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장은 요셉이 감옥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요셉이 감옥에서 아주 편안하게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편 105편을 보시면 요셉이 감옥에서 “시105:18.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라고 합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그 발이 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39장에 보면. “창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3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하나님께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형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가운데서 아무 어려운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입니까? 형통이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그 어떤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꿈을 반드시 이루어 가심이 형통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는데, 여전히 요셉은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발이 차꼬에 그의 몸은 쇠사슬에 메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감옥 속에서도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창39:21). 그래서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감옥의 제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창39:22). 심지어 간수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습니다(창39:23).
/만일 시편에 기록된 대로 요셉이 감옥에서 발이 착고에 몸이 사슬에만 묶여 있었다고 하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감옥 속에서 술 맡은 관원을 만날 수도 없고, 또 그의 꿈을 풀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감옥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감옥 속에서 요셉에게 살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옥 속에서도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아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가 384장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고 합니다. 거기서 말씀하고 있는 만사형통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아무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도 어려운 일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하다가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형통입니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일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심입니다. 그래서 그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심이 형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슨 일을 만나든지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반드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반드시 이루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마시고, 감옥과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감옥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까?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그 후에란 요셉이 감옥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게 하신 후에 라는 말입니다. 마침 그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애굽 왕에게 범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는 왕의 최측근입니다. 당시 왕을 술과 음식으로 독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은 애굽 왕이 제일 신임하는 관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관원장에게 애굽 왕 바로가 노합니다(2). 그리고 바로가 친위 대장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보냅니다(3).
바로가 궁중의 죄수들을 궁중 감옥에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디발의 집에 있는 감옥에 보냅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두 관원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서 바로가 두 관원을 요셉이 있는 감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또 이때가 요셉이 감옥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게 한 후이기 때문에 요셉은 이 두 관원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친위 대장인 보디발이 요셉에게 두 관원을 수종 들게 했습니다(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요셉에 대한 보디발의 오해가 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을 섬겼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섬겼다고 하는 것은 그냥 섬긴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섬긴 것을 말합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죄수를 진심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리고 5절과 6절을 보시면 옥에 갇힌 두 관원이 꿈을 꾸었는데 그 꿈 때문에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습니다. 만일 요셉이 진심을 다해서 섬기지 않았다면 그들의 얼굴이 어떤지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두 관원의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남을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빛이 어떤 지, 근심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두 관원에게 왜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지 묻습니다(7). 그러니까 두 관원들은 꿈을 꾸었지만 풀어주는 사람이 없도다고 합니다(8).
이에 대해서 요셉이 어떻게 대답을 합니까? 8.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이것은 요셉이 내가 이것을 해석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모든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깨닫게 하시면 내가 알려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요셉은 두 관원의 꿈을 풀어줍니다. 그리고 술맡은 관원은 술술 잘 풀려서 감옥에서 나갑니다. 이때 요셉에 술맡은 관원에게 14절에 “창40:14.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고 합니다. 그런데 23절에 “창40:23.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2년 후에 술맡은 관원이 요셉을 기억하여 요셉이 감옥에서 나갑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올 때 나이가 17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2-3년 있었다고 하면 감옥에서 10년 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는데 왜 요셉으로 감옥에 있게 하셨습니까? 왜 한두 해도 아니라 요셉으로 10년 동안 감옥에 있게 하셨습니까? 더욱이 마지막 2년 동안 요셉은 그가 꿈을 풀어주었던 술 관원장에게도 잊혀지는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까? 이것은 오늘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왜 지금 나의 삶이 풀리지 않습니까? 왜 내게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지금 내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 내가 감옥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합니까? 라고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데, 왜 감옥에 있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십니까?
첫째, 감옥에서 말씀으로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편 105편에 보면 “시105: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요셉)를 단련하였도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기근이 들것을 미리 아시고 요셉은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애굽에 종으로 팔렸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요셉이 감옥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감옥에 있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요셉을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단련하다는 것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단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감옥에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신앙이 정금과 같은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요셉만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다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순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도 필요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감옥과 같은 곳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인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그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다 제거하여 버리십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감옥에서 오직 하나님만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십니다.
또 우리 안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셉에게 2년의 시간을 혼자 보내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아직 요셉에게 사람을 의지하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14).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시는 것은 아직 우리 안에 사람을 의지하는 것들을 다 제거하시기 위함입니다.
또 여기서 단련하였다고 하는 것은 더 단단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왜 우리를 감옥과 같은 곳에 있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단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신앙의 불순물들을 다 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욱더 단단하게 하기 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안에 있는 신앙의 불순물들이 다 제거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응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응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왜 하나님께서 요셉을 감옥에 있게 하셨습니까?
