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이끄는 삶1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골1:16)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버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존재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단순히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존재라고만 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을 생략해야할 것입니다.
만일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성경에 죄에 대한 심판이나 심지어 지옥과 같은 이야기는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하나님께서 절대 우리들에게 고난이나 고통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한 존재이지 인간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골1장 16절에도 보면 “모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연히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도 오직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소원과 욕망을 이루기 위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에 대해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일이고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조차도 내 인생의 소원과 욕망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조차도 내 인생의 소원과 욕망을 위한 존재로 생각한다면--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또 만일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소원만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하고 믿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고 교회도 떠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또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려보겠습니다.
하나님을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더 풍성한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더 풍성한 삶을 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나를 위한 존재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을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나를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면 오히려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을 더 풍성히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나를 위해 주시고, 더 나와 함께 해주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창22장 앞부분 까지는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조차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오직 자신에게 복을 주시기 위한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창12장에서 가나안땅에 흉년이 드니까 가나안땅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나안땅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땅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간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세상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창 12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보다 오직 자신이 육신적인 복을 받는데 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로 속이면서까지 자신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까지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 자신에도 그렇게 큰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22장에 와서 아브라함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존재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여기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존재로만 생각했다면 절대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제 자신이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가?
여기서 1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창22: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가장 귀한 것도 드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드렸을 때--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아낌없는 복을 다시 약속해주십니다.
창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독자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창22:17절에서 아브라함을 위해서 큰 복을 약속하고, 아브라함의 자녀로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창22:17절에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18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네 씨는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의 가장 귀한 것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는 역사를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의 생애를 통해서도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궁에 평안히 거하게 되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삼하7:2절--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그때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11--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이제)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여기서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들여서 하나님이 거할 집을 지으려 하자---///이제 하나님께서 반대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이루게 하시고,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통해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물론 하나님 자신을 위한 말씀이지만, 그것이 또한 우리를 위한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이용해서 산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나를 위한 길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통해서 보았듯이--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될 때-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집을 세워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앞으로 40일 동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브라함과 다윗처럼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더 충만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DAY-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사야44:2)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하나님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주사위 놀이를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주사위를 던집니다. 그러면 어떤 번호가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우연에 의해서 번호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사위를 던져서 어떤 번호가 주어졌을 때, 그것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우연에 의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부모가 실수로 나를 태어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만일 인간이 주사위가 던져지듯 우연에 의해서 태어났다면 과연 그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그냥 우연의 의해서 태어났기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사야44:2)
또 메시지 성경에서는 “당신은 나의 내면과 외면 모두를 아십니다. 내 몸 속의 모든 골수 조직도 아십니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어떻게 무에서 유가 되었는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 (시편 139:15 msg)
또 사도행전에는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날 것과 우리가 거주할 곳까지 다 계획해 놓으셨다고 합니다(행17:26).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절대 우연이나 하나님의 실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수한 것조차도 넓게 보면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입니다.
릭 워렌의 책에 “부적절한 부모는 있어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살고 보니까 정말 잘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내가 잘못 선택해서 결혼해서 낳은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는 어떻게 됩니까? 비록 부모가 실수로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다고 하지만, 그 자녀는 절대 실수가 아닙니다.
그 자녀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되어 진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내가 이 가정에 있게 된 것, 내가 이 교회에 오게 된 것, 그 모든 것이 우연이나 나의 선택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되어진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13 “너희가운데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가운데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되어 진 일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첫째, 내 삶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너무 걱정하며 근심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대한 걱정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어떤 염려가 있습니까? 걱정이 있습니다. 내가 우연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태어났고, 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지금까지 왔다고 믿는다면 그 어떤 것도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가 우연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가운데 태어난 존재라고 믿는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는 삷 입니다. 내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과 계획으로 나를 부르셨는지 알고 깨닫는 삶이 필요합니다. 이번 특새를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가는 시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가운데 태어나게 하셨음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 뜻을 이루어가고 있음을 믿어야할 것입니다(빌2:13)
요셉이 감옥에서 죄수로 있으면서도 왜 거기서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도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꾸게 하신 꿈을 통해서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어떤 것도 우연이 없습니다. 내 모든 삶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음을 믿음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3일. 삶의 원동력<전 4:4>
전4: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나는 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여 성공하고자 하는 동기가 자기 이웃에 대한 시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전4:4 현대인의성경)
요즘 언론에서는 개그맨 정형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가 심리적인 부담 때문에 모든 방송을 하차하고 난 다음에 이제 일 년이 지나서 복귀하는데, 다른 방송에는 다 복귀를 하는데 무한도전이라는 프로에는 복귀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러면 그동안 몸이 좋지 않다고 하는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닌가? 하면서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가 그 만큼 그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기에 이해가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끌려서 살아갑니다. 개그맨 정형돈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에 대한 중압감이 그의 삶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삶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것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의 원동력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1. 많은 사람들은 죄의식에 끌려 다닙니다.
여기서 죄의식이란 과거의 죄와 실수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아 내가 과거에 잘못한 것이 있구나 그것은 실수였구나”고 생각이 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런 과거의 죄와 실수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세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도 과거 40살 때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지었습니다. 또 베드로도 수님을 배반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만일 모세가 베드로가 이런 과거에 실수나 죄의식에 메여서 살았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의 실수 때문에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못 한다 고 했던 모세를 일으키셔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사랑의 눈으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혹 내가 과거에 실수하거나 죄를 지은 것이 있다면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니 다시는 그런 죄를 (실수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2. 많은 사람들은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를 씹으며 살아갑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가 삶의 원동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원한과 분노의 쓴 뿌리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상처를 받으면 분노합니다. 그리고 분노는 두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 한 가지는 속으로 가만히 참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우울 낙담 자포자기 그리고 마지막 극단은 자살입니다. 또 한 가지는 상처 입은 분노의 감정을 외부적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가 상대방에게 또 상처를 주고, 공격을 하다가 마지막 극단은 그를 죽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받았던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상대방을 죽이게 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입니까?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서 교훈만 얻고, 성처는 용서를 통해서 잊어버립시다”. 원한과 분노, 이런 것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3.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그들이 들어간 가나안땅을 앞에 두고 미래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있으니까 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조차도 믿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광야로 돌아가서 38년 동안 방황하는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이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 있습니까?
첫째, 아버지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신명기 1장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모세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도 여러분들을 위해 싸워주시고, 또 여러분들의 앞길에 여러분들보다 먼저 가셔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살 곳을 예비하시고,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어머니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아버지와 같으신 하나님의 등에 업히시고, 어머니와 같으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며 이기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물질에 이끌려서 살아갑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하나님조차 나와 함께 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물질이 우상이 되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물질이 원동력입니까? 하나님이 원동력입니까?
오직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간다.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공으로 이끄는 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의견에 통제받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놓치게 만드는 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무엇이 되어야겠습니까?
하나님께 받는 사랑과 사람에게 하는 사랑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거짓교사들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받는 사랑과 사랑에게 하는 사랑이 여러분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일.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전 3:11>
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링컨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은 존재를 하루살이로 만들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동물은 오직 현재만 존재합니다. 동물들은 현재에 배불리 먹고, 종족을 번식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의 삶은 잠시이고,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는 영원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재 우리의 삶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살아가야하겠습니까?
첫째, 이 땅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저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일희일비하면서 살지 말아야합니다. 이 땅에서의 기쁜 일이 있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 이 땅에서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처럼 우리가 이 땅의 일을 가지고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고전7장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땅의 삶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면, 우리는 항상 종말의 기준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야합니다.
종말의 기준이라는 말은 종말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기준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종말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실 때 무엇을 가지고 판단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갔느냐를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우리를 판단하시는 것은 얼마나 우리가 정결하고 깨끗했느냐 입니다. 또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느냐 입니다. 또 우리가 얼마나 서로 사랑하며 살았느냐 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저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라고 했는데, 어떤 삶이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까지 이러질 수 있는 삶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깨끗한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무엇보다 사랑의 삶입니다. 어제도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내 삶의 상처나 원한하나 분노가 시기나 질투가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합니다.
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삶 가운데서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까지 남게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을 표준새번역에서는 “8. 사랑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집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 니다.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남은 인생 첫날”이라는 슬로건으로 캠페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오늘 이 날이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매일을 우리 인생의 마지막날처럼 살아가야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것이 매일 매일의 일이어야한다고 메튜헨리가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Day-5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만일 여러분이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고 바라본다면 우리는 살면서 재미와 쾌락이 없으면 이 땅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인생은 무조건 성공이라고 바라본다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일에 성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 인생은 내 욕망의 성취라고 바라본다면 우리는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어떤 안경을 쓰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런데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 세상이 나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시험의 관점입니다. 둘째는, 위탁의 관점입니다. 셋째는, 임시로 맡겨준 임무의 관점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인생을 시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인격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복종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투명성에 대해서 충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200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물론 이 시험은 하나님의 시험은 죄를 짓게 하기 위한 유혹으로서의 시험은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여고보서에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 아니하시고, 또 시험하지도 아니하신다(약1: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은 연단으로서의 시험입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라도 유혹이 되게 하여 우리를 지금도 넘어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맨 먼저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러면 선악과는 무슨 시험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의 시험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네가 인간으로 그 영역은 넘어오지 말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시험을 넘어감으로 이 땅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산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믿음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또 욥의 경우에는 네가 아무 것이 없어도 과연 나를 섬길 수 있느냐의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사탄은 끊임없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실지어도 라고 하면서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났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시험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들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요단강과 여리고성을 주셨듯이 우리가 인간적인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기도가 당장 응답받지 못하는 시험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이런 시험을 주고 계시다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이를 통해서 제 평생에 “그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대한 나의 사랑을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은 시험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어떻게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분들에게는 평생 남편의 문제로 그를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에게는 자녀의 문제로 그를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물질의 문제로 그를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육신의 질병의 문제로 그를 시험하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기도 합니다.
