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금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다< 사 43:21>
사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우리 모두에게 저마다의 특별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엡2: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의 만드신 바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것을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기 원하십니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들입니다. 둘째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넷째는 우리의 성격입니다. 다섯째가 우리의 경험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통해서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생각할 때 잘 하느냐 못하느냐를 가지고 말합니다. 또 어떤 열매를 거두었느냐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 했느냐 못했느냐 어떤 열매를 거두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묻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정과 충성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몇 달란트를 남겼느냐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은사들로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악한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게으른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두 달란트 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작은 은사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기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 얼마나 잘했느냐를 묻지 아니하십니다. 지난주에 목요전도를 하는데 어떤 연세 드신 성도님이 전도지를 들고 한분 한 분에게 찾아가서 교회 나오시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평소 그분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또 몸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열매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비록 작은 은사라도 작은 일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일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칼빈은 그의 옷깃에 하나님이여 나의 마음 나의 심장을 드립니다 는 뜻으로 하트를 손으로 받치는 그림을 세겼다고 합니다. sfc의 로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심장 박동을 들어야합니다. 만일 그 사람이 어디에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가는 곳에 심장이 뜁니다. 감정적으로 흥분합니다. 물론 단순히 감정만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마음 가는 곳에 감정도 함께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을 생각할 때 여러분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까? 마음이 흥분이 생깁니까? 우리가 드라마나 스포츠를 볼 때 만큼이나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자신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여 내게 하나님을 향한 뛰는 가슴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열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가장 잘못된 것이 무엇입니까?
억지로 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또 단순한 의무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 습관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빠진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입니다. 열정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불이 붙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불이 붙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 마음에 교회 안에 형제와 자매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해서 불이 붙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잘 하건 못하건 간에 열정을 다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하는 사람은 그 일을 즐깁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서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을 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갑자기 공부가 재미있어집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생깁니다. 그러면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전교에서 10등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무엇을 하든지 공부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친구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잘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님께 대한 열정이 식고, 전도에 대한 열정이 식으니까 공부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하루 24시간 주님을 생각하라고 하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루 종일 주님만을 생각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억지로 시간을 내어서 주님을 생각하려고 하면 사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정말 뜨겁게 사랑하면 하루 종일 주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가운데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 충만하면 주님을 하루 종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저도 하루 종일 주님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루를 돌아보면 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내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가 있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기도하실 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정말 주님께만 가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감정과 열정이 주님을 향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은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부족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1. 내 모습을 이해하기< 시 139:13-14>
시139: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께서는 첫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오늘은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이 부분은 은사와 비슷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은사와 능력을 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사와 능력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를 원하십니다. 또 네 번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격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아주 뜨거운 다혈질과 같은 성격이었고, 바울은 아주 차분한 담즘질이고, 예레미야는 감성이 풍부한 우울질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어떤 성격이 더 좋고, 어떤 성격이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뜨거운 성격은 뜨겁게 사용하시고, 또 바울과 같은 차분한 성격은 그 대로 사용하시고, 또 감성한 풍부한 예레미야는 그 성격대로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과거의 경험들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롬8: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것이란 우리가 과거에 격은 모든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합력에서 반드시 선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거에 어떤 일들을 통해서 배우고 경험할 수 있습니까?
먼저는 우리가 자라면서 가정을 통해서 배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자라면서 학교를 통해서 배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셋째는, 우리가 일했던 직업을 통해서 배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넷째는 우리가 경험했던 영적 체험들을 통해서 배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다섯째는 우리가 과거에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던 일이 있습니다.
여섯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고통스러운 경험들 즉 어떤 고난의 문제나 상처 가시 등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우리가 격은 일등 중에서 특별히 어떤 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시겠습니까?
