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에 나타난 7교회가 지금은 다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외부의 박해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내부에 있는 문제들을 잘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교회 내부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의 경우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의 경우에는 교회가 세속화되는 것입니다.
사데교회의 경우에는 교회가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하고, 이름만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에는 예수를 믿고 있지만--예수님을 마음의 문밖에 세워놓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그 어떤 외부의 핍박과 박해보다 더 무서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를 하더라도 교회가 늘 뜨거운 처음사랑을 가지고 있고—또 교회가 분명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고, 또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늘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외부의 그 어떤 핍박과 박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적은 예수님께서 다 물리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초대교회가 외부적인 박해를 받을 때 예수님을 일곱 금 촛대인 교회 사이를 다니셨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외부적인 박해를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인 교회 사이는 다니신 이유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내부적인 문제들을 감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교회의 외부적인 적들과 싸우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계 4장부터의 22장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의 외부적인 적들에 대해서는 싸우셔서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의 내부적인 문제들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외부적인 어려움이 있어도 내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면 사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외부적인 시험이 있는 가운데서 내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으면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가 외부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먼저 교회 내부를 불꽃과 같은 눈으로 감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인해 교회 외부에서 오는 시험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서 다 물리쳐주십니다. 문제는 교회 내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살펴 보아야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간에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에베소교회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올해의 표어가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입니다. 올해 우리가 단순한 구호만 아니라 진정으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코로나로 인해서 외부로부터 그 어떤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처음 사랑을 회복함으로 이 모든 어려움들을 능히 이겨나 갈 수 있는 동부제일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먼저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였습니까?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에베소교회는 주님께 대한 행위과 수고가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말로만 주님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구체적인 행위로서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에베소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고, 또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잘 분별하여 그들의 거짓된 것을 잘 드러내는 교회였습니다.
특별히 이 에베소교회는 교회 외부의 핍박과 박해에 대해서 인내하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2절에도 보면 네 인내라고 하고 있고, 3절에도 네가 참고(인내를 뜻함)또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라고 하는데 이것도 인내를 뜻합니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교회 외부에서 믿음에 대해서 어떤 시험을 주어도 그것에 넘어가지 않고 잘 인내하면 믿음을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또 그런 가운데서도 에베소교회는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사랑)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는 열심도 있었고, 진리에 대한 분별도 있었고, 그 어떤 핍박 중에서도 믿음을 잘 지키는 교회였지만, 주님께 대한 처음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외부의 핍박과 박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내부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에베소교회의 최대의 문제였습니다.
이 에베소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옳긴다”는 말은 원어로 “키네소”인데, 성경의 학자들은 이 말을 단순히 옮긴다는 뜻보다 “제거해 버린다. ”는 뜻으로 에베소교회를 역사가운데 없애버린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또 촛대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촛대를 옮긴다는 뜻은 더 이상 주님께서 이 교회가운데 함께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만일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하지 않은 교회라면 그 어떤 교회의 역사도, 건물도, 전통도, 많은 사람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께 대한 처음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알아야합니다. 또 무엇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는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먼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1)주님께 대한 처음사랑이란 구원의 은혜로 인해서 감사하고 감격하는 사랑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은 인생 가운데서 단 한번이라도 구원의 은혜에 인해서 감사하고 감격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무리 모태신앙이라 하더라도 인생에서 한번 즘은 구원의 은혜로 인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가운데서 내가 한번이라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해보지 않았다면, 내가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구원받은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 한때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었는데, 여러분들은 지금 얼마나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감격하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구원에 대한 은혜와 감격이 식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 할수록 우리가 “내가 잘 났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절대 “나는 잘 났다”고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참 신앙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내가 얼마나 부족한 가를 철저히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만큼 나를 향하신 그 주님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의롭다고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 전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또 많이 성경을 알고, 또 많이 봉사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 말씀이 무엇인지, 봉사가 무엇이지를 바르게 알아야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다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내가 죄인인가를 알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성경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알면 알수록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깨닫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 나는 어리석고 못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까? 날마다 더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갈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더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저는 그 찬송을 부르시는 것을 보면 정말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감으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음으로 나를 향하신 그 주님의 구원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날마다 더 알아갈 수 있는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란 주님을 첫 번째로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물어보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난 다음부터 지금까지 매일 주님께서 저에게 이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내가 정말로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예전에 간사를 할 때 학생들에게 훈련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항상 이 질문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질문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라고 질문을 합니다. 얼마 전에도 어느 교회 임직식에서도 이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왜 예수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 물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예수님께서 아가페의 사랑 즉 신적인 사랑으로 두 번 물으셨는데, 베드로가 필레오의 사랑 즉 우정으로서의 사랑으로 대답을 해서 세 번째 예수님께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으신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아가페의 사랑으로도 말씀을 하고 있고, 필레오의 사랑으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물어보셨습니까?
첫 번째, 제자들에게 물으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정답을 묻는 질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 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에 “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했을 때 단순히 정답을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묻고 계십니다.
두 번째는 우리는 보통 내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대답을 합니다.