어제 목요제자반에서 영상을 보았는데 김희아 집사님은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붉은 반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또 나중에는 암을 통해서 그를 시험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은 시험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복된 소식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험을 허락하실 때 반드시 감당한만을 시험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만일 그 시험을 당할 때 감당할 수 없을 때는 그 시험과 동시에 감당할만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실 때 반드시 그 시험에 대한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 피할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늘의 피할 길이고, 이 땅의 피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험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떨 때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었습니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시험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사람에게도 희망이 없습니다. 현실로도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로 하나님께 나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시험을 통해서 하늘의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늘의 하나님의 세계로 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품에 보호하시고 안으셨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땅에서도 피할 길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은 시험이라고 했을 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받았을 때 원망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결국 낙심하여 그 시험가운데 빠져서 오히려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 모든 시험이 하나님이 주신 시험으로 믿고 원망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를 선택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김희아씨의 간증을 보면서 가장 놀란 것은 어릴 때 보육원에 보내지고 평생 얼굴에 붉은 반점을 가지고 살아갔지만 그녀는 인생의 시험가운데서 감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하기를 내 인생에는 그 어떤 상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은 가장 예쁜 여자랍니다고 하고 있습니다.
6일. 삶은 일시적인 것이다<시 39:4>
“시39: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삶이란 첫째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삶이란 위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위탁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지 아니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문제는 내가 청지지가 아니라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전4장 7절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여러분이 가진 것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혼자 잘난 듯이 행동합니까? 그리고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이나 달성한 것처럼 행세를 합니까?”(고전4:7)
오늘은 특별히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축복기도의 날입니다.
저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전도사님을 통해서 주일 학교 학생들 이름과 부모, 그리고 출석상황, 그리고 간단한 소개에 대한 글을 받고 한 주간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 자녀를 내 소유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자녀를 통해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을 이루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누구보다 우리 자녀들이 다 잘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녀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떨 때는 자녀에 대한 너무 간절한 바람 때문에 자녀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성경적으로 제일 좋은 자녀교육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막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당시에 부모들은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자녀들을 만져주심을 바랐습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한 자녀교육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부모님들은 항상 부모가 모든 자녀교육을 책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자녀를 교육을 한다고 하면 자녀를 억압하게 됩니다. 또 부모가 자녀를 포기하면 방치가 됩니다.
//붙잡자니 잡히지 않고, 또 그냥 버려두자니 부모들의 속이 탑니다. 자녀를 억압할 것인가, 방치할 것인가? 사이에 해답이 없는 것이 부모들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자녀교육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자녀들은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녀들을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교회에 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이 아닙니다.
또 단순히 우리 아이들이 교회 생활에만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또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께서 그들의 심령을 만져주심을 경험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 사로잡힌바 된 자녀들은 그들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최선을 다 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면 부모님들이 자녀를 주님께로 데리고 오는데, 누가 방해를 하고 있습니까?
제자들이 부모들이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것을 꾸짖고,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 보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부모들입니다. 부모님들 중에서 자기 자녀가 교회나 수련회에 가는 것에 대해서 같이 심하게 꾸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고 교회에 가라,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수련회를 가라”고하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너희 자녀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너희 자녀를 나에게 다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해서 부모가 할 역할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가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고 하는데, 이 말은 한번 데리고 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데리고 오는 것을 말합니다(미완료 과거형).
/저 자신을 돌아보니까 중학교 때 주님을 만났는데, 고등학교 때 잠시 신앙적으로 방황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부모님들이나 교회 선배 중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저를 예수님께 계속해서 나가도록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자라나는 순간순간 마다 그들을 예수님께로, 말씀 앞으로, 은혜의 세계 앞으로 나오도록 인도해야합니다.
/주일학교 때 해야 할 신앙의 경험이 있습니다. 또 중고등부 때 해야 할 신앙의 경험이 있습니다. 또 대학교 때 해야 할 신앙의 경험이 있습니다.
/주일학교 때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기본적인 복음을 들어야합니다. 또 중고등학교 때는 예수님을 감정적으로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학생들이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가 좋고, 선생님이 좋고, 교역자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또 대학 때는 이제 더 깊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가치관을 세상적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관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자녀를 더 잘 기르기 위해서 치맛바람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영적인 치맛바람이 필요합니다. 교회교육이 잘 되는 교회의 경우에 영적인 치맛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수련회나 성경학교를 하면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 기도만 아니라, 물질로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보이지 않게 열심히 기도만 아니라 물질로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은 우리 교회의 미래이자 하나님나라의 미래입니다. 미켈란젤로에게 왜 돌덩어리를 힘들게 들고 집에 들어갑니까? 하니까 그는 이 속에 천사가 보이지 않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 돌 속에서 천사상이 나왔습니다.
/오늘 교회 교육의 현실은 우리교회의 미래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장차 미래에 우리 교회와 하나님나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잘 도와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7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이유<롬 11:36>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이고, 또 하나는 죄악된 인간입니다. 특히 죄악 된 인간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사람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절대 내 이름의 영광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의 영광도 아닙니다. 우리가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도 무입니까? 진정한 부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첫째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돌린다.
그러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 한분만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우리가 믿는 사람들을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는 하는데, 예배 이 후에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예배 후에 성도들끼리 서로 뜨겁게 사랑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이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실 때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로 인해서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모습일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미소를 지으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옛 사람의 모습대로 완고하고 고집스럽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 안에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의 은사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요한복음11: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가운데 언제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알의 죽어지는 말이 되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언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희생할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언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암을 이길 수 있는 신비한 묘책을 알고 있다면 정말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 다 건강에 대한 비법을 말할 것입니다. 또 암에 대해서 신비한 묘책을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육신의 건강정도도 아니라. 또 육신이 살고 죽는 문제도 아닌 영생의 비법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직무유기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요즘 여기 저기에서 모두 하는 말이 정말 전도가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 나가 보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싫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 때도 과연 사람들이 복음을 좋아했습니까? 심지어 예수님당시에도 복음을 좋아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셨는데도 사람들을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에 빛의 복음을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우리의 사명이고 의무하고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복음전도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순종입니다. 물론 우리가 억지로 전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 복음이 너무 좋아서 전할 수밖에 없어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만이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온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고의 방법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번 해피데이 기간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되어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계 4:11>
계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하나님의 기쁨
여러분들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우리는 너무 쉽게 내 인생의 목적을 나의 만족과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단순히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창세기 1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1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만드시고 난 다음 제일 많이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0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8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1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5절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마지막으로 31절에 인간을 창조하신후에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과 인간은 인간의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로서 나는 오늘 예배 아주 좋았습니다. 아주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라고 쓰여 있는 쪽지를 받곤 한다. 이것이 예배에 대한 또 하나의 잘못된 개념이다. 예배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예배해야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목적은 우리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즉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란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같이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까?
첫째로-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제일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이라 했을 때 잘못 오해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줄로 생각합니다.
요6장28,2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종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고행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일을 하나님을 믿는 일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에녹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합니다-왜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에녹은 자녀를 낳고 기르는 모든 삶 가운데서 철저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녹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후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창1장 보면 이 땅에서 인간이 할 일이라곤 사실 아무 것도 없습니다-우리가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우리의 노력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하나님이 다 준비해두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합니까?
그 창조주 하나님-모든 것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 인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인간이 범죄 이후에는 인간은 땀을 흘려야지만--땅의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창1장이 우리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며 노력한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지 아니하시면 모든 것이 다 허사일수밖에 없습니다(시127-하나님이 성을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며 살아가지 말아야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보라 땅을 보라 이 모든 것 네 것이 어디 있느냐 염려하지 말라 땅도 내 것이요 곡식도 내 것이요 생명도 내 것이니 그저 나만 믿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때 분명 하나님께서 때마다 분명히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금도 그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그 하나님이 내 모든 삶의 주인이 되시어 내 모든 삶을 책임져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창1장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 앞에 항상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그것은 7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1절에 그대로 되니라 15절에 그대로 되니라 24절에 그대로 되니라 30절에 그대로 되니라 하고 31절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십니다.
만일 달이 말하기를 난 달이 되기 싫다-나는 낮에 해가 좋아 라고 했다면 결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난 땅에서 기는 것보다 하늘위로 나르는 것이 더 좋아라고 했다면 이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자신들의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분과 감정, 또는 내가 그것을 좋아 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또 그것이 우리에게 참된 유익과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20년 넘게 전도 훈련을 시키시는 목사님도 막상 전도하려고할 때마다 하기 싫을 때가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왜 전도해야하는가? 내가 하고 싶고, 또 하기 싫기 때문에 하고 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라 했습니다(이창호목사님).
--여러분 우리가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전도하는 삶을 살려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하겠습니까? 전도입니다. 내가 누구를 전도하려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바른 윤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전도하고 선교할 때-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만--우리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요 영광이요 유익이요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하나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다 창조하시고 좋아하시고 기뻐하셨는데 한 가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나하신 것이 있습니다.
창2장 18절입니다“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홀로 거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신 모든 만물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좋았더라고 하는데, 사람이 홀로 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아니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부부관계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홀로 거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와가 언제 마귀의 유혹을 받았습니까?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세례요한도 혼자 있을 때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야 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도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엘리야도 혼자 있을 때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동물의 왕국에 보면 사자가 항상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리가운데 들어있지 않고 혼자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 동물만 보면 당장 잡아먹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우리를 혼자 있게 합니다. 자꾸만 내 자신의 세계만으로 들어가게 만듭니다. 하나님백성이 모인 자리를 멀리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혼자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도 필요하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 멀어지면 불행이듯이--믿음의 공동체에서 멀어지면 신앙은 떨어지고 위기와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133편“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에 내림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같이 모일 때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요, 우리에게는 복이요, 또한 영생의 축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때 창세기에서 말씀하시는데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안에 잇는 모든 풍성한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 분명히 내려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9일.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히 11:7>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우리의 삶의 목표가 우리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쁘시게 한 인물 중에서 노아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과연 나는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노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창세기 6장9절에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시대는 죄가 온 세상에 관영하였고, 또 사람의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노아가 당대의 의인으로 완전한 자가 되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단순히 노아가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착하게 살았다 의롭게 살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노아가 심판의 시기에 완전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창6장 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된 제일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날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공기를 들이 마실 때 마다 그 공기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시고 날마다 공기를 마시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흡입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리고 숨을 내 쉴 때 마다 나의 온전한 사랑을 주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노아는 그의 삶 가운데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했을 때 어떤 문제가 있었겠습니까?
첫째, 노아는 비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비가 없이 지면에 안개만 있었습니다(창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둘째, 노아는 바다에서 수백 키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셋째, 노아는 방주에 들일 수많은 동물들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 동안 하늘에서 비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는데, 몇 년이 걸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학자들은 창6장3절에 근거해서 120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일 기도를 하는데, 12년 동안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그래도 하나님을 믿으시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120년은커녕 12년은커녕 12개월 동안 그 어떤 기도의 응답이 보이지 않아도 금방 낙심하여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를 120년 동안 기다리면서, 현재의 삶 가운데서는 굳굳하게 매일 매일 방주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노아의 삶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부흥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낙심과 자포자기가 절대 아닙니다.
