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집에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매일 10가지의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방청소를 하고, 밥을 짓는 일 등 10가지의 일을 시켰습니다. 만일 종이 10가지 일 중에서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종은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종의 문서를 태웠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는 이 집의 종이 아니라 주인의 아들이다. 이 모든 제산은 너의 것이다”라고 하고 그에게 양자의 증서를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아들이 된 종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그 종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집에서 쫓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종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에 했던 10가지의 일을 계속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건성으로 하지 않습니다. 또 10가지의 조문에 메여서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방을 쓸다가다도 주인을 생각합니다. 밥을 짓다가도 주인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인을 위해서 10가지 이상의 일을 합니다. 이제 종은 모든 일을 할 때 주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어떤 보상이니 조건 때문에 일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주인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에 갈수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 갈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든지 이런 구원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날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모세언약인 십계명입니다. 10계명은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계명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1계명의 뜻입니다. 1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살아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1계명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폭군이 아닌가, 왜 하나님은 다른 것은 사랑하지 말고 자기만 사랑하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이 계명을 말씀하시기전에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계명을 주시기전에 먼저 그 자신이 우리를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셨습니다. 십계명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1계명이 아니라 십계명 서문입니다. 십계명서문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한 여호와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 시켜 주실 때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살려주셨습니다. 거기서 어린양은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우리를 구원하실 때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아들이 아프면 아버지는 자신이 죽어서라도 아들이 낫는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들 예수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했을 때 선지자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부를 때 나는 너희만 알았고, 너희만 사랑했거늘 왜 너희가 나를 버려 다른 것들을 섬겼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짝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사랑의 두 대상이 서로 같이 사랑할 때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만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시듯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는 이때 정답의 차원에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맞기에 정답의 차원에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순히 정답의 차원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을 원하십니다. 진실한 고백의 차원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네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학생들에게 성경공부나 훈련이 다 끝나고 나면 항상 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는 이 세상의 모든 명예와 부귀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 합니다”고 대답을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학생들은 명예나 부귀가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부귀나 명예나 권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한 고백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진로, 또는 비전이 제일 우선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합니다. “너는 너의 진로나 비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베드로처럼 정말 신중하게 “주님 저는 저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 합니다” 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질문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물어봐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문제일수 있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명예와 명성이 문제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자리가 문제일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우에는 목회비전이나 목회 성공을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과거에는 자신 있게 고백했는데, 또 지금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내가 진정으로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물어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주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려야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이것은 이단들이 하는 방법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에 매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철저히 두 번째로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남녀 간의 사랑이 잘못 될 줄 압니다. 그래서 당시에 교회 자매들은 저하고 결혼하면 정말 재미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그 아내만을 평생으로 주님 사랑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제 돈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하니까 가장 먼저 아내가 눈에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더라도 내 아내와 다시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분은 하나님중심이 되고 말씀중심이 되니까 비로소 내 가정의 식구들이 보이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내 눈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 명예, 내 소유나 지위, 내 자존심, 내 욕망과 욕심, 이것이 먼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내 눈에 사랑해야할 사람들이 보입니다. 주님에게 내게 맡겨주신 양들이 보입니다. 일이나 사업이나 성공이나 성취, 또는 어떤 결과나 업적이나 내 욕망이 절대 우선시 될 수 없습니다. 또 그 욕심과 성공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증거로 우리 눈에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두신 양들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명의 가장 중심적인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크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있고, 똑똑하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고, 신앙생활을 오래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감사 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이 십계명은 단순히 의무감과 부담감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합니다.
2계명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형상화를 시키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이 그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돈 때문에, 또 명성 때문에 하나님을 섬 길 때가 많습니다. 또 그런 것들이 없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합니다. 3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을 존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무슨 말입니까? 이름이라는 것은 앞에 나오는 형상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이것도 2계명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 그 자체만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와 사랑만을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4계명에서 우리가 왜 안식일을 지켜야합니까? 그것도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합니까?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공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일하지 않는 것은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1-4계명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보답하는 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왜 4계명 뒤에 5계명이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아는 인간이 되면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도 알고 보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특히 사춘기 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은혜만 베풀어 주셨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게 아무것도 없더라도 구원의 은혜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춘기 때 겉으로는 부모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저희 집에 가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희 집이 너무 초라하고 누추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아버지는 왜 가난한가? 왜 더 좋은 집을 내게 주지 않은가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게 일어난 첫 번째 변화는 그동안 내가 원망하고 불평했던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사춘기 때 아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 누구는 무엇도 해주고 무엇도 해주었는데, 왜 부모님은 내가 원하는 이것을 해주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즉 부모님께 원망 불평하는 것은 사실 부모님이 내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내게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해주어도 내가 바라는 작은 그 한 가지 때문에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부모님께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가장 값진 그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원망 불평하는 사람은 그 은혜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내게 값진 구원의 은혜를 주셨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바로 이것을 이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게 이미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 할 수 있는데,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없다 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 파탄자, 이중인격자, 회칠한 외식주의자입니다(고르반). 우리의 인격이 하나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면 너무나 당연히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만일 내가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외식이고, 가식이고, 거짓입니다.
또한 보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됩니다. 이렇게 사람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5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6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이웃에게 살인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도적질 하지 말며, 거짓증거 하지 말며,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웃을 서로 사랑하기 위한 부정적인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순히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이 계명들을 지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술 담배 하지 않음으로 율법적 규칙들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왜 우리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때 나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가족을 주셨습니까? 가족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습물입니다.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습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런 꿈을 꾸어야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가는 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가능합니다.
'성경적 신학 > 설교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언약설교5-약속과 기도 (출 2:23-25) (0) | 2012.09.18 |
---|---|
언약설교4-약자보호법(출22:21-24) (0) | 2012.09.18 |
언약설교2-신실하신 하나님(창15:1) (0) | 2012.09.18 |
언약설교1-천국시민의 족보(마1:1-3) (0) | 2012.09.18 |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마5:13-16) (0) | 2012.09.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