마지막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고통스러운 경험들 즉 우리가 과거에 격은 고난의 문제, 상처 가시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우리가 격은 그 어떤 상처도 절대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우리가 격었던 가장 큰 아픔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장애인 아이를 둔 부모를 대상으로 사역할 때 장애인 아이를 둔 부모보다 사역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알콜중독자 사역을 할 때 과거에 알콜중독에 빠졌다가 그 문제를 믿음으로 해결한 일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아픈 경험들을 허락하십니다. 예를 들어 요셉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청소년시절에 형제들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또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술맡은 관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술맡은 관원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과거의 상처로 말하면 요셉만큼 많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셉이 과거에 일들 때문에 상처를 받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누구를 원망했다고 하는 말씀을 한군데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은 이 모든 과거의 상처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말하기를 “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격었던 과거의 상처들이 영광스런 별들이 되게 하십니다.
제가 얼마 전에 선물로 받았던 책 제목이 “상처가 별이 되어”라는 책입니다. 부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별별가정이 별 가정이 됩니다. 즉 별별 문제를 격었던 가정이 이제는 아름다운 별을 이루는 가정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그 어떤 고난도 뜻 없는 것이 없습니다. 견디고 이기면 반드시 상처가 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살아 냅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 상처가 봉합이 되지만 우리가 격었던 과거의 상처들을 절대 잊지 말아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무조건 잊자고 하는데, 상처는 잊어서도 안 되고 절대 잊어질 수 없습니다. 단지 과거의 상처는 용서를 통해서 굳은살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에게 굳은살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 굳은살은 과거에는 상처였습니다. 그런데 용서와 세월을 통해서 이제는 그 어떤 살보다 더 튼튼한 굳은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굳은살은 그 어떤 것에도 상처 입지 않을 수 있는 굳은살이 되었고, 이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단단한 굳은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릭워렌 목사님은 우리가 이런 진리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감추지 말고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합니다. 사도바울도 죽음직전에 갔던 그의 우울증에 대해서 다 드러내놓고 정적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도 없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서운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겠습니다(고후1:8-10, 쉬운 성경)” 만일 바울이 격었던 수많은 과거의 아픈 경험들을 비밀로 했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공개된 아픔의 경험만이 많은 사람들 도울 수 있다”고 릭워렌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당신이 격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의 고통을 낭비하지 말라, 다른 사람을 돕는데 사용하라”고 릭워렌 목사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라고 합니다. 이 지팡이는 모세의 연약의 상징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나이든 것 밖에는 없어요, 하나님 저는 병든 몸 밖에 없어도, 하나님 저에게는 상처밖에 없어요, 하나님 저에게는 실패밖에 없어요”라고 하는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모습이 아닌 나의 현재의 이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2. 하나님이 주신 모습으로 섬기기< 롬 12:5>
롬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모습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 마음, 능력, 성격,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제일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알아야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해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는 세 가지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로서 내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이 은사입니다. 2) 내가 하고 싶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공동체사람)들이 잘한다고 인정해 주는 것이 은사입니다. 3)내가 하고 싶지만 잘 못하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볼 때도 잘 못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것을 해야겠다는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이 바로 은사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면 그 어떤 일을 통해서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내게 주신 은사는 무엇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 줄 알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또 하고 싶은 것일 경우에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 그가 하고 싶어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합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가려는 사람들이 무조건 원한다고 해서 갈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 있었던 교회 사람들이 인정해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에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혹 그가 그 일을 처음에는 잘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가지고 하다보면 결국 그 일을 잘 하게 됩니다.
그런데 릭 워렌 목사님은 이런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무조건 일단 무조건 해보라고 합니다.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수 십 개의 감춰진 능력과 은사가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상황으로부터 밖으로 나가서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해보라고 권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나이가 몇이든 시도해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70대나 80대의 나이로 자신의 감춰진 재능을 발견한 사람을 만나보았다. 나는 나이 아흔이 넘은 나이에 100키로 달리기 경주에 참가해 우승한 여인을 안다. 그녀는 78세까지도 자신이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냥 봉사를 시작하라, 사역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재능을 발견한다. 가르쳐보기도 하고, 그룹을 인도하고 조직하고, 악기도 다뤄보고, 십대들과 같이 일도 해보라, 해보지 않고서는 무엇을 잘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지금 내 마음이 어떠한지, 또 성격이 어떠한지를 잘 살펴야합니다.
또 내가 과거에 격었던 고난의 일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현재 나의 모습을 잘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삶의 우선권입니다.
