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이제부터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해서 이제부터 우리가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라고 하십니까?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친구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우리를 예수님의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친구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친구는 단순히 의무감과 책임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단순히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친구는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대상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종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섬길 필요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이제 네가 단순히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나를 섬길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두렵고 떨림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친밀한 교제의 대상으로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종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친구라 하셨습니다.
또 모세를 향해서도 친구라 하셨습니다.
또 이사야서에서도 이스라엘을 가리켜 너희가 내 벗이라 친구라 하셨습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까지는 예수님을 의무감과 책임과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무섭게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1년 동안의 기도실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이 나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이 불렀던 찬송이 저 장미꽃 위의 이슬이라는 찬송입니다.
442장 1절만 같이 불러보겠습니다.
“저 장미꽃 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2) 친구는 일을 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왜 다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일을 하기 위해서 다닙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다닙니까?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동행입니까?
물론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하며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교회에 일을 하기 위해서만 다닌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종입니다. 종은 오직 일로만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못하면 그 종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일만을 하기 위해서 다닌다면 연세 드신 분들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나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오실 때 아무 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친구 삼아서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손잡고 동행하면 사시는 성도님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1.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2. 지나간 일들 내게 말씀하며 앞날에 될 일 내가 들을 때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 같네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 같네
3. 나는야 친구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다정하게 지내리
천지는 모두 없어진다 해도 우린 영원히 지내게 되리
천지는 모두 없어진다 해도 우린 영원히 지내게 되리
//친구란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관계가 아니라 동행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달려가다가 쓰러지고 넘어질 때 친구로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왜 쓰러졌느냐” 하지 않습니다. 목적지를 향해서 “왜 빨리 달려가지 않느냐” 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로서 우리가 힘들어 쓰러졌을 때 가만히 다가와서 “너 많이 힘들지 어려웠지” 라고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힘내라”고 격려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종과 친구의 차이는 주인은 종에게 절대 주인의 뜻을 알리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명령할 뿐이지 자신의 비밀스러운 모든 이야기를 절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자신의 모든 비밀을 말하고 알리는 사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매일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내가 네 앞길을 인도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네 모든 삶을 내게 맡기라”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날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친구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너 많이 힘들었지, 그래서 네가 힘들 때 나도 함께 힘들었다. 이제 네 모든 일을 내려놓아라, 그리고 내 안에서 쉬어라,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길을 인도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그동안 저의 삶 가운데 일과 사역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삶의 안정감을 일과 사역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과 사역을 내려놓는 것이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알고 보니 제 삶 가운데 일과 사역이 우상이었습니다. 일과 사역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내려놓고 매일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주님과 서로 호흡하는 관계입니다. 호흡이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서로의 감정을 들숨과 날숨으로 서로 호흡하는 관계입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호흡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기도란 성도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숨을 못 쉬듯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래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라는 말은 오 할레스 비의 기도라는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기도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공기를 들이마시듯이 마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 공기를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공기를 들여 마실 때마다 이 공기를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고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이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이 공기를 예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고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이라고 속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란 예수님의 사랑의 공기를 날마다 들여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또 그것만 아닙니다. 나의 고통의 숨을 주님에게 내뿜어야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언제든지 주님께 찾아가 나의 어려움과 고통과 울분과 원한을 얼마든지 쏟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람에게 쏟아내면 원망과 불평이 됩니다. 나에게 쏟아내면 우울증이 됩니다. 사회에 쏟아내면 세상에 향한 끊임없는 증오자가 됩니다. 우리가 진정한 주님의 친구라면 주님의 사랑의 호흡을 마시며, 또한 나의 모든 감정을 쏟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로서 나를 사랑하시며, 나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날마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날마다 주님의 사랑을 호흡하며, 또한 나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주님께 내 품으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에는 나와 함께하지 않으시다가 특별한 체험이 있을 때만 함께 하신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도 예수님은 늘 나의 손을 잡고 계셨고, 늘 나와 함께 하셨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에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도 여러분의 손을 한 번 잡아보시기 바랍니다. 영으로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의 손으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나는 절대 너를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나는 네가 부족하고 연약하고 힘이 없어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야 너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네 앞 길을 인도하리라, 내가 너를 영화롭고 복되게 할 것이다. 너도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야 나는 너를 사랑하고 축복한다.”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날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의 친구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단순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내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 판에 세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말씀이 아닌 사탄의 말도 듣고 살아갑니다. 또 상처의 소리도 듣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가기 보는 사탄의 소리, 상처의 소리를 내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는 말씀을 듣지만, 사탄이 내게 하는 소리를 더 묵상하면서 살아갑니다.