또 미래에 어느 순간에 하늘에서 갑자기 성령의 불이 내려와서 우리를 뜨겁게 할 부흥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삶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부흥의 단비를 기대하면서 오늘 내가 지어할 방주를 수년이 걸리더라도 짓는 일입니다. 방주는 한 순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짓기 위해서 배의 뼈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 배의 밑바닥부터 차근차근하게 만들어 가야합니다. 노아는 그 일을 무려 120년 동안 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비가 왔습니까? 120년 동안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며 방주를 짓고, 또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동물들을 다 들이고, 또 방주에서 먹을 음식을 다 준비하였을 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언제 노아가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살았습니까?
성경에서는 노아가 방주를 다 짓고, 하늘에서 홍수가 내리고 난 다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히11:7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120년 동안 매일 매일 방주를 짓고 준비하는 그 과정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준비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보지도 않은 비를 대비하면서 120년 동안 매일 매일 방주를 준비하고 지을 수 있었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입니다.
어제 어떤 집사님의 농장을 심방하면서 간단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하시는 말이 자기는 단 한순간도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 해주실 것을 믿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부흥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오늘 내가 지어야할 방주를 매일 매일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방주가 다 지어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부흥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제목은 주여 우리에게 믿음의 부흥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서를 통해서 하박국이 말하는 부흥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면서 알게 된 것은 하박국이 말하는 부흥은 제일 먼저 믿음의 부흥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손이 잡히는 것이 없어도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면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부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무엇보다 하나님께 이 믿음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 매일의 방주를 짓는 믿음, 그리고 부흥의 단비를 기다리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중심 DAY-10
“롬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여기서 드린다는 말은 헌신한다 희생한다 혹은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하나님께 나를 완전히 헌신하고 희생하고 항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적당한 헌신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한부분만을 드리는 헌신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을 요구하시는데, 왜 우리가 헌신하지 못합니까?
1)첫 번 째는 이 시대의 이기주의적 현상 때문입니다.
딤후3장에서 말세의 징조로 제일 먼저 말씀하기를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절대로 남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에게 문제가 없고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 여유를 가지고 남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즈음 시대는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마치 바보처럼 취급을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경향이 교회에도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사람은 많은데 헌신된 일군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2)두 번 째, 우리의 잘못된 신앙관 때문입니다.
여러분 참된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믿음이라 했을 때 하나님께 맡기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예전에 어떤 학생들이 복음파라는 이상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하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 인간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무 행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더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잘못된 신앙관, 믿음관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점점 관념화되어가고 있고 헌신하는 삶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3)세번 째, 헌신의 가치와 기쁨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많은 진리는 역설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읽으면 찾으리라(마16:25)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의 말-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체우노라(골1:24)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고난(헌신)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떤 희생이나 헌신도 하지 않고, 그저 앉아서 심리적이고 음악적인 기쁨과 위안만을 꿈꾸지 않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성도의 기쁨이 아닙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은 바울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때, 성도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우리가 왜 헌신해야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헌신해야합니다.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거기에 예수님만이 죽어있다고 생각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의 옛사람도 함께 죽어있음을 고백해야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후5:15절입니다"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 하여 죽으심(죽으심으로 우리도 그와 함께 죽게 하심) 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이기주의적으로 자신만을 위하여 살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합니다.
3.그러면 우리가 무엇에 헌신해야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대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헌신이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출애굽기 32장 29절입니다. 거기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여기서 보면 무엇을 헌신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던 자기 형제들을 쳐서 죽이는 것은 여호와께 헌신이 되었다고 하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가는데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의 헌신은 단순히 인간적인, 종교적인 헌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헌신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야 네가 마르다보다 더 나은 것을 선택하였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보라고 허락하신 사람들에게 헌신해야합니다. 단순한 일에 대한 헌신이 아닙니다. 조직에 대한 헌신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과 조직은 영혼을 살리라고, 사람을 섬기라고 주신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에게, 영혼들에게 헌신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영혼을 구하는 하는 일에 헌신해야합니다.
4)마지막으로 헌신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헌신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린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헌신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내 삶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내어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참 무서운 말이 아닙니까? 따라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알아서 다 해주시오” 라고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 하나님의 좋은 친구 되기< 롬 5:10-11>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요15:15에 보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말씀은 “이제부터는”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단순히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우리가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해서 이제부터 우리가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라고 하십니까?
요15장13절을 보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니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를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친구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친구는 단순히 의무감과 책임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종은 단순히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주인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종은 주인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친구는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대상입니다.
2)또 친구는 일을 하기 위한 대상이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왜 다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일을 하기 위해서 다닙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다닙니까? 일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동행입니까?
물론 우리가 교회에 봉사를 하며 일을 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교회에 일만 하기 위해서만 다닌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가 아닙니다. 종입니다. 종은 오직 일로만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못하면 그 종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일만을 하기 위해서 다닌다면 연세 드신 분들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교회를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오실 때 아무 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친구삼아서 일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손잡고 동행하면 사시는 성도님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친구로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1)우리가 주님의 친구라면 끊임없이 대화를 해야 합니다.
대화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또 대화란 일상적인 삶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 나가는 것만으로, 또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는 것만으로 주님의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예수님의 친구라면 우리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루 24시간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의 임재 연습 ] 이라는 책을 쓴 17세기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의 조리사였습니다. 그는 식사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은 가장 일상적인 일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로렌스형제)”고 했습니다. 즉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 행동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예배의 모습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예배는 일정 시간에 참석해야 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 삶 가운데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께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로렌스형제는 “매 순간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을 느끼라. 그리고 그에게 고백하라. 내 입을 통해서 이것을 계속하면 할수록 우리는 친밀한 하나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 이렇게 말합니다. “어려운 말의 긴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루 동안 짧은 대화와 같은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에 길고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라, 긴 말들은 대부분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숨기도(Breath Prayer)를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숨을 내 쉬고 뺃을 때 마다 짧은 문장을 통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 “ 나는 당신을 알기 원합니다. ” “ 나는 당신께 속해 있습니다. ” “ 당신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오 할레스비도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호흡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공기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공기를 흡입할 때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흡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숨을 내 쉴 때 마다 “나의 모든 걱정과 고통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해야합니다.
//해보시기 바랍니다. 공기를 흡입하면서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다”. 숨을 내 쉬면서 “나의 모든 고통과 걱정을 받아주시옵소서” 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과 친구로서 끊임없이 교제하시며 살아가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2)또 하나님과 친구로서 교제하는 살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을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면 그것이 묵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방법을 안다면 이미 묵상하는 방법을 이미 터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걱정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머리가 아니라 나의 마음 판에 세기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음성만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음성이 아닌 사람의 소리. 걱정의 소리, 사탄의 소리, 상처의 소리도 듣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내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사탄의 소리, 걱정의 소리, 상처의 소리를 내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갈 때가 더 많습니다.
-아무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는 말씀을 듣지만, 사탄이 내게 하는 소리를 더 묵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두 가지의 음성 중에 어떤 음성을 마음 판에 세기며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 판에 사탄의 소리, 거짓의 소리, 정죄의 소리, 비방의 소리, 낙심의 소리, 불신의 소리, 상처의 소리, 부정의 소리를 세기고 묵상하며 살아간다면 절대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대원목사님은 “우리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묵상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생 사람들에게 받았던 상처의 소리를 묵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실패의 경험들로 인해서 낙심의 소리만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신의 경험으로 인해서 평생 불신의 소리만을 묵상하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친구로서 진정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뚜껑을 봉한 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에 사탄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거짓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상처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낙심의 소리, 불신의 소리가 들옵니다. 이때 이런 소리에 대해서 뚜껑을 봉한 샘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내 안에 오직 나를 사랑하신다는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그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일. 하나님과의 우정 키워가기< 약 4:8>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심으로 이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만유의 주재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가까이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로서 단순히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자리에서만 아니라 우리가 호흡을 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숨을 들이 마실 때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호흡하며, 또 숨을 내 실 때 우리의 모든 사정 하나님께 내보내야한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걱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 판에 세상의 소리, 인간의 소리, 할 수 없다고 하는 소리, 상처의 소리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 판 깊이 새겨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우리는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솔직해야합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거리가 먼 사람의 경우에는 서로 솔직한 감정을 다 드러내지 않습니다. 숨길 것은 숨깁니다. 그러나 정말 친한 친구에게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다 쏟아놓습니다. 심지어 그 친구에게 대한 불만이 있으면 솔직하게 다 쏟아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과 더 가까운 관계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에게 다 쏟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시편이 우리에게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고함, 탄식, 의심, 두려움, 분노, 깊은 열정, 감사, 찬송, 믿음의 모든 말들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42:2-3절에서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에게 진술하는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실 때도 하나님께 여러분들의 솔직한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다 털어놓으시기 바랍니다.
힘들면 하나님께 힘들다고 이야기하시고, 내가 억울하게 느껴지면 내가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솔직히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솔직한 모든 감정을 그대로 다 받아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도 너희가 나의 명한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도 바치라 하였을 때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을 내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로서 순종하는 것은 의무감이나 부담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차원에서 우리 동부제일교회 성도님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무나 순종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는데, 하나같이 하시는 말씀은 이제 전도는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말씀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전도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말 우리교회가 좋은 것은 그냥 인간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절대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인 경우에는 너무나 잘 듣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에게 있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내려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잃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제 전도를 하는데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낙심하여 2년 동안 하나님께도 나가지 않은 어떤 부부를 만났습니다. 사람에게 대한 상처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조차도 싫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한 주간 동안 우리는 우리의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잃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에 더 충만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 우리 마음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더 간절한 열망이 있어야겠습니다.
다윗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일 곧 그것을 구하니리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는 것이라(시27:4)”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갈망은 영원한 갈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갈망은 영원한 만족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내가 바라는 그 무엇이 아니라,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3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막 12:30>
막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에게 “요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4:2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너무 형식에 치우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의 예배가 형식에 치우신 예배가 아니라,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그들이 만든 거짓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너희의 예배가 거짓이 아닌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엇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까?
