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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사랑으로 추격하시는 하나님(욘1:1-17)

by 금빛돌 2026. 6. 20.

6월에 나는 선교사다라는 주제로 특새를 가졌습니다. 그때 참석하신 분들이 3분의 1정도가 되기 때문에 오늘은 그때 드렸던 말씀을 다시 드리로록 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분들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고래 배 속에 삼켜져서 어디 갔다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나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왜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갔습니까? 이 다시스는 학자들이 말하기를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은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입니다.

그러면 이 요나가 왜 요나가 말씀을 듣고 말씀과 반대 방향으로 갔겠습니까?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만의 원수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로 말한다면 이 아수르는 악독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말씀이 임합니다(1).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세 가지 말씀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세 번째 무엇입니까? 외치라입니다. 무엇을 외칩니까? 그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요나가 생각한 말씀과 같지 않습니까? 요나도 당연히 니느웨가 심판받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판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갔습니까? 그 도망간 이유 2절 말씀 가운데서 나오는데 잘 보시기 바랍니다.어떤 말씀이 요나의 마음에 들지 않았겠습니까? 저 큰 성읍이라는 말씀입니다. 큰 성읍이라는 말은 단순한 숫자나 규모가 크다는 것만 아닙니다. 크다는 말은 소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귀중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크다는 말 속에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그 말씀을 들어 보니까, “하나님의 얼굴이 내가 바랐던 심판의 얼굴이 아니고 사랑의 얼굴입니다. 저 원수 같은 시림더 사랑하는 얼굴입니다그래서 요나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어떻게 저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란 말씀인가? 어떻게 악독한 자도 사랑하란 말씀인가? 내가 이 말씀을 전하면 그들이 돌이키겠구나. 내 민족의 원수, 내 가족의 원수를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요나가 무엇을 피했습니까? 단순히 장소를 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한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나옵니다. 어떤 얼굴입니까? 사랑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얼굴이 나를 사랑한다는 얼굴이면 좋은데 내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얼굴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도 사랑하는 얼굴입니다.

왜 도망갔습니까? 그 사랑의 얼굴이 싫었습니다. 그 사랑의 얼굴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얼굴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요나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이 요나가 바로 나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몇 주간 동안도 계속해서 이 요나가 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요나입니다.

그래서 요나서가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 보고 단순히 아프리카 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사랑하란 말씀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요나서는 선교의 책입니다. 니느웨도 가야 합니다. 아프리카도 가야 합니다. 가기 싫은 나라도 가야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선교가 무엇입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나의 완고함과 고집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굴복당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누구에게 먼저 선교해야 합니까? 나에게 선교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는 나에게 선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이스라엘에게 니느웨가 누구입니까? 동족을 죽인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러면 지금 나에게 니느웨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익숙한 사람들만 사랑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교회 밖의 영혼들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았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풍랑을 주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풍랑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동안 풍랑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복음이 우리 안에만 머물지 말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외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내 이웃집 아주머니도 사랑하고, 할아버지도 사랑하고, 저 불교 믿는 사람들도 사랑한다고 외치라고 하십니다. 요나서는 마지막에 보시면 질문으로 끝납니다. 요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에게 풍랑을 주셨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많은 고난을 주셨는가? 그 고난이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되지 않겠느냐. 이제는 더 이상 여기만 머물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 외쳐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요나서를 통해서 우리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요나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도 사랑할 만한 사람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할 만하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좋은데,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피합니다. 이런 요나 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외면하십니까? 버리십니까? 아니면 심판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부터 하나님의 원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요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으로 추격하십니다. 결국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게 만드십니다.

어떻게 그를 쫓아가시고 추격하십니까?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이 말씀 가운데서 큰 바람을 내리시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큰 바람을 모아 가지고 요나가 탄 배에 정확하게 던지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큰 바람을 요나가 있는 배에 던지십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시고 배가 거의 깨어지게 하십니다.

이때 피해를 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요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일으키신 풍랑 때문에 누가 피해를 봅니까? 믿지 않는 사공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피해를 봅니다. 그래서 그런 위기 상황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공들은 두려워하여 자기의 온갖 신들을 부릅니다. 모든 방법을 다 씁니다.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물건들을 던집니다. 그런데 요나는 어떻게 합니까? 배 밑층으로 내려가서 깊이 잠듭니다.

