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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죽음에 이르는 죄② 시기를 이기는 길(약3:14-16)

by 금빛돌 2012. 12. 23.

 

히브리서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12: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모두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복과 행복을 가로 막는 최대의 원수는 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싸워할 7가지의 죄를 말해왔습니다. 제일 먼저는 교만의 죄입니다. 또 시기와 질투의 죄입니다. 또 분노의 죄입니다. 또 게으름의 죄입니다. 또 탐욕의 죄입니다. 또 탐식의 죄입니다. 또 정욕의 죄입니다.

지난주에 제일 먼저 분노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시기와 질투의 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분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제일 많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가장 강력한 감정을 동반하는 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에서는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14:3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어떤 왕이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시기와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두 사람에게 이렇게 자신에 무엇이든지 한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동시에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두 배로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금화를 10만 냥을 달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금화 10만 냥을 주고, 옆에 사람에게는 금화 20만 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심이 많은 사람은 내가 만일 소원을 말하면 내 옆에 사람이 나보다 두 배나 많이 받기 때문에 배가 아파서 아무 소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시기와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 이제 소원을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나의 왼쪽 눈을 뽑아주십시오라고 소원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의 왼쪽 눈이 뽑히면 옆에 사람은 양 눈이 뽑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시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기란 내 옆에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가지는 감정입니다. 시기와 같이 쓰이는 말 가운데서 질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질투란 나에게 없는 것을 옆에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가지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가인의 분노의 원인이 바로 질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인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동생 아벨에게는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는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질투하여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살인했습니다. 이와 같이 질투란 나에게 없는 것을 내 옆에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 가지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왜 나에게는 저 사람과 같은 아름다운 외모가 없습니까? 하나님 왜 나는 저 사람과 같은 돈이 없습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는 저 사람과 같은 재능이 없습니까? 하나님 왜 나에게는 저 사람과 같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 바로 질투입니다. /또 시기의 대표적인 경우가 사울 왕입니다. 사울왕도 왕으로서 많은 전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다윗이 나타나서 더 큰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18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이에 대해서 사울 왕이 어떻게 반응을 합니까? 삼상18: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9.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여기서 사울왕이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는 말을 직역하면 사울왕은 시기로 가득한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시기와 질투가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속담가운데 시기와 질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배고픔의 문제보다 배 아픔의 문제가 더 크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기와 질투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슬퍼하는 감정입니다. 또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시기와 질투는 어떤 사람이 가지게 되는 감정입니까?

시기와 질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가지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남성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또 남성의 건장한 육체를 보고 여성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시기와 질투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가지는 감정입니다.

/코이노니아에 속한 여집사님들은 같은 코이노니아 여집사님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집사님 자녀가 오늘 너무 예쁜 옷을 입고 왔네요, 집사님 아이가 너무 예뻐요라고 겉으로는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왜 내 아이가 입은 옷은 아무도 예쁘다고 말하지 않지라고 하면서 속상해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같은 연세 드신 분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낍니다.

우리 손주가 이번에 좋은 대학 들어갔어라고 합니다. 그때 겉으로는 정말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왜 우리집 손주는 아직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라이벌-즉 경쟁자라는 말은 영어 “river()”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옛날 유럽에서는 강물을 마실 때 같은 계층의 사람의 사람들끼리만 마셨습니다. 평민들은 평민들이 사는 동네의 강물만 마시고, 귀족들은 귀족들이 사는 동네의 강물만 마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강물을 마시는 사람들을 서로 라이벌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시기와 질투는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가지는 감정입니다.

또 시기와 질투는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입니다.

질투라는 말이 영어로 젤로스(zel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열심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기와 질투는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질투는 대체적으로 열심이 없는 남성보다는 열심이 많은 여성들이 많이 가지는 감정입니다.

/그렇지만 사울 왕과 같은 남성들도 더 강렬한 시기와 질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목회자들끼리도 서로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목사님인데, 더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경우에 은근한 시기와 질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 나보다 설교에 더 큰 은혜를 끼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목회자로서 시기와 질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이 시기와 질투에서 예외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더 선한 경쟁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시기와 질투는 우리로 큰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면 시기와 질투가 어떤 죄를 짓게 합니까?

1)시기와 질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투고 분열하게 하는 죄를 짓게 합니다.

성경에서 시기라는 말 뒤에는 항상 분쟁이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1:15절에서도 투기(시기)와 분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또 고전3:3절에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고후12:20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5:20 육신의 일은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오늘 본문에서도 시기라는 말 뒤에는 다툼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시기와 질투가 공동체 안에서 다툼을 일으키겠습니까?

그것은 시기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남이 잘하는 것을 보고 배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남이 나보다 잘하면 뒤에서 깍아내리려고 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안에서 어리석은 선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그들과 다른 지도자들이 말씀을 잘 가르치니까 마음에 독한 시기와 질투심이 있었습니다. 네가 무엇이라고 너만 잘 가르친다고 하느냐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지도자들을 깍아내리려 했습니다. 또 깍아내리기 위해서 저 지도자의 가르침은 잘못되었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가 있는 곳에 다툼이 있었고, 또 혼란과 모든 악한 일만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야고보사도는 마음에 독한 시기심이 있을 가지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라 땅위의 것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공동체를 분열시켜서 아무도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2)또 시기와 질투는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죄를 짓게 합니다.

사울왕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실 사울왕도 처음에는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을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마음가운데 시기와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온통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에만 집중이 되었습니다.

