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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중심주제/신약의 중심주제

산상설교의 이해(김광석목사)

by 금빛돌 2011. 4. 9.

복-하나님나라백성의 모습 8복은 하나님나라백성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위적으로 될수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될 수 있는 모습이다. 

서론적 고찰 

a.산상설교는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지킬 수 있는 은혜의 윤리이다. 

b.산상설교는 문자적으로, 육신적으로 지켜질 수 없는 윤리이다. 오직 주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통하여,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지켜질 수 있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주님안에 붙어 있어야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야한다. 

c. 산상설교는 구원받은 자의 삶의 규범이 되어야한다. 산성설교가 우리의 힘으로 지켜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절로 지켜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말을 오해해서 이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되어지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그렇게 하면 신 율법주의가 된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문제는 그렇다면 성령충만, 은혜충만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운데 성령충만을 감정충만으로 은혜충만을 자기 기분충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무조건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어지면 주관적인 성령충만, 은혜충만일 수밖에 없다. 산성설교는 이와같이 성령충만, 은혜충만받은 자(주여주여 하는자,마7장)를 판별하는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운데 성령충만(은혜충만)하다고 하면서 원수라도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성령충만은 감정충만인 것이다. 또한 은혜충만하면서 한 영혼을 실족시킨다면 그 사람의 은혜는 자기기분대로의 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받은 자들에게 규범적으로 반드시 제시되어져야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으로 율법주의적으로 지킬 수 있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은혜로 지켜질 수 있으니 더 이상 강요되어서는 안된라고 하는 것도 문제이다. d.이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먼저 행동을 요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to do 보다 to be). 예를들어 오른 빰을 맞으면 오기로 왼빰을 돌려댈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 내가 자발적으로 오른 빰을 맞으면 왼 빰도 돌려댈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을 통한 우리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와 성숙이 있어야한다. 
e. 바로 내안에 산상설교의 말씀이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산상설교의 말씀을 문자를 통해서 본 것도 있지만 내 속에서 성령이 산상설교의 말씀으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지금 우리는 들을수 있어야한다(내 법을 너희 마음가운데 세기리라, 히8장10절).

문/.산상설교에 나타난 복과 의 세상적인 복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복-현실적,현세적,물질적인 복/산성설교의 복-비현실적, 비 현세적, 비 물질적인 복
이다. 

1)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 말씀은 천국을 소유한 자의 복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천국을 소유한자(하나님나라의 백성)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적인 가난함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말 그대로 심령,혹은 영의 가난함을 뜻한다. 심령이 혹은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앞에서의 태도라기보다는 하나님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앞에서 심령이 가난한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가난하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은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역설적으로 말하면 심령이 가난한자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태초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광야의 이스라엘과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백성의 영원한 본질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만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함에 있다. 또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목말라 죽을 수 밖에 없고 배고파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본질이자 교회의 본질인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애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간들은 자신의 가난함을 잊어버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인 것이다.하나님은 이런 자를 제일 멸시하신다. 하나님은 가난한자를 긍휼로 배불리신다. 
이와같이 하나님백성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산상설교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즉 산성설교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지킬수 없는 말씀들이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께 붙어있음으로 말미암아 열매로서 맺히워질 수 있는 말씀들이다(마7:15-29)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는 되지 않는다. 단지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임으로 이러한 열매들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요15). 그러니까 이 산성설교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생명의 관계를 유지하면 저절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이러한 천국시민의 윤리를 선포할 필요가 있는가? 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다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라면 왜 굳이 "원수를 사랑하라,미워하지 말라,이렇게 기도하라는 식"의 명령조로 말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로 말미암아 저절로 되어질 말씀인데 굳이 이렇게 살아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는 이유는 이 말씀들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가진자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기때문이다. 즉 이 산상설교의 결론에 보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다.즉 그 나무에 대한 시금석은 열매인 것이다. 아무리 그 가지가 나는 포도나무라고 주장하더라도 열매가 사과이면 그 가지는 거짓 가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주위에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많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하는 자도 많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로서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판가름 할 수 없다. 그러면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인가? 그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있기에 산성설교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판가름나게 되는 것이다(하나님백성을 판가름하는 최종적인 열매는 사랑이다.이 산성설교를 압축하면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이다). 

