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욥이라고 하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욥은 하루에 자식을 모두 잃어버리고,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심지어 욥은 그의 건강을 잃어버렸어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욥이 그런 고통 가운데서 정말 그 어떤 탄식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그 어떤 슬픔 가운데서도 전혀 슬퍼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인 욥기 3장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욥기 3장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서 욥이 하나님께 탄식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상황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욥3: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탄식을 욥만 아닙니다. 선지자 중에서 제일 위대한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너무 힘이 들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렘20: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여러분 우리는 항상 욥을 생각할 때 그 어떤 고난이 와도 전혀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은 욥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욥은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라고 합니다. 또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어찌하여 내가 내 세상에 태어나 고생과 슬픔을 보내는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욥과 예레미야의 탄식이 불신앙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이런 탄식조차도 하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탄식이 불신앙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 눈물과 슬픔가운데 있었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그 어떤 탄식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그 어떤 눈물도 흘리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슬프냐 그러면 마음 껏 슬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힘들면 힘들다로 말하라고 하십니다.
하리의 “충분히 슬퍼하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삶을 지탱해주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주변에 힘내라는 말이 크게 위로가 되지 않았고, 슬픔을 극복하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슬프고 힘든데, 주변에서는 무조건 슬퍼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모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애써 잊으려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슬퍼하고 나니, 비로소 내 상처와 마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 상처를 마주하고 나니 타인의 슬픔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상처의 크고 작음은 없으며 모든 상처는 다 아프다. 바닷가의 깨진 유리 조각이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마모되어 둥글둥글한 바다 유리가 되는 것처럼 나도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엔 하루하루가 그냥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세상에 무엇 하나 당연한 건 없으며 사소한 순간조차도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제 현재를 살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 살자. 내 옆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자. 지금, 이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이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그만 잊으라는 말 대신에 충분히 슬퍼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슬픔을 잊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슬퍼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충분히 슬퍼하다 보면 비로소 다른 사람들의 슬픔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다 깨어진 유리처럼 상처가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깨진 조각들이 마모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상처도 둥글 둥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무조건 슬퍼하지 마라 괴로워하지 말라, 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여러분 우리가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구 앞에서 울어야합니까? 누구 앞에서 슬퍼해야 합니까? 누구 앞에서 탄식해야 합니까? 자신 안에서만 울면 우울증이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만 울면 단순한 원망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울면 그것이 기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편들을 보면 이런 탄식의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3편을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탄식이 나옵니다.
1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우리도 고통가운데서 기도할 때 이런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탄식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언제까지입니까? 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탄식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불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신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이라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간구의 자리로 나갑니다.
사실 우리가 탄식의 자리에서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언제까지입니까? 라고 하는 탄식만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탄식의 단계에서 기도와 간구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3절과 4절에 나옵니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여기서 다윗이 눈을 밝혀달라고 하는 것은 또 단순히 육신의 건강만이 아닙니다. 영안의 눈을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영안의 눈을 밝혀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다윗이 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얼굴을 숨기신 것처럼 느껴졌습니까? 또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신 것처럼 느껴졌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얼굴을 숨기신 것이 아니라, 다윗의 영안의 눈이 어두워서 마치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나의 육신의 눈과 영안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슬픔이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믿음과 찬양의 단계가 있습니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내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렇게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고통에서 구원 해 주실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그래서 여러분 어렵고 힘든 일이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충분히 슬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욥이 이렇게 어찌하여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라고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욥은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계속해서 “어찌하여 어찌하여” 라고 하다가 이제는 “거기서는 거기서는” 이라고 합니다. 거기가 어디겠습니까?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욥이 이렇게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욥은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세에 대한 분명히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슬픔이 있지만 거기서는 진정한 쉼이 있고 안식이 있다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성지순례에서 많은 목사님들이 제일 은혜를 받았던 장소가 느보산입니다(사진).
느보산에 보면 그동안 지나왔던 황폐한 광야가 다 보입니다. 그런데 또 느보산에서 보면 저 가나안 땅에 다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이쪽에는 완전히 황토 빛 광야인데, 저 쪽에는 푸른 땅이 보입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가 120살인데 그의 눈이 전혀 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저 가나안 땅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얼마나 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바라보기만 하시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모세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반석을 세게 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모세의 사명은 여기까지 끝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가나안 땅에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심지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고난과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족히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왜 우리가 마음껏 슬퍼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에게 슬픔은 하나님께로 더 가깝게 나갈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슬픔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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