맛도 좋았지만 함께 있는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음식이 더 맛이 있었습니다.

//25장에서 주인이 올 때를 따라 돕는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냐고 했습니다. 거기서 양식이라 그냥 음식이 아니라 치료제로서의 음식입니다. 정말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먹는 칼국수 한 그릇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 맛이 있습니다.

//또 서로 감사하면서 먹는 음식이 맛이 있습니다. 7년 간사를 그만두려고 할 때 조금 마음이 허전할 때였습니다. 그때 큰 모임에만 참석했던 어떤 형제가 저에게 밥을 사주었습니다. 보신탕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보신탕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사 드립니다. 그동안 말씀을 전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저는 그때 먹었던 그 보신탕을 잊을 수 없습니다. 보신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 담긴 음식이었기에 최고의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함께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예배만큼이나 함께 먹는 식탁의 교제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고전15). 사람은 먹을 것을 주는 사람에게 정을 느낀다고 합니다. 집에서 아버지가 돈을 벌어주어도 어머니가 밥을 해주기 때문에 자녀들은 어머니에게서 더 큰 정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 저녁 대학1년차모임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면 한 박스를 사 놓았습니다. 또 목양실에는 맛있는 차와 과자를 준비했습니다. 또 앞으로는 커피내리는 기계를 사서 원투커피를 같이 먹으려 합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보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먹는데서 참 교육이 일어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의미로 성만찬을 하셨습니다. 또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용서하신다는 의미로 요리를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탐식을 이기기위해서 절식과 금식도 있어야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금 절식을 하고 있습니다. 일일 일식 또는 일식 이식을 하고 있습니다. 절식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계속 밥을 먹을 때 보다 정신과 영혼이 더 맑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절식의 의미는 먹고 싶은 욕망의 절제입니다. 이렇게 먹고 싶은 욕망의 절제가 이루어지면 삶의 욕망의 절제도 이루어집니다. 또 필요하다면 금식도 필요합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중단하는 것만 아니라 욕망의 단절입니다. 또 금식하면서 배고파하고, 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금식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입니다(58).

/음식은 단순히 더 많이 먹어서 배부른 것도 아닙니다. 또 단순히 맛있는 음식만을 먹어서 맛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드실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면 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음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들의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시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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