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병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병이 없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를 하는 제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이 없이 돌아가시는 분은 한 분도 없다. 단지 그 병이 크냐 작으냐의 문제이지 모든 사람은 다 병으로 죽게 된다 결국 네 아버지도 어떤 병인지 모르지만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늙음을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노년의 때가 영광스러운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 16장31. “잠16:31 (노년의)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잠16:31. 옳은 길을 걸어왔다면 (노년의) 흰머리는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우리말 성경)”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루 중에서 해가 질 때 즉 황혼이 제일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은 인생의 오전을 맞고 있습니다. 중년들은 인생의 정오를 맞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년은 인생의 황혼입니다.
인생의 오전에는 새로운 희망과 꿈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또 인생의 정오는 태양이 가장 강렬하게 활동을 할 수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의 노년의 때가 제일 아름다운 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노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노년의 의미는 성숙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늙어서는" 이라는 말은 "나이가 많게 되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네가 늙어서는"이라는 말씀은 신앙적으로 성숙한 단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안셀림 그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 늙는 기술은 노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 어거스틴의 말 대로 사람은 태어나면서 늙기 시작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날 들은 점점 줄어든다. 즉 평생을 두고 늙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늙음은 기우는 것이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다. 우리는 노년이라고 하면 기력의 쇠진, 병치례와 허약만을 떠올리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노년이 되면 긍정적 가능성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성장,성숙,완성의 가능성이 노년의 의미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늙음의 의미는 성숙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성숙하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어리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나 자신입니다. 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 상반절을 다시 보시면 “18상. 내가 진실로 네게에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신앙이 어린 단계에서는)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어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합니다. 신앙이 어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리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내 생각-- 내 계획대로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데로 살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곳만 다닙니다.
그러나 성숙하는 것은 내가 계획을 세웠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가신다 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내가 스스로 하고 싶은 데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신앙이 어릴 때는 무조건 예수를 믿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잘된다고만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이 어린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모든 것을 다 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무조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나의 경우).
--모세가 40살 때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모세가 원치 않았던 광야로 인도하셔서 거기서 40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하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 가나안 복지가 아니라 40년의 광야생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을 그들이 원치 않은 곳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모세와 이스라엘백성 안에 있는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인간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꺽어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경우 80살이 되었을 때--그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생각들이 사라졌을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루어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가 아니라,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 그때 잡아주시고, 역사하십니다.
또 신앙이 어릴 때 하나님은 당근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당나귀 앞에 당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근을 향해 갑니다. 또 다른 곳에 당근이 있습니다. 그러면 또 그곳으로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인도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면--우리는 평생 유아기의 신앙생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당근으로만 인도하지 않습니다. 다량의 눈물 양식을 먹이 십니다. 고통의 고추가루를 먹이십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 안에 아무 것도 없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자를 쓰십니까?
내 안에 무언가 내가 남아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질 때 역사하십니다. 내 고집과 아집이 있을 때 넘어뜨리십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말했듯이 하나님은 맷돌 갈 듯이 우리를 갈아버리십니다.
지금도 이렇게 갈림을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럴 때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힘이 듭니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십니다. 내려 가게 하십니다. 내가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래도 원망과 불평이 없이 하나님의 뜻이겠지 하고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또 이렇게 내려가는 것이 영원하리라 생각하지 않고--그 가운데서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고-주님만 바라고 나아가는 신앙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셨을 때 그것 때문에 교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또 우리를 높여주셨을 때 그것도 영원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또 잘되어도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이 참으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신앙이 성숙되었다는 것은 공동체를 따라 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본문-18절을 다시 한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런데 신앙이 성숙하지 않는 경우 자기 자신의 생각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하면 내 뜻은 이러하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갑니다.
어릴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한 신앙이 되면 내가 하기 싫어도 주님이 원하시면 따라가는 신앙입니다. 또 좀 더 성숙이 되면 공동체가 나를 띠를 띠고 끌고 갈 때도 그것을 따라갈 수 있는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바울 얼마나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래서 유대교의 신앙에 맞지 않는다 해서 스테반을 돌로 쳐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성숙한 후 제사의 음식 먹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제사의 음식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 때문에 공동체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소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분위기를 생각해서 절대 먹지 않겠다 고 했습니다.
---- 그래서 여러분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있어도 항상 마지막 순간에는 교회의 화평을 쫒아서 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로 또 어리다는 것은 영광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하다는 것은 영광보다는 고난을 생각합니다. 채움보다는 나눔을 생각합니다. 재미보다는 헌신을 생각합니다. 안락보다는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편의보다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당위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도 어릴 때는 영광받는 길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네가 젊어서는( 어릴 때)는 내가 원하는 좋은 곳으로만 다녔지만--늙어서는 네가 원치 않은 곳으로 가리라--이것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여러분 잘 아시는 맥아더장군의 기도문입니다.
내 아이를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신을 분별할 수 있는 힘과 /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않는 / 용기를 주시고
정직한 패배에 /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다하며 / 승리에 겸손하고 /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 높은 이상을 갖게 하시어 /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다스리게 히시여
내일을 내다보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 또한 생활의 여유를 갖게 히시어 /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 교만하지 않은 /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 소박한 데 있다는 것과 /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새기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된 저도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는가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나이를 먹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먹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숙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성숙은 선택이 아니요 필연적 과정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성숙의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야 합니다. 왜 내가 늙어야 하는가 하며 젊을 때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답게 늙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람도 결국 같이 늙게 됩니다.
매달 달력을 넘기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이면 성숙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도 어린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숙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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