둘째, 감옥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감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하필이면 요셉이 감옥의 사무장이 된 후에 두 관원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있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필이면 두 관원이 간 감옥이 요셉이 있는 감옥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필이면 그때 보디발의 마음이 풀려서 요셉으로 두 관원을 섬기게 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필이면 두 관원이 꿈을 꾸게 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하필이면 바로의 생일이 되어 술 관원이 풀려나가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을 2년 동안 잊게 하십니까? 만일 그때 술 관원이 요셉을 기억해서 요셉이 감옥에서 나갔다면 2년 후에 요셉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감옥에서의 삶은 화려한 삶이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셉이 삶 가운데서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요셉이 총리가 되는 순간만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이 아닙니다. 요셉의 인생의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요셉의 삶도 꽃봉오리와 같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으지도 모르는데...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정현종 (1939∼ )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최고의 순간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옛날 과거에 잘 나갈 때였습니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최고의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꽃봉오리와 같은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게 보여도 다 노다지와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옆에 있는 모든 분들이 다 아름다운 꽃과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꽃보다 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현종씨의 시에서 꽃을 사람으로 바꾸어보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젊어서는 무심히 지나치던 사람들을 이제는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손톱만큼 작은 사람도, 색색이 화려한 사람도, 모두 저마다 아름답고 귀하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도 꽃봉오리인 것을...잘 지켜낼 수 있기를, 그래서 마침내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있기를...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당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요셉과 같이 감옥과 같은 곳이 있습니까? 그곳에서도 하나님께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요셉과 같이 내게 주신 사람들을 더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더 열심히 말을 거시기 바랍니다.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요셉에게 하나님께로 올라갈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서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추락하는 것도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32장에 보면 “신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독수리가 새끼를 돌보는 것과 같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어떻게 돌봅니까? 먼저 새끼 둥지위에 가시 같은 것을 넣습니다. 그래서 그 가시 때문에 둥지에서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저 높은 둥지위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독수리가 날게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독수리새끼는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독수리는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리며 그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리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새끼가 위협에 처해있을 때 그 위에서 너풀거리던 독수리는 그를 날개로 업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은 독수리 새끼로 말하면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지금 요셉은 둥지에서 나와서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독수리 새끼와 같습니다.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우리가 만일 독수리 새끼와 같이 날개 짓을 해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면 어떤 하나님을 묵상해야합니까? 지금 내 인생이 둥지를 떠난 독수리 새끼처럼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마치 독수리와 같이 예리한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날개로 내 위를 너풀거리며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묵상해야합니다.
--우리도 인생이 계속해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 과연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 가야합니까? 아무리 내가 날개 짓을 해도 날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과연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언제 나를 업어서 올리시렵니까? 라고 할 떄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큰 위로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또 지켜보고 계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위에서 주님의 날개로 너풀거리며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우리를 당신의 날개로 업어서 들어 올려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감옥에서의 요셉처럼 여러분의 인생이 지금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려가더라도 끊임없이 날개 짓을 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려가고 있는 여러분들을 독수리가 새끼를 돌봄같이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날개로 여러분들 위에 너풀거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이 독수리 새끼가 독수리 등에 업혀서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다루시는 방식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독수리 등에서 업혀서만 살아간다면---우리는 전혀 날개 짓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시도 주십니다. 그래서 그 가시 때문에 내 육신의 보금자리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또 어린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날개 짓을 하게 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밑으로 내려가게 하십니다. 그때도 절대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내려가고 있는 순간에도 주님의 날개가 내 삶의 그늘이 되어주십니다. 주님의 날개가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정말 바닥을 치려고 하는 순간--도무지 내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으로 그 어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으로 나를 안아주시고 받아주셔서 나를 들어서 올려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추락하는 가운데 떨어질 때 주님의 날개로 우리를 지켜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계12장에 보면 “계12:14.그 여자(교회)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사탄)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이 말씀 앞에 보면 사탄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의 전쟁에서 패하여 땅으로 쫓깁니다. 그리고 사탄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합니다(계12:13).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바라보는 광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날아 올라가게 하십니디.
세상 사람들은 추락해도 날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추락해도 날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가게 하십니다.
이사야서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사40:31).
오늘도 지금 여러분들은 인생의 감옥에서 무엇을 바라보기로 작정하시고 선택하시겠습니까? 감옥입니까? 아니면 그 속 계시는 하나님입니까? 오늘도 요셉처럼 내 인생이 감옥과 같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날개로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 올라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힘을 받으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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