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최근에 고려신학대학원의 신원하 교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라는 책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요제자반에서 그 내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처음에는 분노라는 주제를 다루었고, 지난주에는 시기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전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원하 교수님은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를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중에서 제일먼저 분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신원하교수님은 “분노는 다른 죄에 비해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가까이 피부로 느끼는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굶겨가면서 미사일을 쏘는 북한을 바라보면서 국가적인 분노를 느낍니다. 또 정치판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볼 때도 우리가 여러 가지 분노를 느낍니다.
목요 제자 반에서 우리가 어떤 일로 분노를 느끼는가를 질문해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의 개인적인 인격이 모독을 당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또 내가 바라던 꿈이 좌절이 되었을 때 분노를 느낀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노자체가 죄라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엡4:26)”라고 하십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는 “분을 내더라도 속히 내지 말고 더디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분을 내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분을 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또 의분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연약한지라 분을 내게 되면 그것이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면 분노는 어떤 죄를 짓게 합니까?
첫째 분노는 잘 통제되지 않아 죄를 짓게 합니다.
인간이 화를 내게 될 때 제일 큰 문제는 그것이 의로운 감정이라 할지라도 잘 통제가 되지 않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의로운 분노라도 할지라도 잘 통제되지 않아서 더 큰 죄를 짓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시편가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37:8. (의)분을 그치고 (의로운) 노를 버리며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이 말씀에서 의분이라도 그치라고 합니다. 의로운 분노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또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의분이라도 내지 말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의분을 내는 가운데 그 감정이 잘 통제되지 않아 나중에는 더 큰 악을 만들기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분노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는 죄를 짓게 합니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를 우리 영혼을 어둡게 하는 가장 극렬한 감정이라”고 했습니다. 또 “분노는 영혼의 눈을 어둡게 하여 기도하는 상태를 망가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이란 “분노의 이그러진 얼굴로 서로 어르렁거리며 물고 뜯고 있는 곳”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분노는 우리의 영혼을 어둡게 하는 죄를 짓게 하고, 우리의 삶을 지옥과 같게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의 밝은 태양빛이 비추어져도 분노의 감정이 있으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영적으로 늘 우울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복수하려는 죄를 짓게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노를 복수하려는 주체할 수 없는 욕구”라고 했습니다. 아퀴나스는 “분노는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이 벌 받기를 바라는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분노가 무서운 것은 분노는 항상 사람에 대하여 복수하려는 죄를 짓게 합니다. 가슴에 품은 분노는 항상 복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분노는 상대방을 나의 적과 원수로 만들게 합니다. 이와 같이 분노는 서로 미워하게 만들고, 보복하게 하는 죄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0절에서도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0살 때의 모세는 한순간의 분노로 40년의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또 노년의 모세는 한순간 분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분노를 “모든 더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또 “넘치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절대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수 없습니다(21). 그리고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을 수 없습니다(21).
/이와 같이 분노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분노를 잘 다스리고 이기지 못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됩니다.
/분노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주어서 일시적으로 나를 따르게 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서 나를 더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절대 분노하는 사람들 옆에 가지 않습니다.
/분노는 나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남들도 상하게 합니다. 심지어 분노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미국에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런 사건은 대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은 반드시 잘 다스리고 이겨야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이기기 위해서는 분노의 원인을 잘 분석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분노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1)우리가 분노하게 되는 제일 큰 원인은 우리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나를 인격적으로 모욕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또 어릴 때 부모나 주위에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며 자란 사람도 상처를 받습니다. 특별히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상처를 받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으로 분노를 내게 됩니다.
/혹시 주위에 분노를 자주 내는 사람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무언가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2)또 우리 분노하게 되는 원인은 내가 바라고 기대했던 욕구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사이에서 자주 분을 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해서 내가 기대했던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에 대한 욕구가 클수록 더 많은 분을 내게 됩니다. 만일 나의 배우자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분노도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 주위에서 자주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에 대해서 무언가 이루고 싶은 욕구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무언가 나에게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또 분노의 원인은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존심이 상하고 큰 모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쉽게 화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헨리나우엔은 분노에는 자신을 남보다 더 우월하게 생각하는 교만이 깔려있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견해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더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정받지 않았을 때 크게 상처를 받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더 옳고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도 크게 상처받지 않고,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혹 내가 자주 분을 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혹 나의 생각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없는지를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합니다.
/분노는 언젠가는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폭탄과 같습니다. 그리고 만일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면 그것 때문에 자신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큰 상처를 받습니다. 폭탄에 의해서 부서진 육신의 상처는 시간이 되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에 의해서 폭발된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잘 치료되고 회복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분노는 결국 분쟁, 마음의 동요, 모욕, 야유, 분개, 모독과 같은 딸들을 낳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이길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이길 수 있습니까?
1)첫째,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다 맡겨야합니다.
