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기독교에는 삼대절기가 있습니다. 성탄절, 그리고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강림절은 부활절 후 50째 되는 날로서, 오순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기념한 날입니다. 또 성령강림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성령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신약의 교회가 탄생한 날 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기 전에 구약시대에는 성령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간헐적으로 임하셨습니다. 또 임하시더라도 떠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성령하나님이 우리가운데 영원히 거하시게 된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은 마치 마르지 않는 성령의 큰 저수지가 생긴 사건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저수지에서 성령의 물줄기가 각 교회에게 부어지게 되었고, 또 각 개인에게 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거하여 계신 성령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 성령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은 먼저 우리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죄에 대해서 꾸짖고 책망해주시는 일을 하십니다(요16:8).
만일 우리에게 성령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절대 죄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도덕적인 규범만 지키면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또 성령하나님은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가게 하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누구를 위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신 것은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신 사건입니다. 우리가운데 계신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생각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조급한 마음을 줍니다. 또 시기하게 만들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또 분 내게 만들고 참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투게 하여서 결국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십니다.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또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해주십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끝까지 참으라 인내하라 하나님이 값아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절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운데 계신 성령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육신의 조급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하나님이 아니면 우리는 절대 기도할 수 없습니다. 또 기도하려고 해도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하나님은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가 외롭고 어렵고 힘들 때 우리에게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내가 너를 고아와 같이 절대 버려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희망과 소망을 가지게 해주십니다.
//또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십니다. 또 우리 몸도 치료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하나님은 우리를 영육 간에 더 온전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상한 마음들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육신의 질병들도 치유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성을 우월시하고 감정 또는 체험을 저급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아는 것만 안전하다고 여겼고, 감정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에 대해서는 위험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구사상의 영향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성으로 지식으로만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단순히 이론적인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머리로만 아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꽃 속에 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 속에 꿀이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 속에 꿀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까? 그 꽃 속에 꿀을 맛보면 이 꽃 속에 꿀이 있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 꽃 속에 꿀을 맛 볼 수 있습니까? 그것은 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꽃과 나 사이에 벌을 통해서 꽃 속의 꿀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맛보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하나님을 통해서만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통해서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이 시대는 더욱더 성령하나님을 통한 하나님의 체험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는 감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로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감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말이고, 바른 지식이라 하더라도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지식적으로 말해주어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감정적으로 체험하지 아니하면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특별이 지금 이시대가 첨단 과학과 기계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감정적으로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감동체험, 영적체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교회는 이 시대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진정한 영적인 체험, 즉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문균씨는 “하나님께 대한 논리 정연한 이론은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없을 때 사람들은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없는 교회를 떠나서 갖가지 미신적인 점술이나 뉴에이지의 종교적인 감성에 빠져들 수 없게 된다. 생명의 힘을 상실한 교회는 더 이상 매력을 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서구에서는 교회를 떠나는 이들의 수가 급증하는 반면에 교회 밖에서 이상한 영적인 체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주요 원인은 교회에서 진정한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난 자들을 상대로 실시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교회출석을 중단하는 주 원인은 교회가 지루하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예배가 감동적인 체험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브라운은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희열 경험을 장려하기 보다는 억압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서구의 교회에서는 이론과 교리를 치중하는 교회는 쇠퇴하는 반면 감동과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가 부흥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론과 교리, 말씀을 무시할 수 는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감정과 체험만 중요시 한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감정과 체험이 중요하다고해서 요즘에는 너무 음악적인 기교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체험을 조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씨에스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이 지도라면 체험은 해변에서 수영하는 것과 같다. 만일 말씀의 지도만 들고 바다에 들어가지 않고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말씀의 지도가 없이 무조건 물속에 들어가도 그것도 잘못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한 바른 신학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또한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바른 체험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바로 알아야합니다. 또한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맛보아 체험적으로 알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특히 사회가 점점 더 혼란하고. 사람들의 마음들이 강퍅해지고 있는 이 세상 가운데서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무조건 방언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체험이라고 합니다. 또 가만히 있는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려고 합니다. 또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좋은데, 잘못된 체험이 많습니다.
---그러면 성령하나님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체험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참석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래함 리 선교사는 그날 저녁에 자신이 그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가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어제 있었던 그 집회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이제까지 결코 목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데비이드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에게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를 목도하면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강한 돌풍처럼 회중 위에 임하였고, 놀라운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다. 나는 거의 모든 회중을 사로잡은 그 권능에 놀라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강한 급류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어린 아이를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이 엎드러져 주위를 인식하지 않고 자기 영혼의 상태에 대해 깊은 비탄에 젖어 괴로워하였다. 건물전체와 건물 밖 곳곳에서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자비를 울부짖고 있었다”.
