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1절에 보면 그는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바리새인하면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하면 굉장한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종교적으로 세파가 있었습니다. 한파는 엣센파이고 또한파는 사두개파이고, 또한파가 바로 바리새파입니다. 엣센파는 요즈음식으로 말하면 신비주의자들, 혹은 세상을 등지고 사는 도피주의자들입니다. 또 사두개파는 내세와 천국을 부정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구약의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으로 당시로 보면 제일 건전하고 정통적으로 하나님을 믿던 사람들입니다. 또 그는 1절에 보면 산헤드린 공의회회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회의원쯤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10절에 보면 그는 유대인의 랍비라고 합니다. 랍비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교수중에서도 제일 덕망과 지혜가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그가 본문 2절에 보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남들의 눈에 뛰지 않고 예수님과 이야기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온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2). 여기서 그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선생이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행하시는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당시의 바리새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 놀라운 말입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교를 위협하고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인정하면 그를 유대사회에서 쫒아버리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예수님이 좋은 말씀을 하시고, 큰 능력을 행해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는 일반적인 바리새인과는 달리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온 선생으로 인정해주었고, 또 그의 표적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지만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참 양심이 있고, 양식이 있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쉽게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니고데모야 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너는 아직 너 자신을 모르고 있다. 지금 너는 아직 거듭나지도 않았어, 구원받지도 않았어, 그래서 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너는 먼저 거듭나야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야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3-7).
--이와같이 니고데모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입니까? 그는 당시 유대교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그런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 거듭남이 필요했다는 사실입니다.(7절에 보면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여기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도 니고데모처럼 정말 내가 거듭났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반드시 거듭나야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어릴 때부터 습관적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의 행사, 일 등 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고, 안 해 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 일에는 전문가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중에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부모님을 따라서 어쩔 수 없이 몇 십년동안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결혼을 해서 식구를 따라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서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주일 오전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중에서도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주일 오전예배는 반드시 복음설교, 전도설교를 해야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물어보셨던 것처럼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내가 과연 구원받았는가?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를 살펴보시고, 자신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점검하지 않고 평생 교회를 다니면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섰을때 “너는 거듭나지 않고 구원받지도 않고 그냥 교회 다녔구나 너는 천국갈수 없어 나는 너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즉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 지옥 갈 수도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목사도 예외가 없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충격적인 이야기를 선배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선배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너 정말 예수를 믿니, 나 안믿어” “아니 어떻게 예수를 안 믿고도 목회하시니요”그랬더니 그분이 하시는 말이“예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 빼고 윤리적인 도덕적인 이야기만 하면 사람들이 다 좋아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프리카의 성자라 불이우면서 선교사였던 슈바이쳐 박사를 아실 것입니다. 그분은 선교사이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라고 하고 죽었습니다--우리가 그분의 삶은 존경하지만 그분의 신학과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과연 거듭났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거듭나지 않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교회의 중요한 일을 맡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예배하며 기도하는일관심이 없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한번도 은혜받는 자리에 있지 않고, 계속해서 밖에서 일만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는 교회를 떠나게 되고-또 나중에는 신앙생활에 아무 의미가 없어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많은 모태신앙인을 보았습니다(못탠신앙).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모태신앙으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신앙은 참 흔들리지 않는 깊이가 있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모태신앙으로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생활이 지옥과 같습니다(교회에 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같습니다).
-한번은 아내가 사영리 책자를 사왔습니다-그러면서 시험다치면 방학때 아이들에게 사영리를 전해야겠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정말 우리 아이들이 거듭났는지 구원받았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목사자녀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자녀들이 거듭났는지를 점검해봐야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강요에 의해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정말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거듭남이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어리지만 어릴 때부터 거듭난 아이는 참으로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아무리 들고 신앙생활을 수십년을 해도 거듭남을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거듭남이란 무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거듭났습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 자신 있게 거듭났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아직 거듭나지 않았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거듭났습니까? 했을 때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후 그의 모든 삶이 완전하게 바뀌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듭났는가 물었을 때, 자신의 삶이 아직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거듭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거듭남을 우리의 모든 삶의 완전한 변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이 변화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 마음의 근본적인 중심, 또는 성향이 거듭났다, 또는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중심이 어떻게 변화된 것이 거듭났다는 말입니까?
1)먼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고백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인정해 주어도 거듭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믿고 인정했어도,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거듭났다고 했을 때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변화되어야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좋은 선생 또는 좋은 사람으로는 인정을 합니다(4대성인중의 한 사람). 또 예수님이 행하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착한 일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그가 나의 유일한 구원자다, 그가 나의 주님이시다 라는 것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가장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겨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어떤 외부적인 강요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이 진정한,,,나의 구원자이시며,,,내 삶의 모든 것임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무엇보다 중생하고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하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나는 미치도록 사랑한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십니까?(전 주님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둘째로 거듭났다는 말은 우리 마음의 중심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용수철과 같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오직 그의 마음의 중심이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세상으로 향하던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했다하더라도 그의 마음이 용수철과 같이 세상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고, 죄악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습니다(육신의 정욕).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그렇게 하다가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 그의 마음중심에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죄에 대한 혐오감이 생깁니다(여러분 죄짖는 것이 편합니까 죄안짖는 것이 편합니까?).
