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기드온이 죽고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기드온의 이름을 계속 여룹바알이라고 합니다. 여룹바알이란 바알과 더울어 싸우는 자란 뜻입니다. 기드온은 바알과 더불어 싸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4절에 보시면 바알의 신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습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바알과 싸우는 자가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 가까이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은 그의 아버지 기드온의 좋은 점을 본받지 않고, 나쁜 점은 더 부각시켰던 인물이었습니다.
1절에 보시면 외가인 세겜에 갑니다. 이것도 아주 정치적인 의도가 있습니다. 기드온은 그의 고향인 오브라에 에봇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의 관심은 당연히 오브라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겜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보통 정치인들은 항상 소외감을 느끼는 지역에 가서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아비멜렉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겜은 원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언약을 맺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사람들은 이 세겜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언약을 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겜은 그들의 언약과는 정반대로 바알우상을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이름대로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라고 합니다.
기도온의 아들 칠십명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나으냐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리는 것이 나의냐고 말한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칠십명이 너희를 다스려 혼란스럽게 살겠느냐 아니면 한 사람이 다스려 안정을 추구하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 명이 다스리는 것보다 자기 혼자서 다스리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와와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정치인들이 항상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인 것을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골육이라는 말은 뼈 중의 뼈요 살줄의 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자기 편 만들기 위해서 아주 친밀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3절을 보시면 “3.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형제들이 세겜의 모든 사람에게 그는 우리 형제라고 합니다. 요즘식으로 하면 “우리가 남이가, 우리가 고향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그를 우리 왕으로 삼자”라고 합니다.
또 4절을 보시면 “4.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라고 합니다.
바알브릿이란 바알과 언약을 맺다라는 말로 바알과 같은 말입니다. 아비멜렉은 바알의 신전에서 은칠십개를 받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자금입니다. 또 바알의 신전에서 돈을 받는다는 말은 이제 바알과 싸우지 않고 바알을 인정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그를 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5절에 “5.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은 그의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형제 70명을 한 바위에서 끔찍하게 죽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을 숨어서 살아남습니다.
결국 이 요담이 살아남아서 아비멜렉의 부당함을 나타내고, 아비멜렉을 저주하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유의해야할 이름이 요담이라는 이름입니다. 요담이란 뜻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건들을 통해서 과연 여호와 하나님은 완전하신 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자신의 모든 형제들을 죽이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바알과 더불어 싸운 아버지 밑에서 바알과 친한 아들이 나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왕이신 이스라엘에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는가? 또 무엇보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세겜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한 언약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런 상황가운데 하나님은 과연 여전히 완전하신 가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완전하신 하나님의 공의대로 아비멜렉은 스스로 머리가 되려고 하다가 한 여인의 멧돌에 머리가 깨어져 비참하게 죽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을 보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는가 과연 하나님은 완전하신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룹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순간적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ㄴ니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던 일들과는 정반대의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날 때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삶가운데서 도무지 이해할수 없는 일이 있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요담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행할 때 하나님은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의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이 모든 일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또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내 삶의 주인이자 왕으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모든 삶을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도록 기도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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