사실 우리가운데 정말 탁월한 은사를 가진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무슨 일을 맡기면 정말 잘 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삶의 우선권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삶의 우선권이 자신의 개인이나 가정 자녀일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자신의 삶이나 가정을 잘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런데 개인과 가정과 자녀의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학개서에서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학1:4.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너희 행위를 살피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의 우선권이 어디 있는지 자신을 잘 살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40일 특새 첫날에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 집을 짓겠다고 하니 이제 내가 너의 집을 책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삶의 우선권을 바로 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용납하고 즐겨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모든 것을 다하도록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때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신과 남을 평가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고후10:12절에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후10:12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거짓선생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니까 자기가 제일 잘 한다고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자기를 칭찬하는 이런 거짓 선생과 더불어 감히 우리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또 오직 자기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 자신을 헤아리고 평가하니 그들이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 또 이런 거지선생들이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어 다른 모든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말에 있어서 어눌한 사도바울이 거짓사도라고 하면서 그를 판단하고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우리의 판단의 기준은 누가 되어야합니까? 종말에 오실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고전4: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실패자다. 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판단하시기 전에 절대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도 너무 쉽게 분별은 하되 판단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나는 주님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누구보다 주님께 더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 한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자들 중에서 아무 것도 칭찬을 듣지 못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판단과 평가가 아닙니다. 마지막 오실 주님께서 판단하시고 평가하실 때 잘 했다고 칭찬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3. 진실한 종의 행동지침< 막 10:43>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위대함을 그가 가진 권력, 소유물, 명성, 지위의 측면에서 정의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위대함을 신분이나 지위가 아닌 섬김(마음)의 잣대로 측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얼마나 섬기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섬겼느냐에 따라 결정하십니다. 리더십에 관한 수천 권의 책이 쓰였지만, 정작 섬김의 도에 대한 책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기는 원하면서 정작 종으로 남기는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종의 마음을 가졌느냐는 것은 말이 아니라 섬김의 열매가 우리의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느냐를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진실한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1)진실한 종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는 이런 일이 있고, 또 저런 일이 있어서 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은 진실한 종이 아닙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딤전 2:4). 우리가 진실한 종이냐 아니냐 기준은 우리가 과연 우리의 생활 중심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 중심이냐에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진실한 종입니다.
2)또 진실한 종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종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기준은 “나 중심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 중심이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실한 종은 먼저 자신을 잘 돌아 보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종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돌아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항상 나 개인의 문제에만 매달린다면 영원히 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문제가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다 보면 내 문제는 어느새 해결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의 가장 큰 유익입니다.
3)진실한 종은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항상 최상의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것이 되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건물의 작은 부분을 수리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도 해야 합니다. 또 저것도 해야 합니다. 또 말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전체를 가지고 최상의 것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최상의 것을 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고 말하면서 처음 말했던 작은 부분에 손도 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최고와 최상의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최상의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바에는 부족하지만 작은 것부터 하나씩 최선을 다해 시작해해야합니다.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한다면 한 영혼이라도 귀히 여기는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만일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한 영혼을 소홀히 여긴다면 절대 그 교회는 부흥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섬기기에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또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수퍼스타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교회는 최상을 그들의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교회를 섬기기 때문에 보통 달란트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잘하지 않으려면 하지도 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한 번도 하신 말이 아닙니다. 부족해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니까 오히려 더 섬겨야합니다. 그리고 그 부족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처음부터 어떤 일을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들백교회는 “그 정도면 괜찮다”는 원리를 가지고 사역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옆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주님은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서 운영되는 완벽하게 보이는 교회보다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4)또 진실한 종은 일의 귀천을 따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일을 귀하고, 어떤 일을 귀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볼 때 잘 보이지 않고, 천하게 보이는 그 일이 제일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또 활동적인 일과 비활동적인 일의 차이 두지 말아야합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 고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밖에 할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5)또 진실한 종은 끝까지 사역을 감당합니다. 중간에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종은 일을 주님이 맡기신 일을 중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종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여 주저앉을 권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종은 일을 하다가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단지 주님의 종은 끝까지 충성할 뿐입니다. 직분이나 직업에는 은퇴가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에 은퇴하는 날은 천국 가는 날입니다.
