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교육기관수료예배로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초점을 두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방적으로 가르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시고 대답을 들으시면셔 가르치셨습니다. 또 이것은 ai시대에도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ai시대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ai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소위 말하는 좋은 대학 나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si에게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또 더 중요한 것은 질문하고 ai가 대답한 것을 내 언어로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질문을 할 때 여러분들의 언어로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학생들이 본문 2절과 4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데리고 왔습니까?
3절에 음행 중에 집힌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예수님에게 어떤 질문을 합니까?
5절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라고 합니다.
이때 만일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려 죽이라고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동안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잔인하게 죽이라는 말씀을 하시니까? 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신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또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죽이지 말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의 최고 자치 기관인 산헤드린 공의회에 모세의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고발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로마정부에 고발합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그들이 하지 못하니까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죽이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정부에 고발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해도 고발합니다. 이 여인을 죽이라 하면 로마법에 고발하고,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유대인의 법에 고발합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 여인에 대해서 질문을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만일 학생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이 주어 진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6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하--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어떻게 말씀하시던지 고발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십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글을 쓰신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돌에 십계명을 직접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쓰셨습니다.
어떤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모세오경의 말씀을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레22: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남자)와 음부(여자)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모세의 율법에 보면 간음하는 자는 여자만 아니라 남자도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 이 말씀에 보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명 모세 오경에는 간음한 남자와 여자를 반드시 죽일지라도 하는데, 왜 여자만 데리고 왔습니까? 그러면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왜 남자는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간음하는 현장을 가보니까 남자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대 여자는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힘이 있는 남자는 도망하게 하고 힘이 없는 여자만 데리고 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처음부터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을 잡기 위해서 어떤 남자로 이 여인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도망가게 하고 여인만을 데리고 왔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세오경에는 간음하는 남자와 여자를 다 죽이라고 하는데, 왜 여자만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7하--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지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오직 간음한 여인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그 여인을 보면 분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의 사회에서 이런 간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서 이 여인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이 여인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땅에 쓰신 글을 통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약자에 대해서는 강하고, 강자에 약한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또 모세의 율법을 겉으로는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자신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땅에 글을 쓰십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 땅을 무엇을 쓰셨는가에 대해서 여러 견해들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결국 예수님은 다른 율법들을 쓰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는 말씀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를 돌아보라는 말씀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은 수 많은 율법들을 땅에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이겠습니까?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여러 율법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0절입니다.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러니까 이 여인이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고 합니다. 그러니까 ”11하--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친구들을 말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그 친구 우리 학교에서 전교 1등하는 친구야 라고 말합니다. 또 저 친구는 우리 반에서 꼴찌하는 친구야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친구를 말할 때 무엇으로 말합니까? 그 친구가 한 행동으로 말합니다. 공부를 잘하니까 전교 1등하는 친구라고 말합니다. 또 공부를 못하니까 공부를 못하는 친구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분명히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해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행동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4절에 보시면 “이 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이러한 여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간음한 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0절에 보시면 “여자여”라고 합니다. “간음한 행동을 한 여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자”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여자여”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동족을 돌로 죽이고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네 형제를 죽인 살인자 모세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모세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실패자 베드로야” 하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미국 엄마와 한국 엄마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이가 접시를 깨뜨렸습니다. 한국 엄마는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잘—한다. 집에 접시를 모두깨지, 빨리 쓸고 방에 들어 공부나 해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엄마는 어떻게 말할까요? are you okay 너 괜찮니 다치지 않았니 접시는 다시 사면 돼 라고 하면서 안아준다고 합니다.
