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바울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에게 많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후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육신은 날마다 낡아지지만 그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고 했습니다(고후4:16). 이렇게 말하니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나는 나의 이기적인 욕망에 미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사로잡고 강권한다고 했습니다(고후5:13,14).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심으로 이제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이며, 하나님의 일꾼인 증거로서 많은 고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으로 자천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이며, 또 참된 하나님의 일꾼인 것을 이제는 누구의 추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스로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 사도이며, 또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가 받고 받았던 많은 고난들입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인 것을 스스로 추천하는 이유는 많은 고난들 가운데 많이 견디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많이 견디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으로 9가지 고난의 목록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란 힘에 겨운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난으로 심하게 압박을 받아 마음에 살 소망까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또 궁핍이란 그 고난의 상태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고난이란, 또는 곤란이란 고난으로 인해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를 상태를 말합니다. 또 매 맞음은 말 그대도 매를 맞는 고난을 말합니다. 또 갇힘은 옥에 갇힌 고난을 말합니다. 또 난동이란 사도바울 때문에 여러 가지 난동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수고로움은 복음을 위하여 쉬지 않음으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또 잠을 잘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도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잘 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인 증거로 이런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끝까지 지켜야할 것들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6절과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6. (고난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도 깨끗함을 지켰습니다. 여기서 깨끗함이란 하나님의 섬기는 동기에 있어서 순수하고 깨끗함을 말합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오래 참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마크로뒤미아)이란 상대방으로부터 모욕이나 상해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모욕을 주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보복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모욕을 당해도 하지 않고 보복하지 않고 끝까지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자비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자비함이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오래 참음으로 그들을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문에서는 “성령 안에서”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난가운데서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오래 참음으로 끝까지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 것이 성령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요즘 제가 제일 많이 기도하는 것은 성령 충만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왜 성령충만의 은혜가 필요합니까? 우리 가운데 성령 충만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절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절대 모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고난 가운데서 오직 성령충만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거짓이 없는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가운데서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한 손에는 믿음의 방패와 한 손에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6:16,17).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그에게 날마다 날아오는 사탄의 불화살을 막아내는 믿음의 방패를 가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고난가운데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이며, 하나님의 참된 일꾼인 증거가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영광이 아니라 고난들이었습니다. 또 고난가운데서 지켜야할 것들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난 가운데서 끝까지 지키고 가지고 있었던 것들 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린도교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혹시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어떤 사람조차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우리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를 끊임없이 미워하게 만드는 사탄의 권세를 믿음의 방패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삶에 고난은 우리를 미움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더 큰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게 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만 받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8절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잘 알고 깨닫는 자에게 사도바울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사도바울은 악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바울은 역설적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8절 하반 절부터 10절까지 있습니다. “8하.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역설입니다. 역설이란 논리적으로는 말이 앞과 뒤가 모순된 말 같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 안에 많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바울은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사도바울은 참된 말을 하는 자였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서는 정말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영광이라고 전혀 없는 오직 고난만 받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유명하고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였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치 죽은 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안에 있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는 늘 살아 있는 자였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아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자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고난 때문에 마치 육신적으로 보면 늘 근심하는 자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늘 기뻐하며 살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육신적으로는 가난한 자 같지만, 만유의 주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세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지만,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서는 아무 이름도 없는 자 같지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어느 누구보다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는 고난들 때문에 죽은 자 같지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영적으로는 늘 살아있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늘 근심하는 자 같지만, 예수그리스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세상으로 가난한 자 같지만, 만유의 주 되신 예수님을 소유함으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부요한 자보다 우리가 더 부요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므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신앙은 역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절대 상황에 메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의 육신의 감정에 메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상황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의 감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감정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 한 해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새해가 되면서 이 한해에 대해서 수많은 전망들을 합니다.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이고, 부동산이 어떻게 될 것이고, 또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전망들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상황이 되든지 그 모든 상황을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이기고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자와 같이 상황에 메이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자들로 이 세상의 모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건 우리가 그 모든 상황을 초월하는 역설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한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승리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 모든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역설적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고난 가운데도 더 크게 기뻐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고난 가운데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하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 벧전1장 6절에서도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한 고난 가운데서 더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벧전 1장 8절에서 “벧전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면 그들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극심한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고난이 극심할수록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런 기쁨이 있었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봐도 제가 언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는가 하면 고난이 가장 극심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고난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또 우리가 가져야 할 역설적 신앙은 약할 때 강하게 되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에게는 그가 해결하지 못한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려주었던 바울이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왜 내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은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계시를 받고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던 바울이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병을 고쳐주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고후12:7).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후12장 10절에서 어ᄄᅠᇂ게 말합니까?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또 내가 약한 그곳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후12:9하).
만일 사도바울이 다른 사람의 병도 고쳐주고, 자신의 모든 병도 고침을 받았다면 믿음으로 행한 그 일이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이 부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함으로--바울이 행했던 모든 능력은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그저 빌려 쓰고 얻어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씩 혹은 몇 가지씩 "가시"를 허락하십니다. 인간은 100중에서 1이라도 의지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덜 의지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하시고---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그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우리가 믿음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생의 가시와 난제들을 허락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가시들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에게 있는 가시를--또 약한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하시며, 또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시를 뽑아 달라하는 것은 내게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 달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가시를 뽑아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가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시고, 또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약함을 하나님께 더 감사하고 기뻐하시고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약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또 우리가 가져야할 역설적 신앙은 고난이 행복이 되는 신앙입니다.
벧전3: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미래에)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왜 여기서 베드로가 생명을 사랑하고 미래에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에 관한 말씀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지금 현재 너희에게 고난 있지만, 앞으로 너희에게 좋은 날이 오기를 소망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무리 많은 고난을 받아도 그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은 믿음과 소망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 고난 뒤에는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소망이 무엇입니까? 이 고난 뒤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날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좋은 날을 행복한 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고난 뒤에 여러분에게 좋은 날 행복한 날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행복이 되게 하실 것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이 행복이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제일 먼저 혀를 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좋고 행복한 날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좋고 행복한 날을 보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혀를 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생활 가운데 계속해서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또 우리는 절대 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만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한 대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 미래에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미래에 행복한 날이 오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제일 먼저 우리의 입술을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부정적인 말, 원망 불평하는 말을 금하시기 바랍니다.
대신 어떤 말을 해야겠습니까?
엡5: 4.--성도들에게 어울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말입니다(공동번역)
우리 성도에게 제일 어울리는 말이 무슨 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감사의 말입니다. 또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따뜻한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또 오늘 벧전3장에 보면 서로 복을 빌어주는 말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열 번씩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축복의 말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과 함께 하십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줄 믿습니다”.
맹인이었던 크로스비가 그가 그렇게 아름다운 찬양을 만들게 된 원동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복을 빌어주는 말들을 많이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행복하고 좋은 날이 오기를 원하는 자는 화평을 구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벧전3장 11절과 12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벧전3: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12. 주의 눈은 (화평케 하는)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화평케 하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화평이 무엇입니까? 화평이란 누가 한 사람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화평이란 모두 이기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앞으로 더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느냐, 너희의 미래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먼저는 선을 행하고, 화평을 추구하라, 누가 한 사람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이기도록 하라, 그래서 모두 잘 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에 행복하고 좋은 날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에 좋고 행복한 날이 오기를 원하신다면 더욱더 화평을 추구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이 행복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으시는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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