이 말을 거듭난 사람이 전혀 죄를 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도 죄를 지어 실수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돌이켜 회개하며 철저히 죄에 대해서 멀리하고픈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영광에 대한 거룩한 갈망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오직 나 자신과 세상에 대한 욕망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이제 그의 마음의 중심에 오직 자신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거룩한 열망으로 가득차 잇는 사람입니다.(박주영-0축구뿐 아니라-/신앙이 좋습니다-그래서 좋아한다-제일 듣기 싫은 말-니 왜 교회나가노 나가지 마라/ 제일 좋아하는 여성상-기도하는 모습이 예쁜여자-장래희망-축구를 통해서 하나님게ㅡ영광을 돌리고, 축구를 통해서 선교하는 것/기도세레모니-얼마나 비난이 많나-그래도 한다-왜 거듭난 사람-그래서 축구 성공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마음이 우선이기때문이다)
-지금 여러분 마음에 이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까?
또 거듭난 사람은 영적인 삶과 성장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먹고 마시는 육신적인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이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너무나 지겨웠던 하나님말씀이었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달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또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속에 기도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그동안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 우리가 거듭났다면-정말 기도하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수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제 거듭난 사람은 그의 영이 좀더 성장하고 성숙해야겠다는 사모함과 갈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고 듣고 싶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와 같은 모습이 없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에게 이와 같은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정말 거듭나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단에서는 당시능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면 몇날 며칠에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라 말합니다-이것은 잘못-
오늘 말씀-거듭남-바람에 비유하낟-바람이 붑니다-바람이 어디서 불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고 난후 낙엽이 날린다든지--먼지가 이는 모습을 통해서바람이 불었구나하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회를 참석하면서 어느날 갑자기 눈물을 흘리면서 뜨겁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서 한순간에 거듭남을 경험하는 사람도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말씀을 듣스니다-교회를 나옵니다-오래동안-내가 정확하게 언제 완전히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내 중심이 변화되었는지-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분명 내 중심이 달려져 있습니다-변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물이란 말씀을 가리킵니다. 특히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라,,복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믿음에 관한 말씀을 먼저 들어야합니다. 그렇게 복음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바람과 같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역사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다(스펄전-영국의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부흥사요 설교가는 스펄전입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목사여서 여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는데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어느날 눈이 많이 와서 가까운 작은 교회로갔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목사님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구두수선공 어떤집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5분하고 나니까 그분 설교재료가 다떨어졌습니다. 그때 스펄절은 속으로 비웃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어떻게 저런 초라한 구두수선공이 설교를 한단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그 구두수선공이 젊은 스펄전을 보더니만 만일 청년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평생을 가련하게 살것이요, 또 죽어서도 가련하게 살것입니다--그리고 이번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청년이여! 예수님을 바라보라. 지금 바라보라." 이 소리는 마치 전광석화와 같이 그의 가슴을 때렸습니다-사실 예수님에 관한 것은 스펄전이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영의 눈이 밝아져 이제 형식적인종교가 아니라--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남을 경험했습니다-그날 이후로 목사가 되어 가장 영국역사상 가장 큰 부흥을 일으킨 인물이되었습니다/그래서 이 경험 때문에 스펄전목사님이 가장 많이하는 설교가 복음에 관한 설교고,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그 설교자가 위대했기때문이 아닙니다--예수님의 십자가라 말으로도 그 복음안에 능력이 있습니다-또 더 중요한 것은 그 복음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해야합니다---//어떤 청년은 새가족예배에 나와서 1년을 복음을 듣고 울었습니다-왜냐고 물었습니다-목사님 도무지 예수님이 믿겨지지가 않아요 라는 것이었습니다-그떄 제가 말했습니다-계속 들어보십시오-그러면 어느 순간 믿게된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그 청년은 지금 너무 잘믿고, 완전히 변화되고 거듭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지금도 새가족예배에 앞치마를 두러고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0
-여러분중에서 만일 아직 거듭남이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신 분들은다음주부터 새가족 예배에 오시기 바랍니다(매주마다 복음설교를 들으십시오-이상합니다-절대ㅔ 질리지 않습니다ㅣ- 신기합니다-한달에 한번씩 복음주일 복음에 관해서 설교하려합니다--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같이 복음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생깁니다.
성령을 통해서 비로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삶의 모든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과 열망이 생깁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몇날 며칠에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듯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가 몇날 며칠에 어떻게 거듭났는가를 정확하게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지나가면 우리가 분명 그 바람이 지나간 흔적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성령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여 우리 속에 우리가 분명 거듭난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와 같은 우리에게도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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