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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마태복음

이방인과 다른 기도(마6:7-8)

by 금빛돌 2024. 4. 10.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이란 생각 없이 말을 많이한다는 뜻입니다. 즉 기도할 때 무조건 내가 간절히 많이 말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이방인이란 유대인이 아닌 일반 종교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일반종교인들은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종교인들에게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소원성취입니다. 내 뜻이 무조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기도의 열심입니다. 사실 기도의 열심에서 본다면 우리가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기도할 때 이방 종교인들처럼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을 절대 이방 종교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 무엇입니까? 먼저 유대인과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이방 종교인과 다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에서 보는 일반 종교인과 다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 카센터에 가서 사장님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천주교를 다니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그 사장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믿음이 별로 없지만 무조건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는 것 같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유대인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다르게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들과 다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첫째,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라고 하면 이렇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아니 기도란 내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내가 하나님께 바라는 기도의 소원은 어떻게 됩니까? 내게 경제적으로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제목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기도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물질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잘 되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내 기도의 소원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마지막에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먹고 사는 모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도 더하여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무조건 내 뜻과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과 친밀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은 신과의 친밀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왜 이방인들은 신과의 친밀감이 없습니까? 이방인들이 믿는 신이란 살아있는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거룩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도 하나님에 대해서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합니까?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구할 것을 다 미리 아시는 아주 친밀하신 너희 아버지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말하기도 전에 제가 여러분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다면 제가 얼마나 더 친밀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제목을 다 아십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8. 그러므로 그들을(이방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만 기도해도 됩니까? 오 주여 주님 아시지요 주님 아시지요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이방종교인들의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다 아신다는 이 이 말씀을 보면 마치 우리가 구체적으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굳이 하나님께 힘들게 기도해야 하는가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기도할 때도 그냥 대충 하나님 잘 아시지요라고 하면 되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중에서 이신론을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신론이라는 것은 이론적인 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믿지 않고, 하나의 원리로만 믿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마치 자동판매기와 같이 생각합니다. 자동판매기는 아침 점심 저녁 시간이 맞추어져 있어서 시간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먹을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굳이 자동판매기 앞에 나가서 아침을 주십시오, 점심을 주십시오, 저녁을 주십시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기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인격체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달라고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4:2--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준비해 놓으셔도 우리가 하나님께 찾아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가서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열방대학에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칠 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믿음과 기도에 제한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교회(가정과 개인)에 놀랍고 풍성한 은혜와 복을 미리 다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믿어야합니다. 또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우리가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순종했으면 다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었어도 그들은 얻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한해 우리 교회와 가정과 개인에게 놀랍고 풍성한 은혜와 복을 다 준비해 놓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것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원망 불평만 하고, 불신의 말들만 하면 40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와 복을 준비하신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세번째, 우리의 기도가 이방인과 다른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왜 이방인 종교인들이 뜻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까? 이방종 교인들은 그들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정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라도 무조건 정성을 대해서 기도하면 신이 들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합니다. 제가 중학교 때 불교시간에 배운 것이 이것입니다. 반은 불경을 외우게 해 놓고, 그 다음에는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불교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란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부처란 무엇이냐,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컷 불경을 외우게 해 놓고, 불경의 뜻이 무엇이냐. 그것도 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뜻을 몰라도 정성을 다해서 외우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을 떠 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상하게 생긴 돌 앞에서 기도합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과연 그 물이 응답을 해줍니까? 그 돌이 응답을 해 줍니까? 라고 하면 그들은 말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겠죠, 중요한 것은 내 정성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것이 이방종교인들의 기도입니다. 우리도 기도를 할 때 이렇게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삼상11-8절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한나의 고통을 다루고 있고, 9-18절은 그 고통을 가지고 한나가 기도하였습니다. 이 한나의 기도에 대해서 삼상117절에 삼상1:17.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8절에서 한나는 삼상1:18.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고 합니다.

앞에서 한나는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을 믿고 확신했을 때, 이제는 더 이상 통곡하지 않습니다. 이제 밥도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실 줄을 믿었으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기도만 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삼상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고, 이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응답해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람들이 기도는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만 하였지.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주여 주여 하고, 하나님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간절함은 있었지만, 기도에게 제일 중요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막11:24에 보면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마가복음 9장을 보면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탐 마샬이라는 사람은 기도의 싸이클을 이렇게 말합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간구의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마음에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마음에 확신이 생긴 증거는 평안입니다. 처음 기도할 때는 염려하고 불안했는데, 기도하면서 마음에 확신이 드니까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그 다음에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내 병이 낳았습니다 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응답의 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의 시점과 응답의 시점사이에 시간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내게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셨는데, 시간적으로 당장 응답이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1)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은 맷돌을 가시되 천천히 가신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맷돌을 가는데, 빨리 빨리 갑니다. 그래서 대충 눈으로 볼 때 희게 보이면 다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세밀히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는 더디게 보일지라도 정확하신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2)마음의 확신과 응답의 시점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보다 하나님 자신에게 초점을 두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확신과 응답의 시점사이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십니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니면 기도의 응답물을 더 사랑하느냐”. 만일 우리가 하나님보다 기도의 응답물을 더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응답의 시점을 더 늦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정말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을 우리가 받아서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기도의 응답만에 가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피폐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응답의 시점을 늦추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에게 그것을 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합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3)그래서 마음의 확신과 응답의 시점사이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며, 그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조급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교제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정확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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