예전에 우리 교회에 다녔던 어떤 학생이 있었습니다. 40년 전에 그 학생이 고등학교 때 당시 돈으로 50만원 하는 일제 사진기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할부로 사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비싼 사진기였습니다. 그 학생이 수학여행을 가서 기차에 두고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수학여행을 하는 동안 아이들과 즐겁게 놀지도 못했습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그 학생은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가 아끼시던 사진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아 사진기는 나중에 다시 사면 돼, 괜찮아, 그런데 너 이것 때문에 즐거운 수학여행을 즐겁게 보내지 못했지, 그래서 사진도 찍지 못했지. 아들이 내가 가슴 아픈 것은 사진기 때문이 아니야. 그 사진기 때문에 즐거운 수학여행을 보내지 못한 거야“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혹시 자녀가 잘못했을 때 ”이 바보 멍충아 이것도 못하니, 이 게으름뱅이야 왜 이렇게 게을러“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돌대가리야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부모가 자녀가 잘못한 행동을 가지고 그 자녀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그런 행동을 하니 너는 그런 놈이야 라고 하면 우리 아이는 그런 아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간음한 여자라고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으면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슥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탄은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정죄하고 있는 사탄에게 하나님은 사탄이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는 불에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대제사상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불에 약간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여기에 금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금화가 불에 그슬려 있습니다. 그때 사탄은 이 금화는 불에 그슬렸어 쓸모없어 버려야 해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것은 불에 약간 그슬렸을 뿐이야 그을음을 닦으면 이것은 여전히 금화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불에 그슬린 금화입니다. 닦아 내면 빛나는 금화입니다”.
여러분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참소하여 낙심하게 하는 사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너 혹시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넘어졌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야 딸이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과 학생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날마다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우리의 잘못 때문에 실수하거나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어려운 것은 먼저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잘 용납하지 못합니다.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안돼"라고 하고 자포자기합니다. 또 이런 것이 거듭되면 사람은 실패의 운명론에 빠집니다. "나는 안되는 놈이야--별수 없는 놈이야—나는 쓰레기야 이 땅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자로 운명지어졌어"라고 합니다.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납한다하더라도 사람들이 우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너는 실패자야,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안돼"
그래서 요즘에 젊은 청년들 가운데 은둔형 외톨이가 많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여인과 같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실패했단 말인가? 도무지 내 양심에 거리껴 감히 예수님 앞에 못서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 곁에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이 너를 정죄하고 네 양심이 너를 정죄한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실수하고 실패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백번이라도 넘어진 우리에게 단 한마디의 말씀을 하십니다. “괜찮아 앞으로 다시는 그리지 않으면 돼, 다시 용기를 내, 다시 시작해, 넌 할 수 있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줄께 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저는 신학대학을 다닐 때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제 마음대로 살 때는 몰랐는데,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배울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말씀 앞에서 날마다 쓰러지고 넘어지는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 대해서 너무도 크고 깊은 좌절감과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안돼--나는 절대 말씀대로 살 수 없어---아무리 노력해도 또 말씀에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죄를 짓고 또 죄를 짓는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럴 때 마다 내 마음에 항상 용기를 주었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라-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라고 말씀 하십니다
정말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큰 힘과 용기를 줍니다.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마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고 여기저기에 실패와 좌절의 올무를 놓습니다. 뒤에서 숨어서 가만히 엎드려서 우리가 그 올무에 걸려서 넘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실수하여 넘어지면 사탄의 왕국에서 잔치를 벌입니다. 또 동네방네 다니면서 우리의 실수를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올무를 점점 더 크게 조이려고 합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실패와 실수를 인한 고통의 멍에를 끊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 십자가의 피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담궈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로 인해 사유의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혹 예수님의 건망증을 아십니까?
우리가 같은 죄를 가지고 99번 예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제 100번째입니다. 이제 너무 죄송해서 감히 예수님께 회개할 용기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나옵니다. 그때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 이번이 처음이구나“고 말씀하십니다. 100번째의 죄로 보지 아니하시고, 첫번의 죄로 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건망증입니다. 우리는 죄를 기억할지 몰라도 예수님은 회개하고 용서한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십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과거의 죄가 아닙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실패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가에 마음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의 과거의 행동으로 우리의 미래의 삶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그 사람은 과거에 저런 사람이야, 그러니 앞으로 저럴 수밖에 없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과거의 삶이나, 심지어 현재의 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았고, 또 현재에도 자주 넘어지는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비록 내가 아직도 온전치 못한 삶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다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내 마음의 바른 태도만 가지고 있으면,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태도만 가지고도 우리의 미래를 봐 주십니다. 그리고 격려해주십니다.
"지금은 네 모습이 아직 그런 모습이지만--네 마음의 중심을 내가 알고 있어--너는 반드시 앞으로 네가 마음에 소원하는대로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떤 이유로 인해 실수하시거나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시험을 망쳤습니까?
절대 좌절하시거나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날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다시 그러지 않으면 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힘을 입어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새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과 학생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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