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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신학/설교모음

의문에서 확신으로(롬8:31-39)

by 금빛돌 2024. 4. 20.

여러분가운데서 만일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지신 있습니까? 아마 한분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 만고불변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만고불변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를 위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계십니다. 셋째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또 넷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또 다섯째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는 이 다섯 가지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이 5가지의 사실은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확신 가운데서 매일 아무 걱정이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당신은 과연 나를 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나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과연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라고 마음속에 의문을 제기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떨 때는 이런 의문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혼부부가 있습니까? 아내가 묻습니다. “정말 당신은 나를 사랑해--정말 당신은 나를 위하고 있어--정말 당신은 내 삶을 책임질 수 있어-정말 당신의 사랑이 변함이 없어라고 물어보는 아내가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질문이 어리석은 의문이라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의심과 의문은 다릅니다. 의심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필요한 의문도 있습니다.

이것은 남편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의심이 아닙니다. 남편의 사랑을 믿지만 매일 그 사랑을 매일 확인하고 싶은 의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한다면 끊임없이 사랑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의문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사도바울은 그 어떤 성경에서 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신을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그 의문 속에서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5가지의 의문과 그 의문 속에서 어떻게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태양이 떠는 사실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기 위해서 가져야할 첫 번째 의문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나를 위하고 계시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자주 이런 의문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위하고 계시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함으로 다시 한번 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들을 위하고 계시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하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1장에 보면 원래 우리들은 절대 하나님께서 위하실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원래 우리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고상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위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위하실 수 있는 근거가 마련이 되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운동장에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수십 명의 아이들이 있을 때 어머니는 오직 어디에만 눈이 가 있습니까? 자신의 사랑하는 아이입니다. 비록 그 아이가 남들보다 약하고 실패하고 넘어지고 문제가 있어도 그 아이는 내 아이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어머니는 그 아이와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그 아이에게 해가 되는 일이 있으면 그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그 일을 물리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더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시편에도 보면 이런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라고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악한 권세가,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고 넘어뜨리려 해도 이제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움이 없이 태연히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이 나를 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과연 지금도 나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까? 라는 의문입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은 정말 나의 필요를 정말 채워주실 수 있습니까? 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의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때마다 시마다 반드시 공급해주시고 채워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까?

32절입니다.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가장 귀한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기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하 모든 것보다 값진 예수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에 대해서 스펄전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내가 이미 한 일을 생각해 보아라. 뭐라고! 내가 너를 돕지 않았다고? 내가 왜 너를 돕지 않았느냐? 내 피로 너를 샀는데. 왜 내가 너를 돕지 않았다고 하느냐? 내가 너를 위해 죽었는데도……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큰 일도 했는데 아무려면 그보다 못한 것을 너한테 해주겠느냐?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사실 내가 너를 돕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다. 나는 이미 그보다 더 많은 일을 네게 해주었고 또 앞으로도 더 많이 해줄 것이다.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너를 택했다. 너를 위해 언약을 세웠다. 너를 위해 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었다. 너를 위해 내 생명도 버렸다. 내가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이미 행했는데 아무려면 지금 너를 도와주지 않겠느냐? 분명히 너를 도와줄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런데 또 우리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아직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을 주시기 않습니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의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를 위한 것인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항상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신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아들과 함께 이 모든 것을 다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좋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요즘 새벽 기도시간에 신명기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보면서 계속해서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가라는 의문입니다. 그에 대한 해답이 신8장에 있습니다. 8: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기 않겠느냐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습니까? 왜 그에게 사탄의 사자와 같은 대적자들을 허락하셨습니까?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왜 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 주신 그 모든 육신의 가시들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 모든 것들로 하나님께 만족하시며 감사하시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직 죄인이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여러분 나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나는 실제적으로는 죄인지만, 신분적으로 의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과 우리의 양심입니다.

"네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너는 아직 죄를 짓고 있지 않으냐--너 지난주에도 말씀대로 살았느냐-그런데 너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어떻게 날마다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느냐--너는 죄인이야--너는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 나올 수 없어" 라고 날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양심의 법정에 세워놓고 송사합니다.

"솔직히 네가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아라--나는 네가 지난 날에 한 잘못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매주 같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느냐"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송사합니다.

이때 이런 사탄의 정죄와 송사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33절과 34절입니다.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땅의 모든 법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렇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시는데 과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욕탕집 주인과 같습니다. 이런 목욕탕집 주인을 보셨습니까? 너 지난주에도 왔는데 왜 이번 주에도 왔어--너 왜 그렇게 더러워-그런 더러운 몸으로 이 목욕탕에 올수 없어--너 왜 그렇게 지치보이니--그런 피곤한 몸으로는 여기에 올 수 없어”-----만일 이렇게 말하는 목욕탕 집 주인은 없을 것입니다.

--목욕탕집 주인은 때를 가진 사람을 더 좋아합니다. 같은 때를 가지고 일 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피곤하면 할수록 더 반갑게 사우나에서 쉬기를 원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런 목욕탕집 주인과 같습니다. 사탄은 매일 우리를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너 그런 죄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나 올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네가 죄를 지었느냐--그럴수록 더 하나님께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세상에서 피곤하여 지쳤느냐--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너를 더 환영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피를 힘입어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죄를 짓지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런 확신가운데서 날마다 예수의 피를 힘없어 하나님의 성소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 번째 예수님은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의문을 제기 할 때가 잇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환난을 당할 때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오늘 말씀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35. 누가 우리를 그릿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를 믿지만 우리 가운데서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적신--벌거벗김을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위험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삶이 매일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런 환난가운데서 과연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때 오늘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 어떤 환난이 있어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어떤 환난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전쟁터를 향해 달려가는 어머니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이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환난의 전쟁터에서도 화살을 맞으면서도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선교사인 리빙스턴이 마지막 죽을 때까지 붙들었던 말씀입니다. 리빙스턴이 죽을 때 유품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품 속에서 롬8:35-37까지의 내용으로 설교한 스펄전의 설교집이 있었습니다. 그 설교집은 얼마나 많이 보았던지 달아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왜 리빙스턴이 이 말씀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선교사역을 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어려운 일보다 더 큰 영적인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격어야 하는가? 과연 주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는가? 라는 의문입니다(주님 내가).

//이때 리빙스턴이 끝까지 붙들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것 같은 환난이 있어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환난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붙들고 그는 죽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수사랑하심은이라고 찬양하면,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라고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항상 주님 과연 나를 사랑하십니까? 주님 나를 사랑하십니까? 라고 의문을 제기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이 모든 어려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37절에 있습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환난,적신,위험,,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음)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오는 환난의 강도가 세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가 더 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환난의 강도보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강도가 더 크게 세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힘으로 -그 어떤 일도--환난도- 핍박도--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는 의문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 가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윈하신 은혜만 가지고도 하나님이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랑을 확신하고 믿는다면 지금 현재 내가 그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확신을 가짐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사랑의 힘으로 넉넉히 이겨 나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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