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세계라는 말은 족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아브라함의 족보이며, 다윗의 족보이며,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우리는 처음 성경을 볼 때 이렇게 아브라함은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고 하는 이 족보이야기를 보면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뭐 성경은 처음부터 애 낳는 이야기인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한 의미와 교훈을 줍니다. 이 족보는 구약의 여러 인물 중에서 누가 천국의 시민인가? 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즉 구약의 인물 중에서 아브라함이 최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그중에 이삭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이삭의 아들 중에서 에서도 있었지만 야곱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이 족보는 단순한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족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 중에서 누가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누가 천국시민의 족보에 들어간 인물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분명 천국에 가면 이 족보 밑에 우리의 이름이 있을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족보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또 유다가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약의 많은 인물 중에서 천국시민의 이 영광스러운 족보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하면 먼저 그는 믿음의 조상이고, 또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정도로 굉장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굉장한 믿음의 사람이었고, 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창12장에 보면 그가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 즉 변화되기 전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창13장부터는 변화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창12장에 나타난 변화받기전의 아브라함을 통해서 원래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 갔을 때, 가나안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갑니다. 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갑니까? 아브라함은 처음에 부름을 받았을 때 오직 그의 관심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 밖에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서 좀 살기 힘이 드니까 약속의 땅도 버리고,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은 애굽에 가서 누구를 만납니까. 애굽 왕 바로를 만납니다. 바로가 아브라함의 사래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덕에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애굽에서 아내 덕에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가리켜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등처가라고 합니다. 등처가가 무슨 말입니까? 마누라 등처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드라이브맨이 무슨 말입니까? 부인이 공무원인데 아침 저녁으로 부인을 출퇴근 시켜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셔터맨이 무슨 말입니까? 부인이 약사를 하는데, 아침 저녁으로 약국의 셔터문만 열어주면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수퍼맨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옆집에 살던 사람이 수퍼맨이었습니다. 그분은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다고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또 날씨가 좋지 않으면 또 날씨가 좋지 않다고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는 수퍼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매일 수퍼에서 놀면서 과자를 술안주로 삼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드라이브맨, 셔터맨, 수퍼맨정도가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일 수 있습니까? 또 그 아내를 남의 남자에게 주고 그 아내 덕에 잘 먹고 잘 살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본래의 인간성은 자기 부인에게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자주 제 아내에게 하는 자연스런 행동을 통해서 내가 본래 어떤 인간인가를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도 금요성경공부를 다 마치고 갑자기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저는 짜장면이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짜장면 먹고 싶지, 빨리 중국집에 연락해서 짜장면을 먹자, 사실 짜장면은 제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방적으로 먹고 싶으니까 당신도 먹어야 된다”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통해서 “내가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나는 참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에게 한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본래의 인간성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아브라함의 본래의 인간성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원래 자신만 알고, 오직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거룩하고,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람을 이용해먹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왜 불렀습니까? 그가 어떠했기에 최초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아브라함(내가)이 비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다 그러합니다. 모두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허물이 많은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들이 다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이 천국시민의 족보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원래 불임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베게 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왜 내 뱃속에 두 아이가 있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에서와 야곱 중에서 야곱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는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말을 언제 했습니까?
그것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즉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였습니다.
태중에 있을 때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런 선이나 악이나 행하지 않은 때입니다(롬9장).
그러면 제가 또 물어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이 태중에서 아무 선이나 악도 행하지 않았을 때인데도, 왜 야곱만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해주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야곱에게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유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과 이유 없이 야곱을 일방적으로 사랑하셨기에 야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에서가 야곱보다 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에서는 남자답게 사냥을 좋아하고, 온몸에 털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마치 여자 같습니다. 그래서 부엌에 들어가 팥죽이나 끓이고, 어머니 치마폭에 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도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오해를 할 때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좋아 보여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이 보기에 잘나고 좋은 사람보다, 인간이 볼 때 볼품이 없는 그런 사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것이 오늘 족보에 나오는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의 대표로 나옵니다.