/1)먼저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예배를 드리고 싶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저 하늘 높은 곳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주 엄격하고 딱딱하고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너무 편한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는 하나님은 저 하늘위에 계신 무섭고 딱딱하신 분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은 무조건 편한 하나님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우리가 만든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 철저히 성경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말씀을 잘 들어야합니다. 만일 말씀을 듣는 시간에 잘 듣지 않고 존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둘째,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너무 형식적이고 외식 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예배가 영으로 드려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이란 성령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과 영혼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진정으로 우리 영혼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어떤 형식에만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그 형식이 되어야지 참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에 우리가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보십니다.
이에 대해서 릭 워렌 목사님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악 때문에 감동을 받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는 것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둘은 절대 같지 않다. 실제로 감성적이고 내면에 와 닿는 음악이 때로는 예배를 방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예배시간에 주로 시편 찬송을 불러야 된다고 했는데, 그 곡조들은 지금 우리가 듣기에 너무 지루합니다. 칼빈이 왜 이렇게 주장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찬양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진심을 담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너무도 자주 내가 번제와 제사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배가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예배, 영혼이 없는 예배, 진심이 깃들지 않는 예배는 아무리 완벽한 형식을 갖추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영혼을 드리는 진실한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예배란 우리의 예배가 상투적인 것이 되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아무 생각이 없이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요즘에 미사여구를 담은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하는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요즘에 적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적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기도가 상투적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어눌하게 기도를 하더라도 마음을 담은 기도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현실적일 때 기뻐하십니다.
롬12: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산 제물이란 생활로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영적예배에서 영적인 원어로 보면 “합리적 이성적”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란 우리의 생활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현실적인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제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땅의 소산을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였기에 양을 드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창4장 4절과 5절에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문제였습니다.
고대근동시대에 이방의 제사는 오직 의식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삶과는 관계없이 의식만 잘하면 신이 받아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고대의 신전은 크고 화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의 의식만 아니라 예배하는 사람을 보십니다. 예배하는 자의 삶으로서 예배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공중목욕탕에서 물을 잠그는 예배, 걸 거리에 휴지를 버리지 않는 예배, 지하철을 탈 때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예배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유치부축복의 날입니다. 한나가 대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나는 위기의 때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대한 점은 그가 기도로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약속한대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자녀를 기도로 가지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아니라 한나는 기도로 얻은 자녀를 하나님의 품에 떠나보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히 한나가 사무엘을 떠나보낼 때가 젖을 뗄 때였습니다. 젖을 땔 때가 제일 어머니를 찾을 때입니다. 사무엘을 가장 품에 않고 싶을 때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모가운데 자녀가 잘못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가 잘 되기 위해서 끝까지 자녀를 내 품에 앉으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가장 품에 앉고 싶을 때 그 자녀를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나가 일년동안 한 일은 사무엘을 위해서 겉옷을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겉옷이 무슨 옷이겠습니까? 제사를 할 때 입는 옷입니다. 한나가 한 일은 사무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바로 서는 일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새벽에 이렇게 자녀를 데리고 예배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나처럼 이 아이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 이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자녀가 평생 하나님께 예배자로 서 있는 것을 돕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자녀를 가장 아름답게 키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4일.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사 8:17>
사8:17.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일이 잘 풀리고 행복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에 대해서 당장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다윗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시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니아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니이까? ”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멀게 느끼질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첫째, 하나님께 솔직한 감정을 말해야합니다.
욥은 답답함의 모든 감정을 다 털어놓았다. 의심과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는 그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다 쏱아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선 침묵하셨지만, 욥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심지어 하나님께 자신의 화난 감정도 다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화가 났고 분개하고 있습니다. 말을 해야겠습니다(요7:11)”고 했습니다. “ 교회 안에서 고민하라. 그럼 이긴다. 교회 밖에서 고민하면 진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여러분들의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다 말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왜 지금 당장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까? 하나님 왜 잠잠히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정말 나와 함께 하십니까? 라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감정을 다 솥아놓을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의 의심과 분노, 두려움, 슬픔 혼란 그리고 의문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는 굳게 믿고 말합니다. 나는 완전히 망했습니다(시116:10).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솔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첫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고,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믿었고, 셋째, 자신이 솔직한 감정을 쏟아도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식된 자와 같이 아무 것도 어렵지 않은 것처럼 기도하지 마시고 여러분들의 솔직한 모든 감정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는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욥은 욥21:17절에서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라고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다 쏟아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도 욥은 하나님의 자신의 감정대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옵10:12),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37:5). 하나님은 내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까지 아십니다(23:10). 하나님은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23:14)”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현실과 상황에서 감정대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본성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따라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현실과 상황에서 감정대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본성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세계2차 대전을 격으면서 하나님을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면서 하나님을 감정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욥처럼 현실가운데서는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을 전혀 하지 않는 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은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고, 심판하고 계십니다.
또 어떨 때 우리의 삶의 현실만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본성상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이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는 우리는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마시고, 성경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이것을 묵상이라고 합니다. 즉 묵상이란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통해서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이 모든 것이 앞이 막히고 답답하고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계시고, 전능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면 모든 것이 희망이 보입니다. 또 불가능한 상황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니 모든 것이 다 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지 마시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성으로 현실을 보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세 번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욥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계속 그를 신뢰할 것입니다(욥13:15).
내가 마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만, 그런 우리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앞을 보면 항상 가시밭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내 앞이 절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떨 때는 내 앞이 번지점프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가시밭이라고, 절벽이라고, 번지점프라도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뒤를 돌아보니 모두 꽃밭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모든 순간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과거에 지금보다 더 어려울 때 나와 함께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나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 모든 일들을 잘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저 멀리 느껴지고, 내 앞 날이 아무 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한발 한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을 듣고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처럼, 주의 말씀을 믿고, 물위라도 뛰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물위를 걸어가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15일.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요일 3:1>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가지고 첫 번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오늘 부터는 두 번째 목적인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고 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2장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가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장에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적으로 가족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먼저 가족이라 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가족의 원형으로서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보아야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가족으로서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한 가족이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이래야 참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 오면 밖에서 입었던 옷을 벗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라고 했을 때 단순히 옷을 벗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그대로 공개할 수 있는 관계가 가족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밖에서 제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내에게 다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아내도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또 자녀도 가정에 와서 부모에서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한 후 나타난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서로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관계에서 서로의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기리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서로 숨기는 것은 참 가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 서 한 가족이라 했을 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서로 솔직해야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형식과 외식과 거짓으로 가리는 것은 참 가족으로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 교회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허물과 부족으로 다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 모두 죄입니다. 어느 누가 더 잘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형식과 외식과 잘남의 모든 옷을 벗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솔직한 모습으로 서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허물과 부족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또 성경에서 가족이라 했을 때, 서로의 부끄러움을 덮어주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노아의 가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노아가 물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노아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술에 취해서 부끄러운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참 가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셈이었습니다. 셈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고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떠들고 다녔습니다. 공개했습니다. 이것은 참 가족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셈의 하나님이 되시고 셈의 자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의 가계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나오게 하시고, 예수님도 나오게 하시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도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함의 자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버려두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된 가족이란 서로의 허물과 부족,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공개하고 고발하는 자가 아니라 덮어주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참 가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라면 먼저 서로의 부끄러움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또 서로가 부끄러움을 털어놓았을 때 그것을 공개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사랑으로 덮어주는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이래야 참된 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의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납과 관용입니다.
용납이란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관용이란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다 소화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 마음의 넓이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가족들에게 관용하십니까? 얼마나 내 마음을 넓혀놓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것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제일 용납하고, 관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제일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과 한 교회 성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까이에서 매일 부딪혀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도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와 그 은혜만이 나의 좁아진 마음을 녹일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성경적 의미에서 참된 가족이란 기다림과 희생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탕자의 비유에서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안의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난 아들을 어떻게 대합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고 가정을 떠났어도 절대 아들을 종이라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 아들을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집나간 아들이라도 절대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준 가족의 모습입니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족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닌 사람들은 얼마든지 버리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족의 관계를 언약적 관계라고 합니다. 언약적 관계란 만일 그 관계를 깨뜨리면 고기의 쪼개짐과 같이 죽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가족은 언약적관계로서 죽기 직전에는 서로 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가족은 언약적 관계로서 절대 포기하지 않는 관계여야 합니다. 포기는 배추포기를 말하지 가족이란 포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싫든 좋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서 가족으로 맺어준 관계에 있어서는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압적으로 아들이 돌아오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군대라면 탈영병이 있으면 강압적으로 데리고 올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일 힘든 가족이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그냥 기다릴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한 한 가족이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인간 될 때가지 절대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가족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 교회의 숫자나 프로그램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맺은 하나님의 한 가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가족처럼 가장 힘이 들 때 서로 위로가 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가족처럼 함께 기뻐하고, 또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처럼 같이 아파할 수 있는 가족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16일. 가장 중요한 것< 고전 13:3>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배우기를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삶은 사랑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사람들보다도 하나님가족들에게 더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갈6:10에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가족)들에게 할지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전13장 보면 사랑이 없이도 방언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도 많은 신앙적 지식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랑이 없이도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남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도 내 몸을 불타는데 까지 내어주는 헌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이 없이 이 모든 일들을 행하면 세 가지가 무익합니다.
첫째는 내게 무익한 것이고, 또 남들에게 무익한 것이고 종말에는 하나님 앞에서도 무익합니다. 고전13장2절과 3절에 보면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이 기도하고, 사랑이 없이 잘 가르치고, 사랑이 없이 열심히 헌신을 해도--사랑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하고 봉사를 하면 그 사람들은 나중에 더 자신이 메말라가고, 나중에 일을 하면 할수록 남을 더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랑이 없으면 남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무익합니다.
사랑이 없는 열심과 봉사와 희생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전혀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또 사랑이 없으면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과 상급이 없습니다.
---8절 말씀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하리라” 라고 하는 말씀은 마지막 종말에는 예언의 은사도, 방언의 은사도, 지식의 은사도 다 없어지고 오직 사랑만이 남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이 땅에서 내 모든 것을 불사르고 희생하여 정말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심판 때 그 모든 것이 다 불타고 없어지고 겨우 구원만 받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사랑으로 신앙의 집을 짓지 않는 모든 것은 다 불타고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만 받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상급이 없는 구원만 받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없이도 큰 교회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또 사랑이 없이도 얼마든지 열심히 전도도 하고, 선교사역과 구제사역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또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칭찬과 상급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종말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봉사와 사역, 수고와 헌신이 정말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2.그러면 이렇게 사랑이 있으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습니까?