------이와 같이 성령하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성령하나님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체험이란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5:5)”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성령하나님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체험입니다.
조지 휘필드는 “주님께서 밤낮으로 내게 그의 사랑을 채우신다--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되어 거의 호흡이 끊어질 정도다”고 했습니다.
찰스 피니는“성령이 사랑의 파도처럼 내게 밀려오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또 해리스란 전도자는 “나의 영혼에 소낙비가 내렸다. 그래서 나는 도무지 나 자신을 억제 할수 없었다---나는 온전한 사랑에 사로잡혔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충만한 사랑이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부인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체험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신체의 방해와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채 내 영혼 안에 하늘의 빛과 안식의 달콤함을 맘껏 맛본 적이 없었다-밤새도록 예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분명하고 생생한 의식이 계속되었다”“천국에서 온 듯 달콤하고 아름답고 초월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이 계속 분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천국에 계신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내 가슴속에 거룩한 사랑의 불빛이 따뜻한 한 줄기 광선처럼 계속 흘러드는 듯했다. 동시에 내 가슴과 영혼은 온통 사랑이 되어 그리스도께 흘러나갔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가슴에서 내 가슴으로 천국의 거룩한 사랑이 계속 흐르고 또 흐르고 있는 듯했다”.
--저도2000년도 새벽기도를 하면서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 새벽마다 5시간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그 증거를 내게 보여 달라고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아침 9시쯤 되었을까 기도하는데 갑자기 제 마음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로마서5장 5절의 말씀“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는 말씀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서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나를 사랑하신다------그 사랑의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다”--이렇게 외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동안 제가 이론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붉은 색만 보아도--------눈물이 나고--감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다른 곳에 강의나 설교를 하러 갈 때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했습니다---
------그때 저의 체험은 그 전에 있었던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하심에 대한 의심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사랑을 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물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원한다고 해서 당장 어떤 체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가에 대해서 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신 것이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 느낌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감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시편22편에서도 다윗은 감정적으로는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감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며, 그의 기도를 들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기 위해서 먼저 감정을 붙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먼저 아무 느낌이 없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 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믿어야합니다.
찬송가 586장 “예수사랑하심을”이라는 찬송의 배경이 있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어린아이가 아버지께 묻습니다-“아빠 나 곧 죽게 되지--그러면 나 천국갈수 있어—아빠—내가 이렇게 병으로 죽게 된 가운데서도 정말 하나님은 날 사랑하실까 라고 물었습니다”--그때 그 아이를 위해서 지었던 찬송이 이 찬송입니다-(1절만 읽을 것)
586장1. 예수사랑 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 하심 날 사랑 하심, 날 사랑 하심 성경에 쓰였네
--이 찬송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의 느낌이나 감정 체험이 아닙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하나님의 말씀입니다-하나님의 말ㅅ그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즉 나와 함께 하시며 절대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이 약속을 붙들고 있을 때-언젠가 감정적으로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2)또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살아계신 임재를 경험한 간증을 보면 예배시간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이런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신 위엄과 영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예배에 대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필요합니다. 예배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무감이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보이기 위함도 아닙니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또 예배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보다 예배에 대한 간절함과 사모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두 체험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떻게 예배시간에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단아래 기도실로 가서 “여기서 예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도 예배 전에 예배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시간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사랑의 연합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찬양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서로 사랑주시기 바랍니다. 진정으로 서로 안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공동체적인 연합과 교제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또 우리는 언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사망의 음침할 골짜기를 통과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이 실패하고 좌절할 때입니다. “아 이제 나는 죽었구나 나는 더 이상 살수 없구나” 할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서 갈급한 심정으로 기도함으로 나갈 때입니다--
--우리가 아무 일이 없을 때 상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인생의 위기상황이 닥치지 아니하면 상한 심령, 갈급한 심령이 잘 되지 않습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혼의 어두운 밤을 주십니다-사역에 실패를 주십니다-가정에 어려운 일을 주십니다-사람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육신적 극한 곤란을 격게 하십니다-
그때 그동안 나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마치 내게 숨어계시는 것 같은 그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내 삶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껴지고 만져지고 체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님은 성령충만은 우리와 같이 실패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실패한 자에게 임하는 놀라운 성령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성령하나님을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체험하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경적 신학 > 설교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 때 나타난 하나님나라(창3:5) (0) | 2012.06.09 |
---|---|
사람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요2:1-11) (0) | 2012.05.26 |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고후5:13-17) (0) | 2012.04.28 |
가난한 과부의 헌금(막12:41-44) (0) | 2012.02.25 |
애통하는 자의 위로(마5:4) (0) | 2012.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