 

문/.심령에 가난함이 하나님앞에서 부요함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함은 하나님백성의 상태라면, 애통하는 자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가 취할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즉 심령이 가난한자는 애통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같은 말씀을 예수님은 반복하시는 것일까? 이것도 이유가 있다고 본다. 만일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통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합리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그가 하나님백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계명이 있다.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나는 그 말씀대로 살수 없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렇게 못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자책과 애통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주위에서보면 이러한 현상을 많이 보게된다. 인간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방종과 태만의 핑게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단순히 아무것도 할수 없는 가난한 자라고만 하시지 않는다.
천국 백성은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하여 하나님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애통함은 우리가 이 산상설교의 말씀대로 살기 위한 애통함이다. 우리에게 이러한 진정한 애통함이 있는가? 롬7장에 나타난대로 우리가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수 없기에 바울처럼 절망해하는 모습이 있는가?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이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무관심에 날마다 핑게를 대고 있는 것이다. 

문/.그 외에도 하나님앞에서 우리가 애통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3)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세상나라의 사고방식과 정반대를 이루는 말씀이다.이 세상은 강한자 힘있는자가 땅을 차지하는 나라이다.그런데 하나님나라는 온유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착하게 사니까 많은 부동산을 차지하게 되더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그 이유는 "기업"이라는 말때문이다. 기업이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로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주시는 "선물"로 이해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백성에게 기업(선물)으로 가나안땅을 약속해주시고, 또 기업으로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백성이 기업으로 가나안땅을 약속받고 선물로 받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종말론적인 의미로서 결국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이 땅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창9:27/요계20:6).
즉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나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말은 온유함의 조건으로 땅을 차지한다는 말이 아니다.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강포한 사랑들과 달리 온유한자는 것이다.바로 그러한 온유한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한 나라에 땅을 기업(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온유함이란 무슨 말인가? 온유함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말로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사람을 뜻한다.구약에서 온유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는 모세이고 신약에서 온유한 사람의 대표적인 예는 스테반이다.그리고 이 온유함의 궁극적인 표상은 예수님이다. 원수의 송사앞에서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아무런 반항과 앙갚음도 하지 않는 예수님이 바로 온유의 대표적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는 사람이다.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히려 땅을 빼앗길지라도 저 영원한 나라에서 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롬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가 죄의 병기가 아닌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함이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칭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옳은 행실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의 종노릇이 아닌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목마른 자이며 주린 자이다. 신구약성경을 보면 열마나 하나님의 의(공의)를 기쁘하시는 알수 있다. 우리가 무수한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공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은 더 기쁘하신다. 그런데 이 세상나라는 어떠한가? 그들은 의에 관심이 없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결과적 소유와 목적달성이다. 세상사람들은 좀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그들이 목표한 것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들의 의는 오직 결과적 공과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그렇지 않다.우리는 혹 우리가 고난받고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살아야한다. 팔복의 끝에 보면 결국 이렇게 살면 고난받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이렇게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될때 다른 무엇으로 배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배부른 삶을 살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언가 결과적으로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그저 하나님의 백성답게 진실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아가는데 있다. 

 

5)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란 무슨 말인가?긍휼이란 불쌍히 여긴다.가엽게 여긴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자란 어떤 자인가? 이런자는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를 아는 사람이다.하나님앞에서 자신이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자는 불쌍한 사람을 볼때 동정이 아니라 하나님앞에서의 동질을 느끼는 것이다.그래서 그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다.이렇게 자신의 불쌍한 존재를 인식하고 타인을 불쌍히 여길줄 아는 자가 결국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백성의 영원한 기도는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나는 불쌍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이다.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볼것임이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고자 한다.그런데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인 눈으로 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면 누가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수 있는가?그것은 마음이 청결한자이다.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가? 이 말은 세상적인 모든 욕심을 버린 상태를 말한다.세상적인 욕심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요,이 세상의 자랑하는 것들이요,육신의 정욕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가운데 사람들에게 눈에 뛰려고 행동하는 것이 없는가? 또한 무언가 남들에게 뽑내고 자랑하기 위해 추구하는 것이 없는가? 이 세상에 속한 허영심,명예심 이 모든 것이 없는 상태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청결함은 수도사가 도를 딱듯이 인위적으로 되는 것인가?(불교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이 마음이 청결함이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인간적인 수련과 노력을 통해서 마음이 청결한자가 될수 없다. 마음에 청결한자는 자신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을 인정하는 자이다.그래서 날마다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로 여기면서(롬6:11) 살아가는 자이다. 이런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쫒는 자를 뜻한다. 