1)사랑이 있으면 삶과 사역에 활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도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절대 지치지 않습니다. 피곤하시기 않습니다. 언제나 활력이 넘치십니다. 그래서 내 삶과 사역에 활력을 찾고자 하시는 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께 사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차에 뜨겁게 서로 사랑함으로 삶과 사역에 활력이 넘치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또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은사가 주어집니다.
고전13장31절에“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여러 가지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더 은사를 받는 좋은 길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바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입니다. 그래서 고전14장 1절을 보면 “신령한 것(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사랑이 동기가 되어) (더 큰 은사를) 구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절대 방언을 금지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은사가 필요 없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랑 없는 방언의 은사, 사랑이 없는 지식의 은사가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이 동기가 된다면 더 큰 은사, 더 많은 은사를 하나님께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지식의 은사가 아닙니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의 은사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단순한 전도의 은사가 아닙니다. 지옥 가는 영혼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면 사랑에 따라서 전도의 은사가 주어집니다. 내게 남들에게 돋보이기 위한 은사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함과 같이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사랑하기 위한 모든 은사들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 풍성히 내려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사랑이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단점을 장점으로 보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조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은 너무 조용해 그래서 마치 쑥맥같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그 사람은 참 조용히 그래서 너무 차분하게 일을 잘해서 좋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아주 활동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은 너무 설치고 다녀 눈 꼴 사나워서 정말 못 보겠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정말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그래서 너무 보기 좋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따지기를 좋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 없이 보면 “그 사람은 너무 깐깐해 바리새인같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그 사람은 참 옳 곧은 사람이야 정말 저런 사람이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겐 모두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는 곳에는 장점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철저히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단점만을 부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곳에는 그 사람의 장점에 대해서는 칭찬합니다. 또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해도 격려함으로 단점을 도리어 장점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습니다. 좋은 장점을 가진 사람도 사랑이 없는 곳에는 그 장점도 다 죽게 합니다. 또 서로의 단점만을 가지고 서로 비난하고 질책합니다. 이런 공동체는 절대 미래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 어떤 하나님의 꿈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공동체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장점에 대해서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장점을 더 극대화시켜줍니다. 또 서로의 단점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격려는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공동체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교회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으로 보면 희망이 있고 사랑으로 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고 확신합니다. 우리교회에 분명히 희망이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더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사랑을 인간적인 힘으로 할 수 있는가? 없다
사랑에 예수를 넣어보라—결국 내가 죽고 내안에 예수가 살 때 이런 사랑의 삶을살 수 있습니다.
17일.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엡 2:19>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고 있는데, 하나 좋지 않았던 것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각자 혼자를 부르지 않고, 교회의 가족으로 부르셨습니다. 일부 극단적인 복음단체에서는 그저 예수를 믿고 구원만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가 혼자 거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를 세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1.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교회가 필요합니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상설교를 자세히 보시면 산상설교는 개인적인 윤리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산상설교 안에 있는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일용한 양식을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산속에서 나 혼자 살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를 절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사실 교회를 나가지 않고 혼자 예수를 믿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개인 수양의 종교이기 때문에 산속에서 혼자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짜 불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절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를 혼자 개인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공동체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대부분의 말씀들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어떻게 관계하면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사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리스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2.둘째,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을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바꾸어 놓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당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오 저 사랑을 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추상명사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로만 증거 하지 않았고,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일일서 3장 16절도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버리신 희생적인 사랑을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교회를 통해서 보여줌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들을 서로 함께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혼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사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통해서 서로 함께 협력하면 그 일들을 쉬워집니다.
전도를 할 때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감당할 때 더 쉬워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가 서로 함께 아파하고 기도할 때 그 어렵고 힘든 일도 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서로 라는 말이 50번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있는 무거운 짐들을 서로 나누어짐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과 서로의 일들을 함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릭 워렌목사님은 “건강한 교회가 건전한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교회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과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의 차이는 헌신의 정도다.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소비자이고, 구성원들은 기여자다.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소비자이고, 구성원들은 기여자다. 교회를 그냥 다니는 사람들은 책임을 공유하지 않고 이득만 바란다. 이것은 단순히 동거하는 커플과 결혼을 통해 서로에게 헌신하기로 한 커플의 차이다”
이와 같이 릭워렌 목사님은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 결혼하지도 않고 동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원은 결혼을 해서 서로에게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제 젊은 세대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그래서 마치 교회는 대형수퍼 마켓이 내게 필요한 물건을 사고 나면 곧 언제든지 떠납니다. 교회는 단지 내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곳이지 사랑과 헌신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과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결혼하지 않은 동거인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다니는 사람은 편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습니다. 또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유익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이런 사람을 성전 마당만 밝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측량줄에서 제외 된다고 말씀합니다. 즉 마지막에 심판 때에 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제외된다고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영적 자녀출산을 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마치 결혼 사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심판 때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또한 비록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격지만 그를 통해서 많은 영적 자녀들을 출산할 수 있습니다.
교회 마당만 밟고 다는 사람이 아니라, 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8일. 삶을 함께 경험하기<시 133:1>
시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삶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을 교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나누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작은 모임들을 통해서입니다. 어제도 우리가 전도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소그룹에서 함께 삶을 나누는 것이 필요다고 배웠습니다. 우리도 목장으로 모이고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목장모임에서 교제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1.첫째 진정한 교제란 제일 먼저 진실한 삶의 나눔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자주 목장모임을 단순히 성경의 지식을 나누는 모음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장모임은 삶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삶을 나눔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또 자기 방어적인 모습을 하고, 가식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진정한 교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8절에 보면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합니다.
이 세상은 철저히 자신의 모습을 숨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습그대로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더 열심히 경건의 생활을 한다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공의를 부르짖으면 사랑이 없어지게 되고, 또 사랑을 부르짖으면 공의가 없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야합니다. 그러면 그는 미쁘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작은 모임들에서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서로가 서로의 죄와 연약한 부분들을 용서 해주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는 목욕탕이 되어야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더러운 때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곳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씻음을 받고, 또 사람들을 통해서도 씻음을 받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진정한 교제란 서로 공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한다는 말은 서로 충고하거나 당장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서로의 고통에서 대해서 함께 참여하고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격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이상한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이입이라고 하는데, 성경적인 단어는 공감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 욥의 고난과 고통에 대해서 전혀 공감하지 않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욥은 친구 빌닷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6장 2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2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여기서 “힘 없는 자 기력없는 자”는 욥 자신을 가리킵니다. 빌닷이 욥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 욥에게 바른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절대 욥에게 힘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힘 없는 나를 잘 도와주는구나” 는 말은 네가 힘 없는 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욥26장 4절을 보면 “4. 네가 누구를 향하여 말하느냐 누구의 정신이 네게서 나왔느냐”
너의 모든 말이 맞는 이야기인데,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네가 무슨 정신으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욥의 이 말을 통해서 무엇이 참된 위로이고, 공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욥의 친구 빌닷의 이야기는 하나도 틀린 이야기가 없습니다, 모두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또 나름대로 욥을 위로하고 욥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빌닷의 위로가 잘못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1)이 빌닷은 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빌닷은 인과응보의 논리고 욥의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욥에게 맞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서로 잘 공감하기 위해서 먼저 그 사람에 대해서 정확하게 잘 이해해야합니다. 그 사람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른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말을 한다면 도리어 그 사람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잘 이해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려가지 어려운 일들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너 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느냐, 네가 그렇게 게을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네가 잘 되게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인데, 성경에 보면 너처럼 게으르면 나중에 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맞는 말이지만 그 말은 모두 그 사람을 완전히 죽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절망하여 아무 것도 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을 행해야합니다. “형제님 저는 열심히 노력해도 되지 않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비록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데 왜 낙심하십니까? 왜 절망하십니까? 하나님은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힘을 내십시오” 이렇게 말을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바른 공감은 제일 먼저 그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게 맞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2)무엇보다 이 빌닷의 위로가 잘못된 이유는 빌닷에게는 사랑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욥은 빌닷에게 “네가 내게 한 말이 무슨 정신에서 나왔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닷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빌닷은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사랑의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참된 공감입입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사랑의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도리어 그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충고는 그 사람을 완전히 낙심하게 하고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떨 때는 듣기 싫은 소리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는 것보다 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말을 하느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말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그 사람을 잘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전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방식은 일방적이 되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시기 전에 상대방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이 무엇에 때문에 목말라하는지 잘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짧지만 간단한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접촉점이 이루어지고, 접촉점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복음이 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욥6장 14절을 쉬운 성경으로 보면 “고통당하는 친구를 동정(즉 공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공동번역에서는 “욥6:14. 벗과 함께 괴로워하지 아니하는 자, 전능하신 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욥기의 마지막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노하시고, 그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고, 욥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혹시 성경적인 바른 이야기를 하고, 그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바른 소리를 했으니 무조건 절대 잘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고보다 공감해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문제해결보다 공감해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에게 서로 공감해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9일. 공동체 가꾸기< 행 2:42>
행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에베소서 4장 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 인간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써야 될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있지만 인간이 노력을 해야 할 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정직해야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덮거나 무시하고 싶을 때에도 사랑으로 진실을 말할 수 있어 합니다.
그래서 엡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한다고 하는 것도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또 무례하게 말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딤전5장 1,2절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나이든 남자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모진 말을 사용하지 말고 아버지에게 하듯 하면, 어린 남자에게는 형제처럼 하라, 나이 든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고, 나이든 어린 여자들에게는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야 그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교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무어보다 겸손해야합니다.
릭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만 중요하게 여기고 독선적이며 고집스럽고 교만한 것은 그 어떤 것보다 교제를 파괴시킨다. 이것이 하나님이 교만을 그토록 싫어하시는 이유다. 교만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지만 겸손은 다리를 놓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며, 더 온화하게 하는 기름 역할을 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겸손이 우리 허리 띠와 같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겸손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모든 것이 다 흘러내릴 수 있습니다.
또 벧전 5장 5절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고 있습니다(벧전5:5)
또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롬12:16).