원래 사울 왕이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물리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도리어 자신의 신하인 다윗을 죽이는 일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기와 질투는 사울 왕과 그 가문조차도 완전히 파멸시키는 죄를 짓게 했습니다.

그러면 시기와 질투심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분노의 경우에서도 보았듯이 교만입니다. 내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분노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는 교만이 결국 시기와 질투심을 일으키는 제일 큰 원인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똑똑하고 나는 너보다 더 잘났는데, 왜 너는 나보다 더 잘하느냐, 왜 사람들이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냐는 것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기와 질투는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파멸시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시기와 질투를 이길 수 있습니까?

1)뒤에서 험담하는 말을 피해야합니다(26:22).

신원하 교수님은 앞에서 어떤 사람이 앞에서 일을 잘하고 있는데,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을 하는데서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말은 뒤에서 남을 험담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세기의 철학자들은 시기를 가리켜서 뒤에서 말로서 씹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6:22에서는 “(뒤에서)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시기와 질투의 말들은 대부분 뒤에서 하는 말들입니다. 특별히 남이 잘하는 것에 대해서는 깍아내리려 합니다. “누가 그 대학에 들어갔어”, 그러면 응 그 대학은 그저 줄만 잘 서면 들어가는 대학이야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도 뒤에서 수군거리며 재미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말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잘됨을 슬퍼하고, 또 다른 사람의 못됨을 기뻐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기와 질투의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말들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귀를 막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하는 자리는 피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잘 했을 때,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게 크게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주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특히 설교가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말을 아내에게도 하고 또 다른 분에게 했는데, 그 분도 저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위에 어떤 사람의 부족한 것이면 그것을 가지고 뒤에서 수군거리며 말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하면 뒤에서 칭찬하는 말로 서로 수군거려주기를 바랍니다.

2)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우리가 아님을 명심해야합니다(6:12)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이 총신대학원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선배님들에게 들었던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오래 살아 있으려면 절대 담임목사보다 설교나 사역을 잘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에게서 쫓겨난다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정말 그 말이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코람데오 닷컴에 글을 써 달라고 해서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보다 설교나 사역을 더 잘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고, 교회를 위하고, 담임목사를 위하는 것이다고 적었습니다.

/왜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보다 설교나 사역을 더 잘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다음세대는 지금세대보다 사역이 더 어렵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젊은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보다 더 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부교역자가 열심히 잘하면 그것이 교회를 위해서 너무나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결국 담임목사를 위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만일 담임목사가 사울 왕처럼 부교역자에게 시기와 질투를 느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싸움의 대상을 잘못 선정하는 것이 됩니다. 담임목사의 싸움의 대상은 절대 부교역자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절대 우리 성도들끼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세상이고, 그 세상가운데 있는 사탄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성도끼리 서로 싸우게 해서 결국 우리의 대적 마귀에서 우리 모두를 패하게 합니다.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며 사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하나님의 풍성함을 믿어야합니다.

시기와 질투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아주 편협하고 좁은 분으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10이라고 하는 제한 된 복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 있는 10이라는 복을 나의 경쟁자에게 10을 다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줄 모든 복을 그 사람에게 다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게 돌아올 것을 모두 빼앗아 간 사람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그릇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시면, 나에게는 주실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쟁자들에게 후히 주시고 풍성히 주셔도, 하나님의 창고에는 절대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제한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만일 내 옆에 친구가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면 그것을 두고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라 아니라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어야합니다.

그러면 내 친구에게 좋은 배필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좋은 배필과 가정을 주실 것입니다. 옆에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다면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함께 기뻐해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도 부흥과 성장을 주실 것입니다.

/내 옆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좋은 것을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4)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최고라고 고백하며 살아가야합니다(4: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최고의 것입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최선의 노력을 해서 배를 남겨도 네 달란트밖에 되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다섯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달란트의 숫자를 보지 아니하시고, 최선을 다한 종들에게 똑 같이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요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니까 제 삶의 모든 것이 너무 좋고 기쁩니다.

얼마 전에 관리집사님이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정말 좋은 차가 있으니 가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차가 20년이 된 차라 했습니다. 그런데 상태가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정말 20년이 된 차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차를 너무 소중하게 타서서 키로 수가 3만 키로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것은 가격이 너무 저렴했습니다. 카센터에 가보니까 차 상태가 너무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그 차를 탈 때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차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최고의 차라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차를 후진하고 있는데, 어떤 나이 드신 분이 갑자기를 차문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차가 몇 년 된 차냐? 고 했습니다. 그 분은 과연 이렇게 오래된 차가 정말 잘 갈수 있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차이기에 최고의 차라고 생각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왜 내 배에서 나온 아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왜 내 친구아이보다 못한가?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 인생을 바라보니까 왜 이렇게 초라한가? 나는 왜 이리 가난한가? 왜 나에게는 남들이 다 가진 것들이 없는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자들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살아가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죄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단순히 물질적으로 부요한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들에게는 없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마음이 없습니다. 불편하게 삶으로 오는 삶의 인내라는 덕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기에 내게 있는 것이 더 많습니다. 가난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기에 물질대신에 좋은 인격을 다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를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가난을 주시더라도 비굴하지 마시고, 또 내게 부요를 주신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최고입니다. 우리교회가 최고입니다. 우리 가정이 최고입니다. 우리 자녀가 최고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최고입니다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늘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길입니다.

5)시기와 질투를 이길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12:15)”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해주시고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에게 주신 축복을 하나님께서 내게도 주실 것입니다. 또 힘들어 우는 자들과 함께 진심으로 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두 배나 되는 위로의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시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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