2절“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여기서 보면 선택받은(구원받은) 열두 형제의 대표가 유다로 나옵니다. 또 야곱의 열두 형제 중에서 예수님은 유다의 혈통에서 나옵니다. 재미 있게도 지금 12지파 중에서 가장 크게 남아있는 지파가 유다지파-즉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의 대표인 유다는 어떤 인물입니까?
유다의 이야기는 창38장에 상세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절대 인간을 절대시하거나 영웅시 하지 않습니다. 성경만큼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곳은 없습니다.
유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유다에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당시의 결혼풍습에 따라 둘째 아들이 첫째 며느리와 관계를 가지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첫째아들의 자식이 되어 집안의 대를 이어갑니다(시형제결혼법). 그런데 둘째 아들이 이것을 거부하여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게 됩니다. 그리고 셋째아들은 너무 나이가 어립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며느리 이름이 다말입니다. 저는 처음에 이 다말이 나쁜 여인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다말이라는 여인은 어떻게 해서든 집안의 대를 이어야합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남자가 없습니다. 남자라곤 오직 시아버지 유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기 위해 창녀로 분장을 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왜 다말이 창녀로 분장을 합니까? 그 이유는 평소 자기 시아버지 유다의 평소 소행이 그런 짓을 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유다가 걸렸습니다. 사실 그 도시에는 창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다말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3절“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입니다.
바로 이자가 유다입니다. 이 유다가 하나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은 자녀의 대표가 되었고, 또 예수님은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육신적인 것만 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는 별 볼일 없는 인간들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속이기를 잘하고 연약한 인간입니다.
또 우리는 유다처럼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얼마든지 범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계속 이야기 하는 것과 또 이 족보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며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 우리의 잘남이나, 똑똑함이나 거룩함이 아니라--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함이나 감격함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 되었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인가를 극렬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학1학년 때 부산에서 공부를 할 때 저는 5000원짜리 스폰지 파커가 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 5000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부탁해서 5000원짜리 파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께서 저희 이모님 카드를 빌려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15만원짜리 런던포그 오리털 파커를 사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런데포그는 항상 상표를 앞에 크게 붙여놓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제 앞을 확 지나가다가 한 5미터 갔다가 다시 저에게로 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야 이거 런더포그 내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좀 우쭐거립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그 옷을 입은 기숙사현관이 자주 서 있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15만원짜리 오리털 파커를 입고 있으면서-그 옷 에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실제가 15만원짜리 파거를 입고 다니지만, 사실 저의 본질은 5000원짜리 파커도 살 돈이 없는 자였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한 번도 남들이 말하는 그렇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바로 저의 겉으로 드러난 거룩하게 보이는 그 모습이 본래의 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았을 때, 겉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게 있는 착하고 도덕적이고 거룩한 모습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니까? 일 때문에 봉사 때문에 습관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그랬듯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나가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기도)의 자리에 나와서도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의롭고 똑똑하고 바르게 살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제 입에서 이런 찬양이 나왔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 벌레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얼마나 크게 느끼십니까? 우리가 더러운 시궁창에서 나와서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실재로는 내 더러운 오물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러나 그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실재로는 내가 더 깨끗한 사람이지만, 밝은 불빛아래서 내가 느낄 때에는 오히려 더 더럽고 흉측한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성령의 밝은 조명이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은밀히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죄인인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시기바랍니다.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괜찮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보게 되니 “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에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까?“ 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도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과 동시에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
그래서 어제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다음날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고 깨달아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천국시민의 족보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어떤 인간적인 자랑을 하지 말아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학별의 자랑도, 혈통의 자랑도, 또 행위의 자랑도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천국 시민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오직 만세전부터 선택해주신 하나님만을 자랑해야합니다. 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해야합니다.
어떤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까? 그 어떤 인간적인 자랑도 하지 않고 서로 모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행복해하고 기쁘고 즐거워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 이 천국민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내 아이가 병이 낫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증거는 단순한 육신의 행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심에 있습니다.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밭에 소출이 없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해 만족하시고 감사하시고 기뻐하시며 살아가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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