또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 옆에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나보다 낮게 보이십니까? 아니면 그들이 나 보다 낫게 보이십니까? 만일 내가 옆에 사람들보다 낫게 보인다면 내가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또 릭워렌 목사님은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더 생각하는 것이 겸손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나를 더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남을 더 생각하고 있습니까? 남을 더 생각하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나를 더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교회에서 겸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겸손하려고 하면 그것은 비굴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겸손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왜 우리가 교만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여 나는 저 세리와 죄인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눅18장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옳다 인정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서 있더라도도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 앞에서 나를 보기에 내가 다른 사람들도 더 낫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서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있으면 우리는 언제나 늘 겸손해 질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사야 5장까지의 이사야입니까? 아니면 이사야 6장 이후의 이사야입니까? 이사야는 5장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해 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또 건강한 교회를 이루려면 공손해야합니다.
공손이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5)건강한 교회를 이루려면 비밀을 지켜야합니다.
6) 건강한 교회를 이루려면 자주 만나야합니다.
20일. 깨어진 관계 회복하기< 고후 5:18>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관계가 깨어졌을 때, 그 관계들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일들로 서로의 관계들이 깨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먼저 하나님에게 이야기해야합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보면 다윗은 관계의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시5: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관계의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하나님에게 우리의 심정을 다 틀어 놓아야합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모든 아픔들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에게서 채워주지 못한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대신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시34편 18절에 보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상처 입은 자)를 가까이 하시고”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상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부분이 50이면 하나님은 그 50을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부분이면 하나님은 그 70을 채워주십니다. 어떤 신실한 자매 간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상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결혼을 한 어떤 자매 간사님이 계셨습니다. 7년 동안 남편이 외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그 속이 탓겠습니까? 무엇보다 당연히 사랑받아야할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당장 관계를 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자매 간사님은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가족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으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 간사님은 상처가 있는 만큼 그 상처를 뛰어넘는 하나님을 사랑을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만져주심을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항상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신들이 스스로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내 마음 가운데 누구와 관계의 문제가 있으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의 통로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관계의 문제는 빨리 해결할수록 좋습니다.
세 번째, 그들의 감정에 공감해야합니다.
우리는 항상 문제 해결을 우선시합니다. 그런데 문제해결보다 중요한 것은 상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문제해결보다 서로의 상한 감정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네 번째, 나에게도 잘못이 있음 고백해야합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상대방이 100프로 잘못이다 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상대방이 잘못했어도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음을 서로 고백해줄 수 있어야합니다.
다섯째,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를 공격해야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사람의 인격조차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문제가 있을 때 잘못된 문제 그 자체만 가지고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어도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6. 할 수 있는 한 서로 협력해야합니다.
서로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도 서로 협력해야합니다. 만일 관계의 문제 때문에 일조차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관계의 문제가 더 크질 수 있습니다. 도리어 관계에 문제가 있어도 일은 서로 함께 협력하다 보면 나중에 관계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7. 해결이 아닌 화해를 강조해야합니다.
용서와 화해는 다릅니다.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왜 용서해야합니까?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신에게 상처가 됩니다. 그리고 예배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즉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용서와 화해는 다릅니다. 용서는 자신이 하면 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방 간에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으로 용서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즉각적이지만 화해는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를 13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3년 뒤에 나타나셔서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다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과 기도입니다. 아무리 화해가 잘되지 않아도 내 입장에서 끝까지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축복해야합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상대방의 마음도 돌이켜 완전히 화해를 하게 만드십니다.
로핑크가 한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죄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아니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용서받은 잘못이 있기에 한없는 용서가 자라나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갈라진 틈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온갖 골짜기를 뛰어 넘으며 화해의 길을 찾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분쟁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분쟁이 여느 사회와는 달리 해결되어지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끝으로 십자가와 고난이라고는 또다시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죽되, 또한 그분과 함께 일으켜 지기에 매일 매일 부활절을 경축하는 그런 교회를 말한다”
우리가운데 이런 완전한 화해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일. 교회를 보호하기< 엡 4:3>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러분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전도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은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도와 선교는 교회의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런데 전도와 선교를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 됨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성부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시는 계획가운데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서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서로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반대가 되는 육신의 역사, 사탄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갈5장에서 육체의 일 즉 사탄의 일을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을 따라서 교회의 하나 됨을 끝까지 지켜나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의 본질인 하나 됨을 지켜나갈 수 있겠습니까?
1. 첫째, 서로의 차이를 공유해야합니다.
오빠생각이라는 영화를 보면 멋진 대사가 나옵니다. 6.25 전쟁 때문에 두 친구가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 서로 싸웁니다. 합창단에서도 서로 싸웁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싸우려면 멋지게 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애니로리”라는 노래를 서로 화음이 다르게 하여 부르게 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서로 다른 화음입니다. 그런데 서로 다른 화음이 조화가 되어서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가 되었습니다. 도미솔은 서로 다른 음이지만 서로 화음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 정말 서로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어떨 때는 저 사람은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교회에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만 더 마음을 넓게 하여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실 우리가운데 단 한 사람도 필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원리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일을 유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또 우리가운데 과거의 전통을 중요시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운데 시대에 맞게 변화하려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우리가운데 조용한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운데 시끄러운 사람도 필요합니다. 저는 한때 무조건 교회는 조용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조용하다는 것은 죽어가는 증거입니다. 교회는 시끄러울 필요도 있습니다. 기도로 시끄럽고, 웃음소리로 시끄럽고, 새 가족을 환영하느라 시끄럽고, 교회를 더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시끄러운 소리들도 있어야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 절대라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교회는 절대 독창하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서로 다를지라도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나가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현실적인 기대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은 이상주의자입니다. 모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상주의자는 결국 자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남들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상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모두 연약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 불구하고 주님이 사랑하셔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연약함을 서로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현실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하나 됨이 지켜질 수 있습니다.
3. 비판하기보다는 격려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보다 한발 짝 뒤로 물러서서 섬기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항상 더 쉽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서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판을 하면 무엇이든지 잘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비판을 통해서 잘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비판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낙심만 줄 수 있습니다. 롬14장19절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우리의 모든 힘을 서로 사이좋게 쓰기로 동의하자, 격려하는 말로 서로 돕자. 잘못을 지적해서 서로를 끌어내리지 말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험담을 귀담아 듣지 말아야합니다.
험담은 교회가운데 퍼뜨리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또 험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훔친 물건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즉 험담을 듣는 것은 우리도 험담을 하는 사람과 같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험담을 할 때 용기를 내어서 “그만하세요. 저는 그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고 말해야합니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즉 험담하는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고 잠언서(20:19)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험담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대면하여 그만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서에서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갈등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 성경적인 방법을 익혀야합니다.
갈등이 일어나고 있을 때 상대방에게 용기를 내어서 직접 이야기하기 보다는 제삼자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제일 먼저 당사자에게 가서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하고 거기서 그쳐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고 듣지 않을 때 두 사람의 증인을 세워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을 때 공동체 앞에서 이야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 목사와 지도자들을 지지해 주어야합니다.
완벽한 지도자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킬 책임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목사들은 상처를 받았거니 갈등하고 있거나 성숙하지 못한 교인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그 어떤 목사도 그들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릭워렌 목사님은 이것은 예수님도 하지 못할 일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3:17절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들은 성도들의 격려, 기도, 감사,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살전5장 12,13절을 쉬운성경에서는 “형제 여러분 가운데 수고하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지도하는 분들을 존경하십시오. 여러분들을 위해 일하는 그들을 각별한 사랑으로 대해주십시오, (그들과) 서로 화목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고 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에 복을 주시겠습니까? 하나 된 교회에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어떤 교회에 사람들이 찾아오겠습니까? 서로 하나 된 교회입니다. 또 어떨 때 우리 개인과 가정이 복을 받겠습니까? 교회가 하나 됨으로 교회가 먼저 영적인 복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을 축복을 다 함께 누리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다. DAY-22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이제 오늘 부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세 번째 목적인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구원하신 목적이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기본진리를 속량 즉 구속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이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구원받은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닮는데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습니까?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또 우리 주위의 사람들, 그리고 내가 격고 있는 모든 상황을 이용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결국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를 하는 목적도 무엇입니까? 내 안에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경건의 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와 말씀으로 우리를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또 우리의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여러사람들을 주셨습니까? 그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더 깍이고 깍여서 더 예수님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상황들을 주셨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을 닮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간사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간사를 하고 난 다음에 생활이 그 전보다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간사를 할 때 생활이 어려워서 집에 물건을 하나씩 팔았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내가 과연 간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지금 나는 과연 바른 하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그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아 그렇구나 그 당시 저는 내가 경제적으로 생활적으로 좋아지느냐 나빠지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활적으로 좋아질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가운데서 과연 내가 더 예수님을 닮게 되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생활적으로는 더 어렵지만, 내가 간사를 하면서 그 전보다 더 예수님을 닮게 되었는가? 내가 그 전보다 예수님의 낮아지시고 섬기시는 모습을 더 나타내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생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그 전보다 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생활적으로는 힘들지만 더 예수님을 닮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인도하셨구나 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을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애굽의 총리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애굽의 총리라면 절대 그를 감옥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절대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그를 여러 가지 고난의 상황으로 인도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애굽의 총리보다 요셉이 더 낮아지고 낮아지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감옥에서 낮아질대로 낮아져서 나중에 모든 사람에게 잊혀질 정도로 그를 낮아지게 하신 후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인도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애굽의 총리, 경제적인 성공, 높은 자리, 편안한 삶, 절대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만일 나는 이렇게 예수를 오래 믿고 있는데 왜 내 살림살이가 더 나아지지 않는가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비록 경제적으로는 더 좋아지지 않았지만 내가 더 예수님을 닮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증거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말해서 내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상황적으로 이 전보다 더 편안하고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지금 나는 그 전보다 더 예수님을 닮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의 온전하신 인도하심을 바르게 받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말씀을 그 전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그 전보다 기도를 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 전보다 말씀을 더 많이 알고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도록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말씀을 더 많이 알고 기도를 더 많이 하는데도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도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들은 모두 예수님을 닮은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이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은 변화된 삶을 살아갈 것인지. 그렇기 위해서 더 성장하고 성숙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고 기도하겠습니다.
결론을 말씀을 드리면 예수님을 닮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했습니다.