9)또 진실한 종은 자신을 선전하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역을 인정해줄 때 겸손하게 받아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을 더 높이려 할 때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진실한 종은 눈가림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 하는 사소한 일도 하나님 앞에 하는 엄위한 일로 여깁니다.
진실한 종은 절대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과 종의 마음은 함께 썩일 수 없습니다. 진실한 종은 화려한 조명 아래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가능하면 그 자리를 피하려 하고 음지에서 조용히 섬기는 일에 만족합니다.
이 땅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긴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큰 천국의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 상급이란 천국에서 가장 주님을 닮은 자로서 주님가까이 서 있을 영광을 말합니다.
또 이 천국의 상급이란 이 땅에서 우리가 더 깊은 영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한 종으로 섬기며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4. 종의 마음으로 생각하기< 민 14:24>
민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우리가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에 아마샤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를 하였으나 마음으로 행치 않았다(대하25:2)”고 합니다.
그러면 진실한 종은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합니까?
첫째,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란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이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만을 생각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매일 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만을 위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위하느냐를 날마다 선택하면 살아가야합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릭워렌 목사님은 “우리가 종의 마음을 가졌느냐를 알 수 있는 척도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이 무시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 가에 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을 메시지성경으로 보면 ”누군가가 너희를 부당하게 이용하면 종의 삶을 연습하는 기회로 이용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진실한 종은 주인이 아닌 청지기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실한 종은 돈의 문제에 있어서 분명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과 하나님을 절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물질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돈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일 때 돈이 우리를 따르지만, 돈이 우리의 주인일 때 우리는 돈을 따르는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을 하고 일을 하는 목적이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라면 진실한 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종은 하나님의 교회와 전도와 선교가 목적입니다.
세 번째, 진실한 종은 자신의 일에만 집중합니다.
진실한 종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사역을 하기에도 너무 정신없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로 바쁘다 보면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더 섬겨야합니다. 마르다의 문제는 단순히 일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원망했다는 것입니다.
또 진실한 종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렸을때 그것이 “낭비”라고 제일 먼저 비난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여인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항상 비판받을 것을 예상해야합니다. 또 비판에 대해서 방어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주님이 보시는 것이 전부가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주의 일에 비방꾼이나 훼방꾼이나 구경꾼이 되지 말고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또 진실한 종은 자신을 분별하되 너무 자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판단해서 잘하면 교만해지기 쉽고, 못하면 자기 자포자기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를 판단하실 이는 오직 주님이시고, 그 날은 주님이 오시는 종말의 날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며 실패했다 판단해도 주님이 오셔서 잘 했다 판단하실 수 있고, 우리가 잘했다 판단해도 주님이 오셔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4)또 진실한 종은 오직 주님의 칭찬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방을 그들이 한 일을 증명해주는 상패나 상장으로 도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 뒤에 직함을 넣어서 불러달라고 주장하거나 높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특별한 가운 입지 않습니다.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도 필요하지 않고, 이룩한 업적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측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후10:18)”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실한 종은 사람들의 평가와 칭찬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평가와 칭찬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5)또 진실한 종은 사역을 의무와 부담감으로 생각하지 않고 기회와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사역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 섬김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님이 상 주신다는 약속을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장 1절에 “하나님은 불의를 행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긴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그렇게 많은 복을 내려주셨습니까? 심지어 솔로몬에 범죄 했어도 왜 솔로몬의 시대에는 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까? 왕상11: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실한 종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겨도 하나님께서 내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섬겨도 하나님이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언젠가를 자녀를 통해서라도 갚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일들은 역사가 지나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은밀히 섬긴 그일 들은 반드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있어서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날은 그 사명이 다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썩어서 없어지는 자가 아니라 닳아서 없어지는 자로 서야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날에 우리가 부끄러움 없이 주님 앞에 설수 있을 것입니다.
