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당에서 신부님이 신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단 한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신부님이 또 다시 여러분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93세가 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정말 저 할아버지는 단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할아버지 왜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내가 미워하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손을 들지는 마시고, 속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운데 단 사람이라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여러분 혹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도 요한은 항상 성도들을 말할 때 사랑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적는 목적도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내가 너희에게 처음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가 구약시대부터 가진 옛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에서도 원수를 갚지 말라는 계명이 있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도 형제를 마음으로도 미워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레19장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레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라고 합니다. 또 레위기 19장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레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옛 계명에서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은 처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지고 있던 구약성경의 옛 계명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그에게와(그리스도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실현된 것이라) 이는(사랑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구약성경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계명이 있었는데, 이제 내가 다시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는 계명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참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먼저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는 계명은 그리스도에게 실현됨으로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예수님에게 사랑하라는 계명이 어떻게 실현되었습니까? 그래서 참된 것이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에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계명은 그리스도에게 참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에게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참된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 그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도 참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어느 누구도 마음으로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우리에게 사랑이 실천되고, 실현될 수 있습니까? 8절 하반 절을 다시 보시면 사랑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은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우리에게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여기서 우리에게 비치고 있는 참 빛은 누구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비치고 있는 참 빛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요일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참된 빛이신 하나님의 빛은 어떤 빛이겠습니까?
저 뜨거운 태양과 같이 우리 모두를 불태우는 빛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은 얼음과 같이 차가운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의 빛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은 차가운 우리의 모든 마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랑의 빛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에게 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빛은 서로 미워함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모든 마음을 환하게 비추시는 사랑의 빛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9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9. 빛(사랑의 빛 이신 하나님)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이 빛은 사랑의 빛 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빛이신 하나님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그 형제는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에게 대한 말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들만이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그들이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철저히 대립시켰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과 가까이 하기 싫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나는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한때 경건한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했습니까? 너무 기도를 열심히 하기에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참된 경건이란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참된)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사랑으로)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합니다. 참된 경건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로만 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미세오”라는 말로소 “싫어하다, ‘증오하다’ 라는 뜻으로 형제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순간적으로 형제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싫습니다. 그 사람이 잘 되는 것이 무조건 싫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현대판 영지주의자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빛 안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어두움에 있는 자들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제를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를 사랑하는 자만이 사랑의 빛이신 하나님 가운데 거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거리낌이 없다는 말은 그 사람을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그가 가는 길을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울 왕이 평생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인생을 거리끼게 하는 걸림돌인 다윗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자신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울 왕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직 내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내 인생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평생 그 걸림돌을 제게 하는 일로만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 인생에 걸림돌이 없습니다.
비록 나를 헤치려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절대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워하지 않고 사랑함으로 내 인생에 거리끼는 걸림돌이 없는 삶을 살아기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형제를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깜깜한 밤에 산 길을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단순히 깜깜한 밤이 아니더라도 만일 우리 눈이 멀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형제를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습니다. 형제를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행하여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어두움에 행합니까?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왜 형제를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어디로 갈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 사람의 삶 가운데 희망의 빚을 비추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 계시기 때문에 그가 어디로 갈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삶에 희망의 빛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미워하는 자는 삶에 거리끼는 걸림돌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년에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년에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사랑하면 희망이 있고 사랑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따라함).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어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사랑의 빛을 받아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걸림돌이 없는 평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갈 모든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는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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