분노의 감정에는 내가 악에 대한 심판자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심판자에 되어서 악을 심판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악에 대한 모든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롬12장19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심판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또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심판자가 되려고 분노하지만, 나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일, 악에 대한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다 맡겨야합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심판하십니다. 또 철저히 심판하십니다. 5년만 지나가 보십시오. 10년만 지나가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께서 다 심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 앞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어야겠다고 하는 것은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자가 되어서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다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사랑입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합니다.
2)두 번째,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의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용서해야합니다.
우리는 분노할 때 그 사람에 대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미워해야할 것은 죄이지, 절대 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분노해야하지, 사람에 대해서 분노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린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분노해야했습니다(창4:7). 그런데 가인은 아벨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창4:5,6). 그래서 결국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복수하려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용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은 “체포된 상태에서 풀어준다(헬,아페시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는 분노의 당사자와 대상자 모두를 과거의 상처에서 자유롭게 풀어주고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미래에 희망을 보고 싶으십니까? 미래에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을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제발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서로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죄는 미워하되 그 사람은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3)또 사람들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 분노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대부분 가정에서 맞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내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집에 올수 있습니다. 그때 남편들은 그런 아내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를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밥을 좀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반찬이 좋지 않다고 해서, 청소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해서 너무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남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그런 남편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분노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기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오직 사랑해야할 대상입니다. 우리의 기대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기대를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실망 주는 사람에 대해서 분노할 필요가 없습니다.
4)내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 그 어떤 인간의 생각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이 절대적이라 생각하는 교만을 버려야합니다. 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눈물이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당회를 하고 나면 혼자서 눈물을 흘리실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왜 목사님의 생각대로 강력하게 말씀하시 않습니까?”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 의견을 내시는 장로님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 뜻이 절대적이라고 하면 그 장로님이 얼마나 마음이 상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냥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고 하셨습니다. 내 생각이 절대적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버릴 때 우리는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5)상처를 받아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나야합니다.
분노는 무조건 참고 있으면 화병이 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분노를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런데 또한 우리의 분노를 사람들 앞에서도 풀어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에게 분노를 풀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요제자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모든 상처를 받아줄 수 있는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 모든 분노를 다 풀어 놓아야 합니다”. 왜 제주도에 있는 친구입니까? 제주도에 있는 친구에게는 아무리 말을 해도 그 친구가 말을 옮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화가 날 때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풀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 말들이 당사자에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큰 화가 됩니다. 또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게서 화를 내면 더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 말을 듣고 그 말을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사람에게 풀어놓아야합니다. 그러면 나의 분노가 풀릴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제일 이상적인 것은 건강한 소그룹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서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소그룹의 모임을 통해서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고 치료할 수 있습니다.
6)또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씀합니다. 또 잠언12:16은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신원하 교수님은 “입에 침이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고 분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분을 내려고 해도 입에 침이 고일 때까지를 기다리는 동안에 분노가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더디내라”고 하는 말씀을 “14일을 기다렸다고 분을 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14일을 기다리는 동안 대부분 분노가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14일이 지나는 동안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14일이 지난 후에도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분노의 감정이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오시는 목사님의 이름이 김광욱 목사님입니다. 제 동생의 이름은 김광국입니다. 제가 20대 초반에 동생에게 정말 화가 날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가 날을 잡습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철에 동생을 데리고 밤새도록 큰 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게 가면서 분노의 감정이 없이 차분히 이야기를 하다가 “그래 너 이것 분명히 잘못했지”라고 하면 동생이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네가 맞아야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동생이 “맞아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큰길을 가다가 깊숙한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동생을 때립니다. 그리고 또 차분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 맞을 일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네가 맞아야겠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동생이 “맞아야한다” 고합니다. 그러면 또 깊숙한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새벽이 될 때 까지 동생은 맞습니다. 그래도 동생은 한순간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분노의 감정으로 동생을 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나의 기분을 풀 수 있지만 절대 사람을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분을 내더라도 그 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어야합니다. 그러면 사람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7)마지막으로 분노의 감정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어야합니다.
어떤 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얼마나 분노가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정부를 행하여 분노했습니다. “어떻게 국가가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분을 내어도 죽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그 분노의 감정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횡단보다 안전하게 건너기 캠페인을 벌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분노의 감정을 이길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집에 가니까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어서 목양실에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한 분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복수하는 감정으로 사용하면 나와 모두를 죽이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더 긍정적으로 사용해야합니다.
/사춘기시절에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세상을 향해 분노하는 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청소년들의 상처를 치유 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주님께 보낸 분들도 자신이 격은 상처로 분노하는 자가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을 격은 사람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노하는 가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창4: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분노함으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분노함으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분노함으로 인한) 죄를 다스릴지니라
/분노가운데서도 죄를 짓지 마시고, 분노를 더 적극적인 선으로 바꾸며 살아가시기 간절히 바랍니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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