아낌없이 남김없이 후회 없이 부끄러울 것이 없이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5. 약함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고후 12:9;13:4>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사람들은 다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숨기고 싶어 합니다. 또 그 약점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걸림돌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 약점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리어 사람의 약점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사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한 것들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강한 점들을 사용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과 영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한 부분들이 있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함으로 나갈 때 이제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잘 되었을 때 결국 하나님께 영광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해야합니다.
바울이 루스더라에서 기적을 행하며 전도를 할 때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그때 사도바울은 “행14:15.--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바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고 실수가 많은 인간임을 솔직히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마치 내가 이 말씀대로 다 사는 자인 것처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또 아무도 미워해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여러분들과 똑 같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지 저의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셨음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약함을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자랑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후12:9-1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약함을 기뻐하고 자랑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우리의 약함은 하나님께 더 의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의지할 때 우리의 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셔서--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게 하시고, 또 우리의 약점들이 우리의 강점이 되게 하십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연약함 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가장 연약한 부분들을 사용하셔서 그것이 그 사람의 강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점은 두려움이 많았고, 무엇이든지 잘 믿지 못하는 혈핵형으로 말하면 a형의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자신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통해서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누구보다 담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
-모세의 약점은 그의 급한 성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을 돌로 쳐 죽였고, 또 이스라엘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다고 해서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 약점을 사용하셔서 이 땅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의 약점은 겁이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타작을 할 때도 밖에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큰 용사로 만드셨습니다.
-다윗의 약점은 간통죄를 지었던 불의한 자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공의롭고 정직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원래 우뢰의 아들이라고 해서 한 성질 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사람이었지만-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충동적이고 의지가 약했던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인물들은 다 연약한 자들이었고,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점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게 하셨고, 그 사람의 강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약점을 숨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약점을 하나님께 헌신의 제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약점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며, 강점이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또 우리의 약함은 우리로 교만하지 않게 해 줍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준 것은 그로 하여금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또 우리의 약함은 우리가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강한 자라면 공동체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더 이상 공동체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강점은 경쟁심을 일으키지만, 우리의 약점은 공동체를 만들어준다”. 우리가 너무 강하면 모래알과 같습니다. 그래서 잘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점토같이 약하면 함께 잘 뭉쳐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눈같이 약한 우리들을 함께 모아서 강한 눈덩이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만일 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약점을 함께 엮으면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4)또 우리의 약점들은 서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강점을 약점이 되게 하시기도 합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일을 꾸미고 잘 해보려는 것 때문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강점인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평생 절뚝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치신 환도뼈가 어떤 것입니까?
나의 강한 자신감입니까? 실패를 모른 삶이었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약하게 만드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약함이 좌절과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6일. 사명을 위해 지음받았다< 요 17:18>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첫째목적 :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둘째목적 :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남
셋째목적 :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됨
넷째목적 : 지금의 모습으로 섬기기 위해.
다섯 번째목적 : 사명(mission)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소명이라고 하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소명 또는 사명을 위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즉 사명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사명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은사를 발견하는 법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게 주신 은사를 알면 내게 주신 사명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 로마서를 보면 내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공동체의 부르심이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내가 하고 싶어도 하나님만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불러 주지 않으면 내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이지 온전한 사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공동체의 부르심이 없는데 자기하고 하고 싶어서 가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지 않으려 할 때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는 마음에 불타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행20: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돈도 명예도 생명보다 귀하지 않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지금 거의 식물인간인 상태에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 많은 재물로 생명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에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생명보다 더 귀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단순히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원해서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원해서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예루살렘에 가면 더 환영을 받고, 또 좋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예루살렘에 가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성령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시기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은 자신의 생명조차도 내어놓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 같으면 절대 예루살렘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마음 가운데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하지 않으려 생각해만해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불타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내가 좋아해서 하고 싶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또 사람들이 나를 부르고 원해서 하는 차원도 아닙니다.