23일. 성장하는 방법< 엡 4:13-15>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은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보면 우리가 성장해야할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장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영적인 소경이 되어 우리의 앞날을 보지 못하는 자가 되고, 열매가 없는 자가 되고, 무엇보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확신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가 성장하지 아니하면 나이가 자라도 신앙의 연조가 길어도 영적인 어린 아이가 되어 사람의 속임수와 유혹에 빠져 온갖 여러 가지 교훈의 풍조에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교회가 신앙에 있어서 어린아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그들은 모일 때 마다 서로 방언으로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또 누구보다 많은 구변의 은사 즉, 말의 은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린도교회를 가리켜 내가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은사를 가져도 신앙적으로는 어린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어도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전체의 말씀을 종합할 때 신앙적으로 어린 자와 성숙된 자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적으로 어린아이는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반대로 성숙된 자는 자기보다 남을 더 생각합니다.
신앙적으로 어린아이는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란 인격적인 열매, 또는 일에 있어서 열매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된 자는 인격이나 사역에 있어서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는 조그마한 일이 있어도 흔들리고 요동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된 자는 그 어떤 일이 있어서 흔들리지 않고 항상 변함없이 주님과 성도를 섬기면 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앞날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잘 분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는 앞날을 잘 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숙된 사람은 지금 내가 어디 있으며 어디로 가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잘 알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적으로 어린아이는 구원의 확신과 기쁨,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성숙하면 구원의 기쁨과 감격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신앙적으로 더 자라며 성숙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떻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제일 먼저는 신앙으로 성숙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런데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성장하고 성숙해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우리가 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전혀 성장하고 성숙해야겠다는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신앙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신앙적으로 성숙된 자가 되는 것이 좋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신앙적으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말하면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신앙적으로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만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만을 돌보기를 원하고 있기에 그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만을 돌보기를 원하는 것이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자기만이 아니라 남을 돌아볼 줄 알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내가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제일 필요합니다.
둘째. 신앙적으로 성숙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본받지 말아야합니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이 무엇입니까? 더 높이 되고, 더 가지고 차지하려고, 더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앙의 성숙은 어떤 모습입니까?
더 낮아지는 것입니다. 또 비우는 것입니다. 더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너무 쉽게 예수님을 본받자고 하는데 예수님을 본받는 삶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거의 혁명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삶은 세상적으로 말하면 완전히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나를 낮추고 더 낮추면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나를 더 비우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예수님처럼 더 희생하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신 열매로 우리를 갚아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적으로 성숙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더욱 힘써야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면 우리가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은 더욱 힘쓰는 일 밖에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내가 어떻게 하면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전도의 열매를 맺을까? 제일 큰 고민이고 숙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더욱 힘쓰라는 것입니다. 아니 나는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열매가 없습니까?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그러면 더욱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어느 순간 저절로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숙하지 않습니다. 더욱 기도하기를 힘쓰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힘쓰고, 더욱 말씀을 전하기를 힘쓰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한자가 되어 주님을 본받아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4일. 진리로 인한 변화< 딤후 3:16-17>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어떻게 더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삼주만 말씀을 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떠난 이후에 그 교회는 신앙이 더 성숙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비결이 살전 2장 13절에 있습니다.
“살전 2:13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해야합니다. 누가 전하든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전할 때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떨 때 내게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나의 죄를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을 죽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듣고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 말씀이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 가운데 그대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적용에는 4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첫째, 말씀의 적용은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해야합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위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 들어야하는데” 라고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구체적으로 적용해야합니다.
요즘 관계회복에 관한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거저 이론적으로 듣지 말아야합니다. 먼저 나를 위한 말씀으로 또 구체적으로 적용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또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할 때 이것도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염려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내가 맡겨야할 염려를 기도로 바꾸어야할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또 내가 염려하는 가운데 감사해야할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 가운데 그대로 순종해야합니다.
약1장 22절-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 말씀을 곧 잊어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야 그 말씀에서 약속하신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라 그러면 하늘의 문이 열린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듣고 순종할 때 정말 하늘의 문이 열리는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에 구체적으로 순종함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묵상이란 말씀을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마음 판에 세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세기고 묵상하지 않으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신에 다른 소리를 묵상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마음 판에는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13장에 보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순간에도 항상 가시와 같은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소리가 들어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부정적인 소리, 할 수 없는 낙심의 소리와 같은 사탄의 소리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소리를 우리 마음에 두어서는 되지 않습니다. 마13장에 나오는 가시밭의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자라는데, 마음에 가시가 자라면 결국 가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막아서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염려와 걱정과 근심의 가시가 있습니까? 또 내 마음속에 부정과 낙심의 가시가 있습니까? 이런 사탄의 가시들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우리 마음 속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만을 되 세기고 묵상하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을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한다고 끊임없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세기고 사람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 따른 풍성한 열매를 맺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5일. 어려움으로 인한 변화< 롬 8:28~29>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먼저 변화하고 성숙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또 우리에게 말씀도 필요하고,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난입니다. 그래서 백편의 설교보다 한편의 채찍이 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더 변화시키시고 성장시키시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려움과 고난이 있을 때 우리의 자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 있을 때 그것을 통해서 더 변화되고, 성장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않고 도리어 더 큰 낙심과 좌절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을 때 어떤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취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고난이 있을 때 우리에게 3가지의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너무나 큰 고난 때문에 심지어 자신이 태어난 날 조차도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29:11)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요셉은 그를 종으로 팔았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창50:20)라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 (사38:17) 고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니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파멸시키거나 단순히 어렵게 하시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이와 같은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고난가운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이런 믿음이 없으면 고난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또 사람을 원망합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포자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만일 고난을 통한 하나님의 더 선한 뜻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고난과 고통을 주신 하나님께 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의 포장지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주실 때 고난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잘 이겨내고 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고난가운데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뻐한다는 동사는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아갈리아스데). 우리가 시험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잠깐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주신 이유를 잘 생각하고 묵상하면, 우리는 그 어떤 시험 가운데서도 크게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고난가운데서도 펄쩍펄쩍 뛰면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보다 더 귀하게 연단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또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여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와 상급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우리로 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또 고난은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시고, 더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3)고난가운데 끝까지 인내하고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야고보서에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3-4)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한 순간 될 수 있지만, 우리의 인격이 자라는 것은 길고 느린 인생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이 자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면 “ 하나님 왜 나입니까? ” 라고 질문하지 마시고 “ 하나님 내가 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길 원하십니까?”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이 있습니다. 미국에 "수잔 앤더슨" 이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느날 눈 수술을 받다 그만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직장 출퇴근을 도와 주었습니다.
얼마후..남편이 아내를 더 연단시키기 위해서 말했습니다. "여보 ! 계속 이럴 수 없으니
내일 부터는 혼자 출퇴근 해요."
그 말에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낀 그녀는 이를 악물고 혼자 출퇴근을 했습니다.
여러번 넘어지며 서러운 눈물도 흘렸지만 점차 출퇴근이 익숙 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그녀가 버스를 탔을 때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했습니다.
"부인은 좋겠어요! 좋은 남편을 두셔서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돌봐 주시네요!"
알고보니...남편은 매일 아내가 버스를 타면 같이 타 뒷자리에 앉으며 아내의 출퇴근을
말없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넘어지고...서러운 눈물도 흘리고..상처와 고독도 있지만..그때마다
"나의 등 뒤"에선 누군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랑을 떠나도 그 사랑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랑이.."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등 뒤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난가운데 끝까지 인내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성장의 축복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6일. 시험을 통해 성장하기< 약 1:12>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모든 시험들은 죄를 짓을 수 있는 동시에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탄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파괴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싶어 하신다. 우리가 죄를 짓는 대신 선을 행하기로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더욱 자라게 된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 하실 때 반드시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만 허락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어떤 것입니까?
1)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첫째로,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이 그 시험을 감당할 만 하다고 보시니까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절대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험이 감당치 못할 시험이라면 반드시 막으십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 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말했습니다. “욥이 이 시험을 받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내 종 욥은 그 시험가운데서도 끝까지 나를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욥의 시험을 허락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 욥이 그 시험 가운데 넘어져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시험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시험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충분히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보셨기에 허락하셨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또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처음 시험을 받을 때는 그 시험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그 시험과 함께 그 시험을 감당하고 남음이 있는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시험이 도무지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과 함께 동시에 주신 감당할 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시험은 감당할만한 시험이 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광야는 아무것도 먹을 것 없는 광야입니다. 도무지 이스라엘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만 준비해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함께 하늘의 만나를 같이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 광야를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광야는 시험거리가 아니라--그들의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광야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과 함께 그 고난을 이기고도 남는 넘치는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난과 함께 그 모든 고난을 이기도 남은 하나님의 위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은 미쁘사(믿음직 스러우사) 시험을 허락하실 때--반드시 그 시험을 피할 길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이것을 원문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할 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이 정하신 피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이 정하신 길로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험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길입니다. 또 그 시험 때문에 시험에 들어 하나님에 대하여 낙심하는 길입니다. 또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며 불평하는 길입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낙심하과 좌절하는 길입니다--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피할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분명히 하나님이 정하신 피할 길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험당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신 피할 길은 무엇입니까?
1)첫째는, 하늘을 향해 열린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다 길이 막혔을 때, 하늘을 향해 열린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가운데서 이 땅에 임하여진 하늘나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서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깊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시험이란 절대 괴롭고 힘든 길이 아니라-우리가 하늘의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축복의 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또한 현실적인 입장에서도 분명 하나님이 정해두신 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두신 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999가지를 막히고 실패하게 하시지만, 마지막에 남겨두신 1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깜깜한 먹지와 같지만 햇볕에 비추면 그 속에 구멍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깜깜해도 하나님께서 현실가운데 피할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없어도, 잡히는 것 없어보여도 이 하나님을 믿고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현실가운데서도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피할 길이 구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가운데 절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시험이 있더라도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시험이후에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마지막으로 피할 길이란 말씀의 길입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길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 6절에서 고린도교회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넘어서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이 시험을 당할 때 기록된 성경 말씀 외에 특별한 말씀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너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신구약66권의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시험을 감당할만한 모든 말씀이 완전하게 충족되게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고난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신구약66권의 기록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 안에 시험가운데 위로가 있습니다. 그 말씀가운데 시험가운데 우리에게 주시는 힘이 있습니다. 그 말씀가운데 우리가 시험가운데 걸어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해결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험가운데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고난과 시험을 능히 감당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7일. 시험을 이겨내기< 고전 10:13>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딤후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후서에 보면 청년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청년의 시기에는 정욕의 시험에 제일 빠지기 쉽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러시아 선교사님 사모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연예인을 지망하는 학생들이 러시아에 많이 오는데, 그 학생들을 잠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다 러시아에 유학 와서 남녀가 동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이 나중에 유명한 연예인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금 인기도 없고 아무 것도 없을 때도 이렇게 하는데 나중에 인기도 얻고 모든 것을 가지면 더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요즘 보는 연예인 성추문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들켜서 그런 것뿐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세상에 중간지대는 없는 것 같다. 정말 예수님을 잘 믿어서 깨끗하게 살아가든지, 아니면 정욕에 빠져서 살아가든지 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오늘이 청년대학부 축복의 날인데, 오늘 본문 중 하나가 청년의 정욕인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특히 청년의 때에 정욕의 시험과 유혹에 빠지기가 쉽니다.
