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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연구/시편

시편설교④마음이 답답하여 한치의 여유도 없을때(시4:1-8)

by 금빛돌 2014. 4. 26.

다윗의 시편을 보면 항상 시를 쓰게 된 상황이 나옵니다.

오늘 시편 1절에 보면 “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여기서 보면 다윗은 곤란 중에 있다고 합니다. 곤란이라는 말은 너무 답답하고 어려워서 마음에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이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를 지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자려고 해도 그 곤란 때문에 전혀 잠이 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 시편을 쓸 때 다윗은 너무 어렵고 힘이 들어서 잠도 잘 들지 못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시편을 쓰고 난 후 7절에 보면 내가 눕고 (평안히)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여러분은 요즘 잠을 잘 주무십니까? 요즘 더위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낮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되어서 잠이 잘 오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어떨 때는 인위적으로 잠을 청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이때 여러분들에게 평안한 잠을 자게 할 수 있는 처방전이 있습니다. 그것이 시편 4편의 말씀입니다.

--먼저 다윗이 지금 어떤 일 때문에 곤란 중에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편은 역사적으로 보면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 쓴 시입니다. 그 근거는 3절에 보면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인생이란 보통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울 왕과 그 무리들로 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금 다윗은 갑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갑질이 무슨 말입니까? 지위와 권세가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입니다. 얼마 전에는 군부대에서의 갑질을 보았습니다. 또 프랜차이즈 대표들의 갑질을 보았습니다. 또 기업회장들의 갑질을 보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왕과 같이 권세가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갑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때까지란 말은 그 곤란이 오랜 기간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대략 왕이 되기 전 15년간 사울 왕과 그 무리들에게 곤란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구체적으로 사울 왕과 그 무리들에게서 어떤 곤란한 일을 당했습니까?

2절에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여기서 보면 다윗은 그에게 곤란을 주는 사람들에게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광이라는 말은 다윗이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존감을 말합니다. 8편에 이렇게 말합니다.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인간)()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인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우리가 자연만물을 보고 우리 인간을 보면 사실 우리 인간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의 달과 별처럼 빛을 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치타처럼 빨리 달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자처럼 용맹하지도 못합니다. 물고기처럼 물에 살수도 없습니다. 새처럼 하늘을 날수도 없습니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바이르스에도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이 자연만물과 우리 인간을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우리 인간은 정말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이유는 우리 인간은 모든 만물가운데서 하나님의 특별한 기억의 대상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돌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다른 피조물에 비해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영광스럽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으로서 영광스러운 자존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위대한 이 세상에서 권세를 가진 왕만이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또 수많은 돈을 가진 부자만 영광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가난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입은 인간인 이상 그에게는 영광이 있고, 존엄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영광으로 말미암아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을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이 한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영광을 변하여 욕이 되게 했습니다. 다윗이 한 인간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자존감을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의 다윗의 영광을 변하여 욕이 되게 했습니까?

그것은 말입니다.

2절에 헛된 일이란 말로서 사람을 시험 들게 하는 일입니다. 또 그 뒤에 거짓이란 거짓말입니다.

--지금 다윗이 왜 잠을 자지 못하는 곤란한 일을 격고 있습니까?

다윗을 대적하는 자들이 헛된 말과 거짓된 말로서 다윗의 영광과 자존감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은 인간적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곤란을 격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고, 무력을 행사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거짓된 말로서 다윗을 죽이려 한 일입니다.

/시편에 보면 다윗이 무수한 말들을 통해서 곤란을 당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편을 보면 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말로서 나를 쫓는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2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말로)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다윗은 사울왕의 무리들이 하는 말을 통해서 마치 사자같이 뜯기고 찢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12편을 보면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보면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겠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또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고, 아첨하는 헛된 말을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곤란 중에 빠지게 하는 것이 말입니다.

//지난주에 고 최진실의 딸이 할머니에 대해서 쓴 글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누가 잘하고 잘못했느냐 하는 것보다 왜 최진실이 죽었는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의 말들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이 경찰에 잡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이 유수한 대학을 나온 대학 강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의 말입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는가? 그냥 한번 거짓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거짓말로 다윗을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했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너희는 떨며(분내어)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고 말하니다.

