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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창세기

창세기강해(49)창38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창38:1-11)

by 금빛돌 2022. 8. 4.

여러분 혹시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데, 교회에 안나가는 성도를 가나안 성도라고 합니다.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 하면 교회를 다니다가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실망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8:1.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여기서 보시면 그 후에 유다가라고 합니다. 앞에서 형제들은 동생인 요셉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창3726절과 27절에서 유다가 어떻게 말합니까? 우리가 동생을 죽이면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이 되겠느냐, 그에게 손을 대지 말고 팔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던 야곱은 어떠했습니까? 3734절과 35절을 보면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요셉을 위하여 애통합니다. 그리고 너무 슬퍼서 아들과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오늘 본문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 부터 떠났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내려가서라는 말은 지리적으로 내려간다는 말이 아니라 신앙적으로 내려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와 가까이합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 족인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합니다.

유다가 왜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겠습니까? 왜 그의 신앙이 내려갔겠습니까? 왜 하나님께 가까이 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과 가까이 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유다는 모두가 보기 싫었습니다. 동생 디나가 세겜에서 강간을 당했을 때 아버지 야곱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동생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이는 잔인한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장자인 르우벤이 아버지 야곱의 첩을 범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창37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만 사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생 요셉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서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또 이런 모습이 미워서 형제들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러면 유다 자신은 괜찮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 자신도 형제들과 함께 동생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모두가 보기 싫었습니다. 아버지도 형제들도 동생들도 모두 실망입니다. 또 자신도 실망스럽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신앙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이때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과연 교회인가?”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보다 믿지 않는 친구가 더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친구 히라와 가까이 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어떻게 됩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킬 때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삭도 야곱에게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는 결혼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그 어떤 고민도 없이 믿지 않는 가나안 사람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합니다.

분명히 유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이삭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믿지 않는 가나안여인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신앙적인 반항입니다. 유다는 할아버지 이삭이 믿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않겠어라고 하는 마음으로 믿지 않은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리고 4절과 5절에 보면 둘째 아들 오난과 셋째 아들 셀라를 낳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6.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다말을 데리고 옵니다. 그런데 7절을 보시면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8절을 보시면 유다가 둘째 아들인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형을 위하여 자손이 있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고대근동 당시에 있었던 형사취수법(兄死娶嫂法)에 근거한 것입니다. 형사취수법이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취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55절에서도 25:5.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렇게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 하는데, 그 자녀는 아니라 형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니까 9절에서 오난은 형수에게서 낳은 자녀가 자기의 자녀가 되지 않을 줄 알아서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보시면 그 일이 여호와보시기에 악하므로 하나님께서 둘째 오난도 죽이십니다. 그러면 이제 셋째 아들과 결혼을 해야 하는데, 셋째 아들이 나이가 어립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얼마 후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위로를 받은 후에 또 누구를 만납니까? 믿지 않는 친구인 히라를 만납니다.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양털 깎는 자에게 이릅니다.

그때 13절을 보시면 어떤 사람이 며느리 다말에게 네 시아버지가 자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때 며느리 다말이 창녀로 분장을 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들이 죽으면 형제들이 아니면 시아버지를 통해서도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대를 잇기 위해서 창녀로 분장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그가(다말이)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들 때문에 실망한 유다가 믿지 않는 친구 히라를 따라가다가 처음에는 믿지 않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죽지 나중에 창녀를 찾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유다는 며느리 다말이 창녀인줄 알고 그에게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담보물을 줍니다. 그리고 유다가 다말에게로 들어가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3달이 지나서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래서 24절을 보시면.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였으니 당장 불태워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25절에서 다말이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어떻게 합니까?

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지금까지는 유다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유다의 위대성을 발견합니다. 유다의 위대성이 무엇입니까? 그가 그 어떤 죄를 짓지 않고 정결하게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유다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 여자를 불태워 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나보다 옳도다 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37장 야곱의 족보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에 요셉이 애굽의 친위 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391절에서 요셉을 보디발이 샀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흐름상 창38장은 없어도 되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창38장은 우리가 보지 않고 넘어가야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어떤 말씀도 우리에게 필요 없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면 창38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 동안 무엇 때문에 기뻐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우울해 하셨습니까? 대부분 사람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다가 또 사람들 때문에 우울해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사람들 때문에 기뻐하다가도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을 더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2:22. 너희는 인생(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을 믿고 의지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서 실망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실망 때문에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질 수 있습니다. 또 유다와 같이 죄악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시 교회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셨습니까? 그것 때문에 상처가 있으십니까? 심지어 그것이 한이 되십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일본문화와 한국문화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일본문화는 ()의 문화이고 한국문화는 ()의 문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 상처를 받으면 ()을 가지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칼로 죽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내적인 상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공동체를 통해서 상처를 받으면 ()을 가집니다. () 이란 아픔이 있어도 그것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고 안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병이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그 한을 종교와 예술로 승화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그 한 때문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 그 한이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됩니다. 영화 서편제에서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면 예술적인 소리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문화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도 우리 안에 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한을 예술로 승화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도 유다처럼 믿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을 수 있고 한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절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에게 대한 상처와 한이 도리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내 고통이 쉴 자리는 찾지 못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고통과 상처가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 왜 우리가 상처가 있어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 있는 그 상처가 우리의 신앙을 더 성숙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사람들을 떠나서 수도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사람들 속에 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 때문에 더 성숙해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같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받은 그 상처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 가지 마시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시기 바랍니다. 한나와 같이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기도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찬양으로 승화시키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상처들을 통해서 더 놀랍게 역사 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칼빈은 믿음의 공동체의 연약함과 부족함은 우리로 그 공동체를 부정하거나 떠날 조건을 제공하지 않고, 그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교회를 다닙니까? 이 땅의 교회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에게 연약함이 보입니까? 부족함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그 부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더 사랑하고 헌신할 조건과 기회로 삼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사람이 실망스러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에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여기서 보시면 야곱의 아들가운데 가운데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대표가 됩니까?

여기서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고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지파가운데서 다윗 왕이 나옵니다. 또 유다의 지파 가운데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을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유대인은 유다지파 사람들입니다. 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372절에서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다가 창38장에서 왜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까? 그 이유는 유다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의 대표인 유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가 창녀인 줄 알고 그와 관계를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선택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우리의 본질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자기가 살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그런 인간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간사하고 속이기를 잘하고 그런 인간입니다. 또 우리는 유다처럼 세상의 풍조에 휘말려 얼마든지 범죄 할 수 있는 그런 인간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우리들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닌 인간들이며 연약하고 부족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절대 우리의 잘남이나, 똑똑함이나 거룩함이 아니라--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함이나 감격함이 없는 줄 아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 되었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인가를 극렬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십니까? 일 때문에 봉사 때문에 습관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그랬듯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나가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도 하나님을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의롭고 똑똑하고 바르게 살았다 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이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더러운 시궁창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갑니다.

실재로는 내 더러운 오물이 점점 없어져 갑니다. 그러나 그 밝은 빛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실재로는 내가 더 깨끗한 사람이지만그 하나님의 밝은 불빛아래서 내가 느낄 때에는 오히려 더 더럽운 사람으로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의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얼마나 주님 앞에서 죄인인가.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보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에는 내가 잘나서 괜찮아서 또 너무도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내 죄를 보게 되니-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사랑하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에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오주님 어떻게 이런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주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다음날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더 풍성히 누리고 깨달아 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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