학생들에게 이것을 한 사람 한 사람 물어보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의 그 모든 부귀영화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학생들이 이렇게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학생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은 그들이 없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하면 이제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네 애인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이 조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또 그러면 너의 진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쉽게 대답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다 되는데, 주님 이것만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고 하는 것을 가지고 묻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지금 여러분들이 정말 내려놓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감추어 놓은 1프로 무엇입니까? 내 삶 가운데 이것은 되는데 이것만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삶 가운데 그가 내려놓기 힘든 1프로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감추어 놓은 1프로는 이삭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주님께 줄 수 있어도 이삭만큼은 절대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내가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금도 물어보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우리는 보통 어제의 것을 가지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 합니다. 어제 내가 이것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을 때 예수님은 현재형으로 묻고 계십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항상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주님 이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고 했더라도 오늘 또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물으십니다. 그래서 저는 20대부터 지금까지 매일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실한 고백을 원하십니다. 쉽게 말해 그 대답이 진짜냐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 물으시는 것은 단순히 세 번이 아닙니다. 그 대답이 진짜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위해서 세 번만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이 나올 때 까지 예수님은 천번 만번 물으시고 계십니다.
이제 정말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정말입니까?
여러분의 삶의 1프로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진실로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순하게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던지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시고 난 다음에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네 목숨을 바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다음에 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우리에게 돌보라고 주신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하신 후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양은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배가 아파합니다. 왜 그 사람이 나보다 돈이 더 많은가? 왜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가?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한다면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우리가 돌보아야할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두 번째 양은 우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을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그를 이겨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한다면 우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돌보아야할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또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보다 조금 못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금방 그 사람을 무시합니다. 특히 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았을 때 조금 못하게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금방 차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면 우리 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우리가 돌보아야할 양으로 보여야합니다.
/우리가 정말 이 세상의 모든 것보다 주님을 제일로 사랑한다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이 우리에게 돌보라고 주신 양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교회에 있는 모든 분들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단순히 나보다 더 나아보이는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습니까?
단순히 내가 경쟁하고 이겨야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습니까?
혹 내가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정말로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신다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분들을 주님이 내게 돌보라고 주신 양으로 보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성도간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이 한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은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마이클 브라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주님과의 가슴 설레이는 관계가 없이도 기독교적 열정과 봉사라는 모든 외면적인 덫에 걸려들 수 있다”.
또 신약 신학자인 로버트 마운스는 "에베소 교인들은 이단에 대처하고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다보니 하나님과 형제와의 신선한 사랑의 불이 흐려지게 되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일중심입니까? 아니면 관계중심입니까? 우리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가질 때는 일 중심이 아닙니다. 관계중심입니다. 내가 하는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과의 관계보다 일이 더 앞서게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을 드리는 것보다 교회 일이 더 앞섭니다. 사실 교회 일을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도 가능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공허한 마음을 체우기 위해서 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열심히 교회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교회 일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은밀한 사랑의 관계에서 흘러나와야합니다(주님께 대한 사랑이 넘쳐서 일이 되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는 모든 교회 일들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일이 되지못하면--항상 그 일들은 소리가 납니다. 보상심리로 일을 하게 됩니다.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느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랑에서 나오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회를 억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새벽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열 번). 그러면 잠도 이길 수 있고, 추위도 이길 수 있고 육신의 연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기도할 수 있습니다.
5)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란 단순히 머리가 아니라(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원래부터 아주 지성적인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사람은 아볼로였습니다. 그는 아주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교회는 이단을 잘 분별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머리로는 주님을 알았지만 가슴이 약했습니다. 우리가 호세아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지식이 없는 신앙도 문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의 신앙이 너무 지식적으로만 흘러도 문제가 됩니다.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란 단순히 머리로만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내 마음의 주님으로 모셔야합니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해야합니다. 그 사랑이 날마다 새롭고 새로워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얼마나 주님과의 황홀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까?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주께 내 맘 드린 후에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6)또 주님께 대한 사랑이란 순수한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이란 흥정의 사랑이나 보상의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무조건 사랑하신 것처럼 순수하게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오래되면 내가 주님위해 일을 했는데 , 주님은 왜 내게 더 많은 것을 주지 않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처음 사랑이란 주님이 당신을 무엇을 해줄 것이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당신이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께 대한 이런 처음 순수한 사랑을 회복해야합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 순수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까?
1)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첫 징후는 말씀을 향한 열정이 식어 가는 것입니다.
2)또 사람들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기도의 실족에서 시작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마귀가 주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기 위해 당신을 분주하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주님 외에 다른 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모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하였습니까? 우리가 만일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주님의 무서운 경고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1)무엇보다 말씀에 집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연애편지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1189장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요약하고 요약하면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만 사랑한다, 나는 너를 제일로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연애 편지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말씀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주일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아니면 말씀공부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 할 수 있습니다.
2)기도와 찬양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주님께 대한 잃어버렸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중학교 때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대학3학년 때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니까 신학공부하기 싫었습니다. 모든 예배를 다 빼먹었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 때는 공부도 하지 않고 완전히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3학년 때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 하루에 8시간 1년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밤새도록 불렀던 찬양이 “490장 귀하신 주여 날 붙으사” 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동안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도회 기간 동안 무엇보다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3)또 우리가 주님을 증거 하면서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단순한 교회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전도를 통해서 주님께 대한 처음사랑을 회복하시고, 나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약성경연구 > 요한계시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아디라교회(계2:18-29) (0) | 2021.05.21 |
---|---|
버가모교회(계2:12-17) (0) | 2021.05.07 |
요한계시록강해(37)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22:6-7) (0) | 2018.08.18 |
요한계시록강해(36)그의 얼굴을 볼 것이요(계22:1-5) (0) | 2018.08.04 |
요한계시록강해(35)다시 저주가 없으며(계22:1-3) (0) | 2018.07.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