여기서 떨며라는 말은 밑에 보면 분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다윗에게 거짓으로 모함하면서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분을 내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말합니까? 너희는 거짓말로서 분을 내며 떠들며 범죄치 말지어다 라고 합니다. 그런 거짓된 말들은 자리에 누워서 혼자 마음속으로 말하지 그 거짓된 말들을 남들에게 떠들지 말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5절에 보면 거짓말을 하는 자들에게 “5.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하나님께 아름다운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거짓된 입술로 예배를 드리면 그것이 거짓된 제사요 예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입술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짖는 죄 중에서 제일 큰 죄는 말로 인해서 상처를 주는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면 우리가 말로서 사람에게 상처 준 것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12장에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말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말로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분명한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을 하다보면 사실과 함께 사람의 인격에 대해서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건전한 비판과 비방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건전한 비판이란 잘못된 사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방이란 그 사람의 인격에 손상을 끼치는 말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야고보서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4: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분별은 해야 하지만, 판단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인격을 비방하는 말을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는 말로서 비방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사람들을 말로서 비방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는 사람이고, 결국 그 사람은 그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을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또 말로 인한 상처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 있습니다.

4210절에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사람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조건 병이 낫고, 또 육신적으로 잘되는 것만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병이 있어도, 육신적으로 어렵고 힘들게 살아도-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혹 우리는 병원에 가서 어떤 사람의 병이 낫지 않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병에 걸려 아픈 것보다 그 말들이 그 사람의 뼈를 찌를 칼과 같이 그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 시편은 다윗이 말로 인한 상처와 곤란을 경험할 때 쓴 시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말로 인한 마음에 상처 때문에 마음에 한 치의 여유도 없는 곤란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1)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의 하나님이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람들의 판단은 옳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나의 의를 다 아시고, 의롭게 판단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이 정의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18장에서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억울함)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억울함)을 풀어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라기시대 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의한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또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냐?고 합니까? 그 이유는 현실을 보니까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아주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3:5. 내가 (불의를)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심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갑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마음에 답답한 일이 있으십니까? 정의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다윗은 곤란 중에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2)고난 중에 내 마음에 여유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하는데, 여기서 너그럽게 하셨사오니가 아니라--“나를 너그럽게 하소서라고 기도문으로 읽어야합니다. 또 그 다음에서도 네게 은혜를 베푸사가 아니라 나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를 너그럽게 해 달라는 말은 내 마음에 여유를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제일 먼저 우리 마음에 여유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좁아집니다. 그래서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곤란이라는 말은 원어상 좁은 골짜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좁아져서 좁은 협곡과 같이 되어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내가 당하고 있는 그 일만 내 눈에 보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합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너그럽게 하소서 내 마음에 여유를 주소서 내 마음을 넓혀주소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소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소서, 또 그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내가 같이 속 좁은 사람이 되면 결국 집니다. 내 마음에 너그러운 여유를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들을 내가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여유를 가져야겠다고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네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매일 싸우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교회를 다녀와서 너무나 아내에게 잘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목사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제목이 아름다운 부부관계 그런 내용이 아닙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부부관계에 대한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설교만을 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늘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12장에서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내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여러분 마음에 한 치의 여유도 없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생애가운데서 끝까지 사울을 용납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관용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관용이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을 다 소화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관용입니다.

--이 관용의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스테반입니다. 그에게 돌이 날라 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넒은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스테반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돌을 던지는 사람을 보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서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주님을 볼 때 그 원수들을 관용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해도 우리가 같이 돌을 던져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도 망하고 그 사람도 망합니다.

--그래서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의 여유를 가지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또 다윗은 곤란한 일을 당하였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기 바랍니다. “3.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이것은 다윗을 모함하는 자들에게 대한 다윗의 말입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는 다윗을 말합니다. 또 여기서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택하신 자녀다.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존귀한 자다고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날마다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또 다윗은 곤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합니까?

6절에서 다윗은 “6.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곤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까?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라고 낙심이 되십니까? 그래서 마음에 한치의 여유도 없습니까? 그럴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 비춰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위로가 필요한 자들에게 위로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돌봄이 필요한 자들에게는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시다. 하나님은 능력이 필요한 자들에게 능력의 하님으로 나타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인생에 곤란한 중에서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야곱은 얍복강에서 밤 세워 기도한 결과로 그는 하나님을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상처와 곤란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은혜의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하나님께서 곤란한 중에 마음에 여유를 달라고 기도하는 자에게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기쁨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주시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어떤 목사님은 엑스타시의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엑스타시가 무엇입니까? 마약입니다. 그런데 진짜 마약은 순간적으로 곤란을 잊어버리게 하지만 그 후에는 더 큰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엑스타시의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기쁨은 순간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곤란 중에도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그런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아무 기쁨 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상황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직 성령에 충만함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우리가 다윗처럼 그 어떤 인생에 곤란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곤란 중에도 평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8절입니다. “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곤란한 일들이 있습니까?

의의 하나님께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해주시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또 내 마음에 너그러움과 여유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한 잠과 안전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곤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날마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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