“40살 된 방송작가 출신의 어떤 자매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언니만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릴 때부터 “너는 왜 언니보다 못하니, 너는 왜 태어났니, 넌 아무 쓸모없는 자식이야”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 아버지의 소리는 단순히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사탄의 소리입니다. 그래서 이 자매는 평생 그 말을 마음 판에 세기고 묵상하며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이 자매는 정말 좋은 자매인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별 수 없어 나는 죽어야 돼, 나는 결혼도 못 할거야” 라고 하면서 살아온 것입니다. 이 자매가 바로 교회 다닌 지 22달밖에 되지 않은 자매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가 열방대학에 와서 사탄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 믿은 지 20년 된 자매처럼 너무 아름답게 찬양을 하며 말씀을 듣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소리. 두 가지를 매일 듣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두 가지의 말 중에 어떤 말을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 판에 사탄의 소리, 거짓의 소리, 정죄의 소리, 비방의 소리, 낙심의 소리, 불신의 소리, 상처의 소리를 세기고 묵상하며 살아간다면 절대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북극에서 늑대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칼에다가 피를 조금 묻힌다고 합니다. 그러면 늑대가 와서 조금 묻은 피를 먹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피가 칼에 묻습니다. 이때 늑대는 자신의 피에 흥분에서 더 핥아 먹습니다. 그래서 결국 늑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피를 핥아먹다가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우리를 죽이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또 무엇을 묵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소리입니까?
오대원목사님은 “우리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묵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의 소리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실패의 경험들로 인해서 낙심의 소리만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신의 경험으로 인해서 평생 불신의 소리만을 묵상하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로서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이 뚜껑을 봉한 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에 사탄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거짓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상처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낙심의 소리, 불신의 소리가 들옵니다. 이때 이런 소리에 대해서 뚜껑을 봉한 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에 오직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라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도 이제 친구 관계입니다.
나는 목사인데, 장로인데, 아버지인데, 어떻게 감히 우리가 서로 친구란 말인가?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서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 사람에게 “우리는 서로 친구입니다” 라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서로 친구라면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도 이제 친구 관계입니다.
나는 목사인데, 장로인데, 아버지인데, 어떻게 감히 우리가 서로 친구란 말인가? 라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서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옆에 사람에게 “우리는 서로 친구입니다” 라고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서로 친구라면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합니까?
1)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서로 친구면 친구로서 목숨이라도 내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 삼기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성경에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의 친구 요나단입니다.
왕상18:1.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여기서 보시면 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러면 왜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같이 사랑했습니까?
그 이유는 다윗과 요나단의 마음이 같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같았다고 하는 것은 생각이 같았다는 말입니다.
/저도 몇십 년 동안 마음을 같이 하는 친구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과 떨어져 있어도 만나면 항상 생각이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같습니다. 또 성경을 보는 생각도 같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친구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어떻게 서로 친구 같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이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의 중심이 어떻게 되어야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경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마음의 중심이 사람 중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중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중심이 되기 위해서 오직 성경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목숨을 걸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서 오직 교회 중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 되어 서로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친구 같은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서로의 허물을 얼마든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관계, 그래도 깨어지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에서도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고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3장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서로 발을 씻겨주는 사랑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사랑은 서로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씻어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을 사는 가운데 우리의 발이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서로 씻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란 서로의 더러운 발을 얼마든지 내 밀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더러운 발을 내밀었을 때 나는 찾았네 라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공개하고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그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진정한 친구란 서로의 더러운 발을 내밀었을 때 그것은 감추고 씻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분노와 근심은 다르다고 했습니다. 만일 형제가 잘못했을 때 분노하면 그 사람은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는 형제가 잘못하면 근심합니다. 그리고 근심함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 진정한 친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수많은 사탄의 소리를 듣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는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와서 친구 같은 성도들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낙심하고 지쳐서 쓰러졌을 때, “너 왜 그러니 너 기도 안 해서 그렇구나”라고 충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너 많이 힘들었지 그래 이해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격려란 “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잘되게 하실 거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구로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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