나의 안락한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더 큰 고난의 자리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그렇습니다. 그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가 안락하게 있었던 페르시아의 수산궁을 떠났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목회를 하면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굳이 목회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도 아버지와 같이 지금 같은 고난을 격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말하시기를 내가 아는 후배에게 너는 절대 이 길을 걷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목사님이 만류했던 그 젊은 청년도 아버지가 목회를 하시면서 큰 어려움을 격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형제가 함께 신학을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은 절대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후회하지 않고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명을 위해서 많은 고난을 각오하고 있고, 심지어 생명을 잃을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이 그런 고난을 각오하겠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명에는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과 그 목사님과 또 우리를 사명에 목숨을 걸게 한 원동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도 바울처럼 특별한 선교지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 목사님처럼 목회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모두에게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결국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곳이며,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곳(또 지금 현재)을 내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모두가 다 환영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현재 이곳에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재 이곳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은혜와 영광과 특권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현재 이곳에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이곳에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7. 삶의 메시지 나누기< 살전 1:8>
살전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부르신 목적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공통된 사명은 오늘 여기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증이라고 합니다.
이번 주일에도 오후예배 시간에 우리 성도님들이 간증을 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상 간증을 하시라고 하면 대부분 나는 특별히 간증할 것이 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앞에 서서 남에게 간증하는 부분이 부끄러운 것이지 간증할 것이 없는 분은 우리가운데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자체가 간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에 있어서 제일 좋은 수단은 간증입니다. 사도바울도 사도행전에 보면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어떻게 예수를 만났는가를 가지고 전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간증이란 제일 먼저 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믿기 시작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만나기 전에 어떠했는지, 그리고 내 삶 가운데서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삶을 예수님께 헌신했는지 또 예수님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제일 먼저 나누는 것이 간증입니다.
우리가 가운데 예수를 믿기 전에 세상가운데 있든 분들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운데 모태신앙인 분들도 있습니다.
구원파에서 한때 전도를 하면서 당신은 언제 구원받으셨습니까? 라고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서 구원파에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파에서 우리의 약점을 꿰뚤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할 때 우리가 정확하게 몇날 몇시에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바람이 불면 어디서부터 불기 시작한지는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구원에 대해서 정확한 날짜와 시간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이 불어서 나타난 흔적들은 분명히 있는 것처럼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예수님을 만나서 내 삶의 방향에서 있어서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이것을 보통 회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회심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합니다. 저는 정확하게 중학교 때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내가 죽어도 천국에 가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내 죄를 예수님에게 회개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때 성경을 보는 가운데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 일찍 나와서 답안지를 고쳐쓴 죄가 생각이 났습니다. 만일 제가 성경을 매일 보지 않았다면 그 죄가 심각하게 와 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하기 전에 매일 쪽 복음을 보는 가운데 그 죄가 생각이 났는데, 너무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제 죽으면 과연 천국가겠는가 이러다가 지옥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도사님에게 죄를 어떻게 회개하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천국가게 되는 가를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개하면 된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회개해야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먼저 회개하고 또 사람에게도 찾아가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다음에 빨간 성경을 들고 초등학교 6학년 정기대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선생님에게 저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책을 선물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를 믿던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고 난 다음에 돌아오는 초등학교의 골목길을 아직 잊을 수 없습니다. 제게 있던 죄의 짐과 사슬이 완전히 끊어진 느낌이었고, 마치 이 땅에 있지만 날아갈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내가 공부하는 목적이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제가 친구들에게 했던 말 중에서 기억이 나는 것은 종교의 의미입니다. 종교라고 했을 때 종이란 꽂부리 종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르침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최고의 가르침은 예수를 믿는 것이라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회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제 삶이 그 이전과 그 이후가 확실하게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귀신이 대한 공포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서울 강서교회 황신기목사님이 당시 중등부 교사였는데, 성경공부시간마다 계속해서 성경에 대해서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수요예배를 집 가까운 합동측 서부교회라는 곳에 드렸는데, 8월이 되면 대구는 너무 덥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기독교 영화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제주도에서 선교를 하시다가 핍박을 당하였던 이기풍목사님 선교영화를 보았습니다. 저는 그때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고 핍박을 당하시는 그 장면이 너무 감동이 되어서 나도 저분처럼 목사가 되어서 복음을 전해야겠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모태신앙이든 아니면 중간에 예수님을 믿었던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정말 예수님을 만났던 회심의 사건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종교생활을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종교생활이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교회를 나오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이란 단순히 내가 단순히 의무적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내가 하나님께 원하는 그 무엇을 바라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신앙생활입니까? 예수님을 정말 인격적으로 만나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내 삶 가운데 회심의 사건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내 삶 가운데 근본적인 삶의 변화가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지만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만일 네가 거듭나지 안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정말 거듭나셨습니까? 정말 회심을 경험하셨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정말 거듭나심으로 이 땅에 임하여진 하나님나라를 보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보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 안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예수님으로 인한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가운데 있습니까? 또 내 삶이 아직 완전히 않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서 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경험을 간증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8일. 월드 크리스챤 되기< 막 16:15>
막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우리가 사는 이웃을 가리키고, 온 유대는 우리가 사는 나라를 가리키고, 사마리아는 다른 문화권을 가리키고, 땅 끝은 세상의 땅 끝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가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세계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는 전도만 아니라 선교를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 중심의 사고로 바뀌어야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와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또 우리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더 넓게 기도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요즘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정말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가운데 있습니다. 어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와 통화를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위기에 있습니다.
