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신앙에 있어서는 남성들이 더 좋겠습니까? 여성들이 더 좋겠습니까? 여성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남자 제자들은 거의 도망갔지만, 4명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으로 제일 먼저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처음 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예수님의 빈 무덤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돌이 옮겨졌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줄 알고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제자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달리기를 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누가 먼저 갔습니까? 사도 요한이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뒤에 온 베드로가 무덤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뒤에 사도 요한이 무덤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감쌌던 세마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쌌던 수건도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그들은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좋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부활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예수님 부활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 다시 다시 제자들이 함께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빈 무덤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무덤에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간 줄 알고 무덤 밖에서 울고 있습니다. 울다가 몸을 구부려 예수님의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12절입니다.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무덤 안을 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있습니다.
여러분 왜 두 천사가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둘은 증인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있으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있으면 그 사실이 확실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두 천사가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왜 두 천사가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속죄소에 두 천사가 있습니다.
출25ㅣ17.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천사)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천사)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속죄소 그림
그러니까 예수님이 뉘었던 곳에 두 천사가 있다는 것은 속죄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 속죄소에는 희생재물의 피가 뿌려집니다. 우리의 죄가 피로 덮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 그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는 속죄소에 두 천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 곳에 두 천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천사들이 여자여 왜 우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 주님의 시체를 옮겨다가 어디를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운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찾지 못하여 울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에 있는 천사들에게 사람들이 내 주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하고 뒤를 돌이켜 보니까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 밖에 계십니까? 무덤 안에 계십니까? 무덤 밖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 천사들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왜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예수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죽은 예수님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지금 여러분들 곁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은 여자여 왜 우느냐고 하십니다. 누구를 찾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예수님의 시체를 옮겼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지금까지는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언제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실 때입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신 이름입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평상시에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을 합니다. “랍오니” 라고 합니다. “랍오니”는 “나의 선생이여” 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마리아가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하실 때 과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 들린 여자였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자라는 말은 귀신에 완전히 사로잡힌 여자라는 말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특징은 그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림으로 여자로 아름다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하실 때 이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눈앞에서 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까? 남자분들은 예수님께서 달려가서 악수를 청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자분들은 아마 부활하신 예수님을 안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붙들고 만지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옛날 성경에서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를 붙들지 말고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왜 올라가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면 하나님 아버지는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리아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모두에게 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고 만지지 말라고 하십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만일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은 마리아만의 예수님이 되시고, 우리 모두의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나를 붙잡지 말라, 나를 만지지 말라. 나는 아버지께로 가야 한다. 그래야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17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면 이제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있으면 예수님은 마리아만의 예수님입니다.
또 만일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은 예수님만의 하나님이 되고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셔서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성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성령)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성령)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체로 만난다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만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체로 만나고 있으면 여러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체로 만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성령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함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오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여러분들의 마음으로 영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날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찬송가 442장에 “442장 1절, 저 장미 꽃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고 합니다.
그래서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손으로 만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날마다 성령으로 만나볼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벧전1:8. (부활하신) 예수를 너희가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나 믿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령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을 날마다 가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예수님의 하나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약성경연구 >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강해(64)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요20:24-29) (0) | 2024.08.31 |
---|---|
요한복음강해(63)왜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말씀하셨나(요20:22-23) (3) | 2024.07.20 |
요한복음강해(60)역사적 부활과 성경적 부활(요20:1-10) (0) | 2024.06.22 |
요한복음강해(59)십자가 전과 후가 어떻게 다른가?(요19:38-42) (1) | 2024.06.15 |
요한복음강해(58)역사로서 십자가와 의미로서 십자가(요19:31-37) (0) | 2024.06.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