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을 가지고 세 번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환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라고 합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서울에 있는 한강과 같은 생명수강이 흐른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수의 강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시는 성령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성령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수의 강처럼 흐르는 곳입니다. 이 성령하나님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성령하나님이 흘러나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시지도 않으며 나오시지도 않으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여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여 계시는 것도 우리의 의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때문에 성령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여 계십니다. “롬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영(성령)은 의(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더 이상 죄가 있는 육신에 거하실수 없습니다. 그래서 “창6: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죄를 짓는) 육신이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우리 안에 성령하나님이 거하여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과 신앙고백서을 보면 성령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게서 지금도 나오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지금도 성령하나님은 보좌에 계시는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찬송가에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성령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데, 어떻게 성령이 또 우리에게 다시 강림하실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또 성령하나님은 지금도 보좌에 계시는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 새 하늘과 새 땅은 성령하나님이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강같이 흘러 넘치게 나오시는 곳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다 성령의 충만하심과 성령의 열매가운데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현재 우리 가운데 임하여진 천국도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만 아니라 지금도 보좌에 계신 성부하나님과 성자예수님에게서 성령하나님이 생명수의 강처럼 우리 가운데로 흘러나오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히 2절을 보시면 2절은 미래의 천국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운데 임하여진 천국을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면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길이라는 것도 실제 새 하늘과 새 땅 한 가운데 길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91편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길을 가다가)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고 합니다. 여기서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신다는 말씀이 실제 눈에 보이는 길을 의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한다는 말씀도 실재 우리가 길을 가는데,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얼마 전에 어떤 권사님도 길을 가시다가 발이 돌에 부딪혀 넘어지신 일이 있습니다.
시편 91편의 이 말씀을 실제 우리가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는다고 해석한 자가 누구였습니까?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이 어떻게 말했습니까?
“마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시편 91편에)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2절에 길이란 실제 천국에 길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걸어가는 모든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걸어가는 삶의 길 가운데로 지금도 무엇이 흐르고 있습니까? 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게서 나오시는 성령하나님이 지금도 흘러나오고 계십니다.
특별히 성령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떨 때 충만하게 역사하십니까?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길을 길 때 특별히 지치고 피곤하여 힘이 들 때입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입니다. 우리가운데 자녀를 갑자기 잃어버린 분이 계십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길에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 더 특별히 역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원수가 우리 눈앞에 있을 때 성령하나님은 내 잔이 넘치도록 역사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령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생명수의 강처럼 흐르고 계시는데, 그 생명수의 강가에 무엇이 있습니까?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에덴동산의 중앙에 무엇이 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통해서 공급을 받을 때 비로소 열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생수의 강의 공급을 받을 때 비로소 열두 가지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무조건 성령하나님만을 부르짖어도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또한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만 부르짖어도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성령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2절을 다시 보시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만국의 치료하는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성령의 열매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육신의 병이 낫고, 마음의 병이 낫고, 영혼의 병이 낫는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3절을 보겠습니다.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아직 하나님의 저주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 천국에는 왜 다시 저주가 없겠습니까?
첫째, 그 이유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을 모든 저주를 대신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왜 저 천국에는 다시 저주가 없다고 합니까?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왜 하필이면 어린양의 보좌입니까? 어린양은 우리의 죄를 대신 져 주신 예수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져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가정에 가계의 저주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또 저 천국에는 왜 다시 저주가 없겠습니까?
둘째, 저 천국에는 선악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선악과란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 인간이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노릇하려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또 선악과란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어서 인간의 기준을 가지고 서로 심판하고 저주하게 하는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왜 저 천국에서는 다시 저주가 없습니까? 저 천국에는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천국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주인노릇하지 않습니다. 저 천국에서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주인 되는 곳입니다. 또 저 천국에서는 선악간의 모든 심판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래서 저 천국에서는 인간이 절대 선악의 심판자가 아닙니다. 선악간의 모든 심판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맡기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 천국은 절대 서로에 대한 심판이 없습니다. 또 서로에 대한 저주가 없습니다. 저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오직 사랑만 있고, 축복만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저 천국을 누리며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 천국에서는 선악과가 없고,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는 여전히 선악과가 있고,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선악과는 내가 주인다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내가 심판자라고 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또 끊임없이 정죄하고 저주하는 사탄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고전4: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롬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은 하나님께 “우리가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저는 절대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고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적인 힘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는 날마다 선악과를 선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운데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흐르는 성령의 생수의 강물을 마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생수의 강을 충만히 마시며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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