정말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의 주인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주인이 됨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우리나라는 절대 어떤 개인의 아니라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나라고, 또한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만의 주인이시고, 이 세상은 사탄이 주인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초대교회 대표적인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의 영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절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나라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 나라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나라로 하나님의 바른 공의가 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세계를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건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있기에 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가가 우리에게도 직접적인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우리가 우리 개인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이 세상과 세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는 가는 선교사만이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합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빌립보교인들만이 유일하게 복음은 전하다가 옥에 갇힌 사도바울 물질과 기도로 도와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빌1:7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직접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물질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이 은혜의 사역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마지막으로 이것에 대해서 빌립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들을 물질로 협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선교사역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고,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 제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기도와 물질로 선교사님들을 도울 때 하나님께서 그 향기로운 예물을 받으시고, 그 풍성하신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삶39일. 삶의 균형 잡기< 엡 5:15>
엡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5가지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넷째는 섬김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섬김이란 예수님의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사명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사명이란 이 세상을 향한 복음 전도와 세계선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5가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교회 안에서 믿음의 가족들과 서로 교제하는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하면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이라고 해서 내가 하나님께 모든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부모님께 드릴 예물이 없다고 주장을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이 되면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도 아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서로 조화가 되고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면적인 인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교제해야하는 믿음의 형제들 중에서 우리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우리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인격이 더 성화되고 성숙이 되어 예수님을 닮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결국 관계의 문제는 인격의 문제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번에 해피데이를 하면서 관계에 대해서 강조를 하니까 목사님 결국 관계의 문제는 인격 즉 성품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의 인격 즉 성품에 대해서 같이 공부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 하려고 해도 우리의 인격과 성품이 성숙하지 않은 절대 그 관계를 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 예수님의 온유의 성품을 가져야합니다. 또 끝까지 인내하는 예수님의 인내의 성품을 닮아야합니다. 또 우리는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예수님의 평안의 성품을 닮아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여 그를 변화시키기 보다 나를 먼저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결국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가 좀더 단단해 지고 내가 더 성숙한 사람이 되고 내가 더 넒은 사람이 되면 아무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삶이 될 때 이 세상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기도하실 때 하나님이여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사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다고 하면서 가만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삶도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산다면 우리는 당연히 섬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을 특히 야고보서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야고보서 강해집을 내면서 제목을 “지붕이 없는 교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믿음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는 집은 마치 지붕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모든 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고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는 교회는 마치 지붕이 없는 교회와 같습니다.
