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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언약설교4-약자보호법(출22:21-24)

by 금빛돌 2012. 9. 18.

 

한때 한국 교회 안에서 교회는 영혼구원의 단체이지 구제단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가난한 자에게 빵을 준다고 해도, 그 속에 복음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빵을 주는 것보다 먼저 생명의 복음을 주어야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핑계로 교회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지 않고, 구제를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를 돌아보고, 구제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5장에 보면 “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라/ 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만일 네가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내가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방 나그네란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 할 때 애굽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따라 나왔습니다. 바로 그 애굽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고아나 과부는 모든 시대를 걸쳐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이방 나그네,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명 약자보호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십계명만큼이나 중요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십계명뒤 계약법전의 중심사상-김이곤).

이사야서나 예례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무수한 제물과 화려한 예배를 역겨워서 받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드려도 고아나 과부를 괴롭게 하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기도한다할지라도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면 하나님은 절대 그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는 그들이 고아나 과부를 괴롭게 했고,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도 보면 예수님은 부자에게도 복음을 전했지만, 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 된 증거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초대교회는 선교만 한 것이 아니라, 선교와 구제를 동시에 한 것을 보게 됩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초대교회는 구제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서신서에서 굳이 구제하라는 말씀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성경 전반에 걸쳐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서인석씨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에서 가난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고 하신 말씀은 성경의 아주 중요한 말씀이고, 또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할 바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합니까?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하는 신앙적 이유를 살펴 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이유를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 땅에있는 나그네-즉 가난한 자로 있었기 때문 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것을 쉽게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백성과 같이 우리 모두 밑바닥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 차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정도의 높이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2정도의 사람이 되고, 또 어떤 사람은 3정도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재물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의 땀의 결과이고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이 소유의 정도를 가지고 이 사람은 1이고 또 저 사람은 2이고 또 저 사람은 3이라고 차등을 둡니다. 우리는 소유로 존재를 평가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우리 원래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 보았을 때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원래 우리의 모습은 (애굽에 있는) 가난한 모습입니다. 즉 아무리 우리가 많은 제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을 보면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되면 이렇게 쌓았던 재물을 서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래서 서로 같이 비슷하게 되게 합니다.

그러다가 안식년이 7번째인 49년이 지난 50년째인 희년이 되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을 다 나누어주고 흩어버림으로 -다시 5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려버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제물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원래 우리의 모습은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희년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희년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모든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많은 재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가난한 자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복이 있다 하시고--그런자에게 천국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성령의 은혜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깨닫는 것만 아니라--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봐줌으로 하나님 앞에서 볼 때 내가 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사람이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 하나님 저는 저 고와와 과부와 가난한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아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건입니다.

우리가 밤새도록 하나님 저는 가난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이렇게 기도하다가 가난한 사람을 볼 때--“그들과 나는 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거짓된 경건입니다.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라고 느낀다면,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그들과 같은 자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긍휼로 도와주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은혜와 긍휼과 축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제가 여기서 가난한 자라고 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가난한자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마음이 상한 자가 있습니다. 또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가 있습니다. 또 정말 큰 어려움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가 돌봐야하는 가난한 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유일한 비결은 이 교회 안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성도를 생각하며--밤 세워 기도하며--그들과 같이 가난한 심정이 되어 기도할 때--반드시 하나님이 내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3년의 공생애 가운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문둥병자-중풍병자-혈루병자-등 예수님은 정말 육신적으로 힘들고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해서 절대 오늘 말씀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보고 가난하게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열심히 노력하려 부자가 되십니오.

그러나 부자가 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본질은 항상 가난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부를 가지고-움켜쥐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분명 여러분에게 영육 간에 더 큰 은혜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약자보호법에 나타난 정신을 현대교회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1) 교회는 돈 한푼 던져주는 것으로 구제를 다하였다 생각하지 말고, 항상 그들의 마음의 자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2) 가난한 자들을 통하여 나의 육신적인 형편이 조금 나음을 감사하여 동정하지 말고, 내가 여호와 앞에서 저들과 같음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돌아봐야 한다.

3) 교회에서는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말며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 어떻게 나누어 줄 것인 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나누는 것이 참된 복임을 알아야겠습니다.

4) 교회 안에서 돈이나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를 많이 가진 자들보다,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것은 역설이나 감상적인 말이 아니고 성경의 진리이다. "네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25:40)

5) 가난한 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영역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벧후 1:7). 교회 밖의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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