요나서를 보면 계속해서 내려간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기 위해 욥바로 내려가고, 배 밑층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거기서 깊이 잠이 들까요? 하나님만 아니라 이 현실도 외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이 모든 풍랑들이 믿는 우리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때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6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보세요.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이 말이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지금도 하고 있는 말입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향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여, 왜 잠들어 있느냐? 왜 기도하지 않느냐? 네가 하나님께 구해 보라. 하나님이 너희 기도를 들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도 교회를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하는 소리를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대해서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무엇을 하더라도 자세히 보면 불안합니다. 성공한 사람도 이 성공이 유지될까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왜 나는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했을까 불안해합니다.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계속해서 그들이 두려워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주식이 올라가도 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불안합니다. 세상은 겉으로는 편안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불안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요청합니다.

교회여, 좀 깨어나라. 교회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달라. 왜 잠자고 있느냐?”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요나에게도 어떻게 말합니까? “일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는 요나를 위해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어떤 방법입니까?

제비를 뽑게 하십니다.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왔는지 알아보고자 제비를 뽑습니다. 누가 뽑혔습니까? 요나가 뽑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풍랑을 던지심으로 요나를 깨우십니다. 또 세상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요나를 깨우십니다.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하여 요나를 깨우십니다.

무리가 요나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이 12절입니다.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기서 요나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이 좋은 말입니까? 아니면 완악한 말입니까? 왜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까? 저는 예전에는 이 말이좋은 말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죽어서라도 세상의 파도를 잠잠하게 할 수 있다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이런 말입니다.

내가 죽을지라도 내가 싫어하는 저 사람들에게는 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내가 죽을지라도 나는 저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말입니다. 가장 완악한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어도 내 자존심은 꺾지 않겠다. 죽어도 내 고집은 꺾지 않겠다. 죽어도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내 자존심이 앞서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고집이 앞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보다 내가 더 앞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요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7절입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바다에 던져질 때 그때 마침 물고기를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너무 잘 아셨습니다. 이 요나가 죽어서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얼굴을 피하려고 할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전부터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그 큰 물고기는 무엇을 나타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죽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믿는 우리를 그와 함께 죽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고집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 위함입니다.

나의 사랑 없는 가슴, 나의 미움의 가슴,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나의 완악함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과 함께 내가 죽었음도 믿으십니까? 그분과 함께 내 완악함도 죽었음을 믿으십니까? 그분과 함께 내 안의 미움도 죽었음을 믿으십니까?

결국 십자가는 우리도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요--나가 얼마나 완고하고 강퍅합니까?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죽지 않으면 내가 죽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예수님)(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한 사람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그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나를 사로잡고, 무엇이 나를 강권하고, 무엇이 나를 붙잡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를 못 박아 죽이신 사랑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까?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자아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자아가 살아 있는 자, 고집이 살아 있는 자, 완악함이 살아 있는 자, 미움이 살아 있는 나로 하여금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입니다.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도 내 육신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내 고집대로, 내 성질대로 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여러분을 책망하고 비난하려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저도 사람들을 내 기분과 내 감정과 내 고집과 내 성질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런 내가 죽을 수 있습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도를 닦아서 되지 않습니다. . 수십 년 예수 믿어도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방법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런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분이 죽으심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즉 이제 우리가 누구입니까?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무엇이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내가 도무지 사랑할 만하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가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이제는 용서하게 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믿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직분과 직책을 맡기셨습니까?

우리는 말합니다.“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권사다. 나는 집사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라는 직분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후5:18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모든 직분의 본질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또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5:19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전도란 무엇입니까? 전도란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죄로 막혀 담이 생겼는데, 복음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도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전도지입니까? 우리 교회가 전도지입니다. 내가 전도지입니다.

우리가 전도지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전도지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화목할 수 있습니까? “제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 용서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서로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어 보려고 교회에 왔는데, 교회를 보니까 자기들보다 더 싸우고 있다면, 그들이 복음을 듣겠습니까? 왜 교회에 와도 복음을 믿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들었던 복음과 우리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초대교회가 전도지가 될 수 있었습니까? 초대교회는 사랑의 용광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분 계급 사회였기 때문에 주인과 종은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종은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주인과 종이 사랑의 용광로 속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초창기 교회에서는 백정이 교회의 장로가 되고, 양반이 그 장로를 섬기는 집사가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랑의 전도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용광로 안에서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품어 주고, 끊임없이 사랑해 주고, 끊임없이 용서함으로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묻게 되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예수가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그때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와 보십시오. 우리 모습을 보십시오.”

그렇게 전도할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으로 추격하십니다. 우리는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그 사랑의 얼굴을 피합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매일 도망 다닙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끝까지 추격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도망가는 나를 반드시 따릅니다.

오늘도 우리를 추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깨어지고 녹아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추격하시는 사랑에 사로잡혀 우리도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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