여러분 만일 이 교회 건물에 지붕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만일 다른 것은 괜찮은데 지붕이 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믿음에 따른 구체적인 섬김이 없는 삶은 마치 지붕이 없는 집, 지붕이 세는 집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또 형제를 사랑하고, 또 예수님을 닮는 삶이란 이제 구체적으로 섬김과 봉사의 삶을 나타나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과 함께 섬김과 봉사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고, 믿음의 형제들과 서로 잘 교제하고, 또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또 교회에서 열심히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산다하더라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사명이 무어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삶입니다. 또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삶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루살렘교회가 날마다 모여서 예배하고 성도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서로 구제하면 섬기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은 예루살렘에만 머문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테반의 순교를 통한 박해를 통해서 세상으로 흘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말할 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한다고 합니다. 만일 모이는 교회만 강조하면 우리가 예루살렘교회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 모이는 교회도 되어야하지만. 이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또 전 세계로 나가서 선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 해피데이 전도를 하는 것이 잘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만일 40일 동안 기도하지 않고 전도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더 균형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만일 우리가 40일 동안 기도하지 않고 전도만 강조했다면 그것도 균형 있는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통한 영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전도를 통한 사명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마지막 결론적으로 왜 우리에게 이런 5가지의 목적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합니까? 우리가 이 5가지가 서로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그곳으로 사탄이 틈탑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곳으로 사탄이 틈탑니다.
또 우리가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만 강조하고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지 않는다면 그곳에도 사탄이 틈탑니다. 또 우리가 믿음만 강조하고 섬김과 봉사가 없으면 그곳으로 사탄이 틈탑니다. 또 우리가 만일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삶고 세상을 향해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곳으로 사탄이 틈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사탄으로 틈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가운데 5가지 목적이 서로 균형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첫째목적 :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둘째목적 :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남 셋째목적 :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됨 넷째목적 : 지금의 모습으로 섬기기 위해. 다섯 번째목적 : 사명(mission)을 위해..)
40일. 목적이 있는 삶을 살기< 잠 19:21>
잠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삶의 5가지 중요한 질문으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5가지의 질문을 던져야합니다.
첫째는, 내 삶의 중심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우리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어도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당연히 예배가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합니다. 지금처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우리의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둘째는 나는 과연 어떤 성품의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 항상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하는 목적도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는 목적도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경건의 생활을 하고도 예수님을 닮는 삶과 거리가 멀다면 방향이 잘못된 삶입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종말에 예수님께서 믿는 우리를 판단하실 가장 큰 기준이 무엇입니까?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서 벧후 1장 5-7절에서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삶을 살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나는 지금 교회에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성만찬에서 발을 씻기시면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발을 씻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 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종으로 사셨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너희도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는 종이 되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세상나라의 생활방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는 삶을 지향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달라져야합니다. 중직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얼마나 낮은 자리에서 섬겼느냐는 그 섬김의 무게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러분 나는 이 교회에서 얼마나 머슴과 같은 섬김의 살고 있습니까?
네 번째, 나는 지금 과연 복음을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는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이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삶의 간증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들어 우리교회성도님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저보다 전도를 더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너무 감사합니다. 내가 비록 나이가 들고 몸도 약하지만 이제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 자부심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복음을 전하기를 너무 힘이 듭니다. 지금 무엇보다 전 국민들이 배신감, 상실감, 자괴감가운데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악한 영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지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영들과 싸워야합니다. 이 세상의 악한 영들은 사람을 거짓종교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이 없다고 하면서 온갖 미신과 우상, 그리고 무속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무속의 사상이 얼마나 이 나라를 지금 망치고 있는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결국 영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악한 영, 사탄의 영, 귀신의 영에 미혹이 되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갈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살아가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살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거짓 귀신과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또 섬기고,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여러분들은 지금 과연 누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나 혼자서 절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세계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해서 혼자서 수도를 하는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유아독존의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과 동역해야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역할 동역 자들이 필요합니다. 목요일에 전도를 함께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불신자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벤치에 혼자 있으면 그 두 사람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의 전도자가 믿지 않는 한 사람을 불신자를 만나면 아무리 그 사람의 불신이 세더라도 그 사람이 꼼짝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보내실 때 절대 혼자 보내지 아니하시고 두 세 사람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나 혼자는 약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서로 함께 하면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 보면 주방에서도 서로 함께 일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힘든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성도님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함께 이렇게 모여서 예배하며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함께 서로가 서로를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함께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옆에 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40일 동안 함께 기도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했습니다.
또 함께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서로 함께 하는 동역하는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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