그러면 어떻게 정욕의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1. 첫째는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합니다.
먼저는 일단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성령충만해 도 유혹이 되는 상황에 들어가면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 정욕입니다. 성경은 절대 정욕을 이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정욕을 성령의 능력으로 물리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정욕은 무조건 피해야합니다. 베드로후서1장 4절에서도 “--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피해야합니다. 만일 음란물에 중독이 되어있다면 무조건 끊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건 피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대신에 청년의 정욕을 다른 건전한 방향으로 불태워야합니다. 고신대를 다닐 때 학교 옆에 청소년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매일 학생들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제가 아는 형님뻘 되는 동기와 함께 같이 마라톤을 했습니다. 특히 송도는 매연이 너무 심합니다. 그런데 그 도로 위를 매일 마라톤을 한다는 것을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왜 그렇게 하는가를 알았습니다.
청년의 정욕을 다른 곳에 불태워야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떨 때 정욕의 죄에 빠지기 쉽습니까?
세이어즈는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와 바닥으로 내려갈 때 정욕의 죄에 빠지기가 쉽다고 했습니다.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르면 사람들은 교만하게 되고 방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욕의 죄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인생이 바닥을 칠 때 정욕의 죄에 빠질 위험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 특별히 청년들의 경우 삶의 분명한 목표도 없고 활력도 없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정욕의 죄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더 큽니다. 이렇게 청년들이 생에 분명한 목표와 활력이 없으면. 현실도피주의가 되고, 잘못된 쾌락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무기력과 허무함과 권태에 빠지면 정욕의 죄에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정욕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그 비결은 우리의 정욕을 주님을 향해 불태워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의를 위해서 청년의 정욕을 불태워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먼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고 합니다.
저는 20대 때 기억이 나는 것은 성경공부 했던 것 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사성경공부라고 해서 교사들끼리 모여서 정말 열심히 성경공부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지금 청년여러분들이 주님과 진리의 말씀을 향해서 불이 붙든지, 아니면 세상의 정욕으로 불이 붙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주님과 진리를 향한 불이 붙어 있지 않으면 얼마든지 정욕의 시험이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은 청년축복의 날이니까 청년들을 위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청년의 때는 오직 두 가지 고민밖에 없습니다.
진로와 결혼입니다. 이 중에서 특히 진로의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대학교 때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대학은 1학년 때 부터 취업준비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도록 취업준비를 하는데 실제 원하는 직장에 거의 들어가지 못합니다.
저는 야곱과 요셉의 삶을 통해서 청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제일 먼저 삶의 우선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취업을 준비해도 삶의 우선권이 바로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으면 세상이 우선이 되고 취업이 우선이 되어야 그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이 인간적으로 그렇게 최선을 하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우선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았을 때,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쫓기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의 우선권이 어디 있는지 잘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2. 둘째,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라 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요셉에게 네가 장차 애굽의 총리가 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요셉도 애굽의 총리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요즘 언론에서 제일 문제가 되고 있는 미르 재단의 차모씨는 “새롭게 하소서”에 나와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조건 크게 해 달라고만 기도했는데 정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크게 자신을 사용하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크게 되는 것이 목표이다 보니까 권력의 힘을 빌어 부정하게 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찬들이 세상에서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크게 되고 잘되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크게 되고 잘 되기는 했는데, 온갖 부정한 방법을 다 동원해서 크게 되고 잘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너무 역겨워보이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던 삶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0대의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인도하셨고, 또 감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큰 자가 되기 전에 작고 사소한 일에 남을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
사실 요즘 청년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중소기업에서는 청년들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1,2백만원받으려고 그렇게 작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면서 그냥 실업자로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사소한 작은 일을 섬기는 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작은 일에 한 매듭일 짓고 나면 또 그 다음 매듭으로 인도하시고 또 그 다음 매듭으로 인도하십니다.
중요한 것이 매듭입니다. 대나무가 길고 튼튼하게 자라는 이유는 한 매듭 한 매듭 충분히 맺어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소하고 작은 일에 매듭을 잘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일에 충실한 매듭을 지으면 하나님께서 또 새로운 매듭으로 여러분들의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선교사님의 칼럼을 보니까 “싸가지란 네 가지”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양심, 개념, 교양 그리고 예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사가가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가지가 있어야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네 가지 중에서 예의란 감사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전체를 두 단어로 하면 은혜와 감사입니다. 은혜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감사란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성경의 지식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 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헛된 것입니다. 또 감사를 모르는 인간이 되면 그것도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은혜를 아는 감사는 인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의 최대의 목표인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는 청년들과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8일. 시간이 필요하다< 빌 1:6>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그리스도를 닮는 삶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빨리 자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디더라도 완전하게 자라야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는데 시간이 필요합니까?
1. 먼저 배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을 통해서 깨닫고 배우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이것을 배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순종함으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뒤에 2세대 이스라엘은 이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여호수아의 말을 믿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연세가 드신 성도님들은 평생을 통해서 이것을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하나님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젊은 세대들은 이것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 시간이 지나면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장을 배우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2. 또 우리가 성장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아직 우리에게 버려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장해서 더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속에 내가 죽고 예수님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어 없어진 만큼 내 안에 예수님이 더 크게 자리 잡는 것이 성장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죽어지고 버려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없애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의 고집, 나의 감정 등 아직 내가 버려야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금방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가운데서 점차적으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것이 더딘 인생의 여정이만, 이 여정은 정말 행복한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행복합니까? 정말 예수님처럼 나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습니까? 정말 예수님처럼 끝까지 인내하고 또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또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비록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힘들고 오랜 과정이 필요하지만 얼마든지 해봄직한 가치 있는 과정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또 성장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습관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데,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습관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을 만들고, 그 사람의 인격은 인생의 태도를 만들고, 그 사람의 인생의 태도는,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이 변화되면 결국 그 사람의 살아온 인생이 바뀝니다.
우리가 힘들지만 이렇게 40일 기도회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40일 기도회가 없었다면 이 시간 우리는 그냥 잠만 잤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그냥 고민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그 동안 매일 말씀을 준비하는 것 때문에 10시 정도에 자고 새벽 2-3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내 생활이 아주 단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전 같으면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을 것인데 고민할 시간이 없이 말씀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 이런 긴 시간을 통한 좋은 습관들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기도를 하면서 앞으로 이런 시간들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마치 낚시와 같습니다. 물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물과 함께 물고기도 흘러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두면 물도 흘러가고 고기도 흘러갑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낚시터에서 가만히 있으면 그냥 흘러갑니다. 그래서 열심히 낚시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흘러가는 시간에 떠내려가는 기회들을 열심히 낚아야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20여 일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아무 것도 낚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지만 열심히 나와서 말씀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라도 말씀을 깨닫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또 새롭게 다짐했다면 우리는 흘러가는 세월에 소중한 것들을 낚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는 말씀에서 세월을 아낀다느 말은 “세월을 구원한다 건져낸다, 또는 세월가운데 기회를 건져낸다” 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을 물 흘러가듯이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들을 잘 건져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흘러가는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마시고, 그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나의 것으로 잘 건져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냥 시간을 보내고 세월을 보내고 나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고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서 더 익어가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좀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왜 불교에서 고승이 있는데, 기독교에는 고목이 없는가? 물론 불교는 도를 닦음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이기에 더 오랜 세월 수도를 하면 고승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우리가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더 성화되어 나중에 정말 나이가 더 들면 고목이 되어야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내가 나이가 든 만큼 비록 육체는 쇠약한다 할지라도 더 너그러운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 더 겸손한 사람, 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9일. 사명을 받아들이기< 엡 2:10>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번 주의 주제는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지으심을 받았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가 지으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전에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선한 일이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또 사람을 섬기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입으로만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섬기는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릭 워렌 목사님은 아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내게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없으며, 오직 내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정말 예수님이 내 마음속에 계시는 것인가 반문해보아야 한다. 구원받는 자의 마음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없으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고, 또 예수님이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으면 당연히 그 사람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남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섬기는 사역이라고 하니까 이 사역은 특별한 사역자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이 사역을 특별한 사역자만 할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섬김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두 단어라고 말하면 섬김과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섬김과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고 핵심입니다.
섬김은 인간적인 본능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섬김을 주는 것보다 섬김을 받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이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과 교회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0: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2절에서 이방인이란 이 세상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즉 이 세상의 집권자들은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주관하고, 또 그 지도자 밑에 지도자들도 힘과 권세로 군림하고 너희를 지배하는 줄 알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43절 앞에 보면 “그러나”라는 말이 원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은 높이 군림하고 대접받고 섬김을 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것은 높이 되기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섬김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닮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철이 되면 열심히 섬기겠다고 뜁니다. 그런데 나중에 선거에서 이기고 섬김으로 시작했다가 군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너희는(교회는) 그러지 말아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다는 척도는 우리가 얼마나 종의 마음을 가졌느냐를 가지고 판단해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많은 신앙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그 결과는 섬김의 정도를 가지고 판단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직분을 받은 목적도 무엇입니까? 그것도 섬김입니다.
저는 두 주간 동안 개인적으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계속 묵상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비유와 역사적인 사실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마지막 종말 때 두 양과 염소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거기서 양과 염소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염소 편에 속한 사람은 말하기를
“마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가난하고 병든 자를 섬기는 행위를 더해야 구원을 받고, 반대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가난한 자를 섬기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또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눈만 감으면 우리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염소 편에 속한 사람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합니다. 머리로만 주여 주여 합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이들 마음 가운데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본능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본능은 섬김입니다.
우리가 억지로 섬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우리는 섬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섬김으로 내 안에 예수님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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