 

7)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한다는 말은 말그대로 "피스 메이커"이다.평화를 만든 사람을 뜻한다.이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뿐 아니라 이웃과의 평화를 뜻한다.이런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무엇을 뜻하나? 대개 하나님의 아들이란 상속자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모사자,즉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자의 뜻이 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이 땅가운데 드러내는 자이다. 이 땅가운데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평화이다.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이요, 사람과 평화하는 것이다.그런데 성경에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검을 주로 왔다는 말이 있다. 이 말한 참된 평화를 위해 거짓되 평화를 제거하시기 위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다.그러므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관심은 참된 평화에 있다.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복음으로서 이 땅의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화평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역할을 해야한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이 이웃과의 관계도 분쟁이 없는 화평의 관계로 만든 사람이다.우리가 이런 모습을 보여줄때 비로서 세상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로 자처하면서 분쟁만을 일삼는 사람은 그 나무가 의심스러운 사람이다.(마7) 

 

8)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사람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 너희상이 큼이니라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결과이자 팔복의 결론이다.하나님의백성은 하나님의 뜻(의)대로 살기의해 애통하며,주리며 몸부림치는 사람이다.이것이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나라의 삶의 이 세상나라속에 고난으로 나타날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속에서도 우리가 기쁘할수 있는 것은 이 고난이 바로 하나님나라백성으로서 최고의 열매인 것이다. 만일 자신이 정말 하나님나라의 백성인가를 시험해볼려면 내게 과연 의를 인한 고난의 열매가 있는가를 확인해보아야한다.
또 우리가 이 고난속에서 기쁘할수 있는 것은 이 고난의 삶들이 우리만의 삶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내려온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를 인한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믿음의 선진들의 대열에 끼어있음을 깨달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앞에서 자부심과 기쁨을 느껴야한다.
또한 우리가 고난받는 것은 결국 예수님때문이기에 우리가 기뻐할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난속에서도 기쁘할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고난을 주는 세상은 심판받고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님나라는 영원할 것이기때문이다.(여기서 상이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받는 자체가 상이란 말이다.이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받음을 뜻하며 그것이 영광된 상이라는 말이다.고전9:18)

 

마6:13-16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세상 속에서의 하나님나라백성의 모습.
8복에서는 천국백성의 모습을 나내고 있다. 그런데 6장13-18절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나라에서 어떤 모습과 역할로 나타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하나님나라에 관한 몇 가지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다. 
1)첫째는 하나님의 백성(하나님나라)는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8복에 나타난 천국시민의 모습은 철저히 이 세상 속에 나타나야할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분리될수 없고 도피할수도 없다. 2)두번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속에 있는 세상은 부패할 수 밖에 없으며,어두울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천국시민은 이 부패할 수 밖에 없는 세상가운데 소금이 되어야하며, 어두운 세상가운데 빛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이와같은 소금과 빛의 역할은 우리가 8복에 충실하게 될때 나타나게 되는 결과들인 것이다. 3)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봤을 때 우리는 이 구절이 마13장에 나타난 누룩의 비유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 속에서 누룩과 같다. 이 말은 급진적인 세상변혁을 노리는 자들(당시의 열심당)의 주장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하나님나라는 세상속의 누룩이라는 말은 세상 속에 있으되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는 것은 당시의 엣센파(은둔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의 주장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4)천국시민이 소금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의 부패성을 방지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백성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 그것은 적극적인 사화참여와 세상개혁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하나님백성이 소금이라는 말에 강조점은 소금이 소금의 속성을 잃지 않고 있을 것을 강조한 말씀이다.
즉 우리는 이 세상상속에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결코 세상적이 되지 말아야한다. 하나나님백성으로 청결함과 의로움과 거룩성들을 잃지 말하야한다.이것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하여 이 세상사람과 같이 되지 말아야한다. 
5)소금이 하나님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것이라면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이제 좀 더 적극적인 세상참여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있을 위치가 등경아래가 아니라 등경위라고 하고, 산아래라고 하지 않고 산 위의 도시라고 말한다.
우리는 항상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성결, 거룩)도 잃지 말아야 하며,또한 그들에게 대한 사명성(착한 행실, 거룩한 운동)도 잃지 말아야한다.
이 정체성과 사명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긴장을 이루어야 한다.(그런데 교회사를 보면 이 두 가지가 서로 갈등의 관계에 있음을 알수 있다) 

 

마5:17-6:18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시고,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능가하는 하나님나라의 윤리이 단락에서는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시고, 유대주의를 극복하시고 능가하는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보여주고 있다. 

