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서 서로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당신은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 있게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제가 또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을 믿으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분명 나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또 그 자신은 분명히 지금 예수를 믿고 있고, 또 구원받았다고 말 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확신은 하는데, 장차 죽어서 천국 갈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은 예수를 잘 믿는다는데,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큰 시험이나 환난이 닥치면 내가 과연 이 믿음을 잘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믿고 있는데 미래에까지 내 믿음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장차 죽어서 천국가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시 중랑구 묵동 여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제가 살던 대구가 세상이라고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이 묵동(천국)에 계시던 주님이 세상에 있는 피 흘린 손으로 제게 전화를 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이제 너희 죄를 다 사해졌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이 천국의 처소를 예비해주었다. 이제 너는 이 천국에 올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갑자기 부르르 떠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었다. 그러니 이제 대구(세상)에서 여기까지 알아서 혼자 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참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내가 구원 받았구나 이제 내가 천국(서울)에 갈수 있구나". 그런데 그 다음 걱정이 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처음 서울에 올 때 혼이 났습니다. 관리집사님이 "경부선을 지나, 영동대교로 쭉 오면, 중랑경찰서가 나오고, 그 앞에 교회가 있다. 찾기 쉽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길을 완전히 익하는데, 한 달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한남대교를 지나 어떤 터널을 지나 서울 시내로 들어와서 헤멨습니다. 그 다음에는 영동대교로 들어가는 길을 몰라 다른 곳으로 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서울에 갈수 는 있는데 가는 길에 청량리에서 깡패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고, 또 중랑천이 범람해서 거기서 빠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화를 받고 난 후 제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서울은 갈수 있어서 좋은데, 나 혼자서 갈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를 믿는데, 앞으로 천국 갈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면 제가 앞에서 든 예화를 어떻게 바꾸어야합니까? 처음에는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울(천국)에서 피 흘린 손으로 전화를 하셔서 이제 너는 여기를 올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것은 다 해주었으니 혼자 알아서 오라” 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다.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어” 그렇게 말씀하시고, 헬리콥터를 타시고 대구(세상)에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경부선에서 영동대교로 가는 길을 몰라 물을 때 주님은 친절하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청량리 깡패가 와서 우리를 위협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칼싸움을 하셔서 그 깡패들을 물리쳐 주십니다. 또 중랑천에 와서 강이 범람해서 건너갈 수 없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뗏목을 만들어서라도 건너가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여기 묵동 중랑경찰서 앞, 교회까지 올 때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인도해주십니다. 이렇게 말해야 옳은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성경에 구원 얻은 이후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14장1-3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가노라.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천국까지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에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온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곁에 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서 우리가 천국까지 갈 때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우리의 모든 대적을 다 물리쳐주셔서, 마지막 천국까지 갈 때까지 우리를 확실히 지켜주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 염려도 말고 근심도 말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구원 얻은 이후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희 방패요, 상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동을 하시고 난 다음 “나는 무엇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사건을 두고 한 말씀입니까? 먼저 나는 너의 방패라는 말씀은 창12장에서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신 사건을 염두 해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잘못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벌하시지 않으시고, 바로를 벌하십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이 잘못해도 믿지 않는 사람을 벌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을 잘못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바로의 손에서 그를 지켜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켜주지 않아서 사래가 바로에게로 갔다면,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차질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로의 손에서 지키신 이유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실 구원사역을 완전히 완성하시고,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어주신 것입니다.
또 나는 너의 상급이라는 말씀은 창14장의 사건을 염두 해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땅의 부족연합군에게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롯이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자기 종들을 데리고 싸워서 이기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긴 아브라함이 많은 전쟁의 승전물(이것이 상급)을 가지고 옵니다. 그때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바쳐라 합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주님이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하는 최소한의 표시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바쳐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모든 전쟁의 승전물(상급)들은 다 주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이 모든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신 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어떻게 우리가 해석을 해야 합니까? 이것도 우리가 구원받음에 있어서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물리쳐 주심으로 장래의 모든 구원을 완성하시고, 이루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미래에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어 천국 가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염려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또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주심으로 우리는 무사히 천국까지 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즉 미래에 천국 가는 것에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도 주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워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약속(계획)을 반드시 이루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창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구원해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약속을 해주십니다. 내가 너로 하여금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은 구원받은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 이 가나안땅을 네게 주겠다 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그런 일이 내게 벌어지겠습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나는 못 믿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꿈을 꾸게 하십니다. 그 꿈속에서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쪼갠 고기사이로 여호와를 상징하는 불이 지나가는 꿈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두 사람이 서로 약속할 때 치르는 의식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지켜주겠다" 서로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산 고기를 쪼갭니다. 그 쪼갠 고기 사이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지나갑니다. 이것은 만일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이 고기가 쪼개진 것처럼 죽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풍습대로 하면 쪼갠 고기 사이로 아브람과 하나님이 같이 손잡고 지나가야합니다. 그런데 창15장에 보면 하나님을 상징하는 불만 지나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아 내가 네가 한 약속은 혹 네가 부족하여 연약하여 쓰러진다 할지라도 나 혼자서 반드시 지키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만일 네가 나를 버리고 거역한다 할지라도 내가 너를 위해서 이 쪼갠고기가 되어서 죽어지더라도 내가 기필코 네게 대한 약속을 이루고야 말겠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 몸이 쪼개어지기까지 (죽기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발 이런 나를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장래의 구원의 문제와 우리의 모든 삶의 모든 미래를 주님 앞에 다 맡기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는 저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날 이런 말씀을 듣고 믿음과 확신 가운데 집에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어떻습니까? 우리 눈에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질병으로 시달리는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수십 군데 직장 원서를 써 놓았는데도, 아직 몇 년째 취직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자꾸 먹어 가는데, 아직 혼사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 남편이 자식이 곧 변화되어 주님 앞에 오리라 믿었는데, 그럴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 보니까 언제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 어렵고 힘든 일만 닥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하나님말씀을 들어도 막상 이런 삶의 어려운 상황과 특히 위기를 닥치면 우리는 또 낙심하고 좌절하고 실망합니다. 그때 우리는 또 말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와 함께하시는가? 이런 위기를 닥칠 때마다 흔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의 감정의 문제입니다. 내가 느낄 때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또 상황을 보면 더욱 절망입니다. 그래서 시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불안한 감정을 컨트롤 할 줄 아는 것이다” 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우리의 불안한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해 주겠다 믿고 안심하라" 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항상 우리 마음에 의심을 줍니다. 불안을 줍니다. 두려움을 줍니다. 나의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내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항상 두려움을 줍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사랑과 큰 확신의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 내가 걸어가는 걸음이 나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구원의 길에 들어선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내 걸음에 보이지 않는 발자욱이 있습니다. 내가 혹 주님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하더라도 그 주님은 나를 엎고 이리로 왔습니다. 혹 삶이 그대를 속이고 사람이 그대를 속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 그대를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약속은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은 오늘도 변치 않습니다. 오늘도 이 약속을 믿고 믿음과 평안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겨드랑이 비유).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과 여리고성을 무찌를 수 있었던 비결과 힘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현실가운데 악의 권세가 있고, 분명 사탄의 책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십니다. 우리를 대신 싸워주십니다.
또 이 하나님의 약속을 현실 가운데 이루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쫒기는 상황에서 그가 기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 내가 에서에게 이렇게 좆기는 상황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벧엘에서의 약속)이 과연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환도뼈 힘줄이 끊어지기까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상황이(얍복의 상황)이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기도를 통하여 그곳에 약속대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현실가운데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심령으로 확인해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신지, 그리고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들을 주기를 원하시는지 기도를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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