 

5:17-20에서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페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완전하게 하기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산성설교의 말씀이 진정한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러한 산상설교의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않으셨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계시)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완전한 하나님의 뜻(계시,율법)이 있다 하더라 인간의 상태를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만일 구약시대에 산상설교가 들려졌다면 그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시대에 그 시대에 적합하게 말씀(율법)을 주신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율법을 이스라엘에 다 지켰다는 말도 아니다).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제서야 구약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더 완전한 뜻을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지금 이 시대가 새 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더 이상 율법이 우리는 정죄할 수 없다. 또한 새 언약의 시대에는 우리가 그 율법(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준비(구속은혜, 성령)를 해두신 상태에서 이제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5:21-26
그래서 구약율법에서는 단순히 사람을 칼로 죽인 것만을 정죄했는데 예수님은 그것도 포함하지만 그 사람을 칼로 죽이기 전에 마음의 동기조차도 정죄하시는 것이다. 마음으로 욕하고 미워하는 것도 살인한 죄로 예수님은 보신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죄가 영원한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 요청케 하고 성령의 능력을 더 사모하게 하는 것이다롬7,8) 그래서 예물을 드리다가(예배를 드리기전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화목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살인한다, 또는 형제를 욕한다, 또는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해결하는 것은 사실 부정적인 말이다. 결국 살인한다는 것, 형제를 마음으로 욕한다는 것,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로 화목하지 못한 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부정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로 집약된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전에 서로 다투지 않았다 하더라도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지 못한 상태라면 그것을 해결하고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이다(다 툰 것보다 무관심이 더 큰 죄이다) 

 

5:27-32(간음에 대하여)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율법에서는 육체적인 간음만을 정죄했는데 예수님의 그 마음의 동기조차도 정죄하신다. 그래서 음욕을 품는 것조차도 간음죄로 취급하신다(그러나 이것도 영원한 정죄가 아니다. 이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요청케하신다) 또한 구약율법에서는 서류상으로 이혼증서를 써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나 예수님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것도 간음하게한 죄로 취급하신다. 결국 육체적으로 또는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은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부정적인 언명으로 말씀하신 것이다(간음하지 않고 서로 무관심하다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음이 죄이다) 

 

5:33-37(맹세에 대하여
구약율법에서는 거짓맹세를 하지 말하고 말씀했으나 예수님은 아무 맹세도 하지 말하고 하신다.이유는 인간이란 어떤한 맹세도 지킬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인다. 그러므로 그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5:38-48(대적자에 대하여, 원수사랑)
악을 악으로 갚는 문제 있어어 구약율법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제는 단순한 구약율법의 단순한 성취가 아니라 그것을 능가하시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그 반대로 오른 빰을 대면 왼 빰도 대라고 말씀하신다. 결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대적자에 대해서 응수를 하지 않는데 머물지 않는다. 결국 대적 자를 응수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 원수라도 사랑하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구약의 윱법으로는 도무지 표현될 수 없는 율법이다. 왜냐하면 그 시대는 그리스도의 사죄와 용서의 은총이 내려지기 전이기때문이다. 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고 말씀하셨는가? 그 이유는 원수같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난 다음 그 사랑에 근거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말씀하신 것이다.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아버지(우리는 그의 아들들)의 모습과 같은 온전한 모습이다. 

 

6:1-18은 유대주의를 극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같이 유대인들은 구약의 온전한 율법을 형식화 외식화시켰다, 그래서 예수님 이렇게 당시에 왜곡되어진 유대의 외식주의를 극복하시는 말씀을 이 본문에서 하신다.당시의 사람들의 종교생활은 한마다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구제에 있어서도 떠들면서 구제한다(6:1-4).또한 기도에 있어서도 외식되게 기도하고(6:5),또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한다. 여기서 외식된 기도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을 의식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또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같은 말을 주술적으로 되풀이 함으로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방의 기도를 본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기도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없이 무조건 정성을 들이면 신이 감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외식된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주기도문의 전제는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가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중언부언하지 말고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유대주의를 극복하라시는 말씀의 결론은 결국 천국의 시민은 이 땅에서 영광과 상을 받으려고 하지말고, 저 영원한 천국의 상급에 에 촛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말씀이다(19-34) 즉 오직 하나님앞에서의 삶,종교가 이 땅에서 세상적인 영예를 추구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나라백성의 삶에 관한 부정적인 언명이라면 더 적극적인 언명은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주의를 극복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케 하신 예수님의 말씀인 것이다. 

 

문/천국의 상급이란 있는가? 있다면 받는 기준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상급론과 성경적 상급론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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