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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연구/야고보서

야고보서강해⑤하나님은 시험하시는가?(약1:12-18)

by 금빛돌 2013. 3. 23.

여러분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 때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은 왜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절대 시험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면 또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 오늘 본문 앞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시험들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말은 연단으로서의 시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이란 유혹으로서의 시험입니다.

야고보서1장에 2-12절까지에서 나오는 시험도 연단으로의 시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이라는 단어는 앞에서 말하는 시험이라는 단어와 다른 단어입니다(12-“페이라스몬(연단시험)”-13-“페이라조메노스(유혹시험”).

12절까지는 연단의 의미에서 시험이고, 오늘 본문은 유혹이라는 의미에서 시험입니다.

/그러면 연단과 유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연단으로서의 시험이란 반드시 그 이후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혹으로서의 시험이란 그 뒤에 멸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 비로소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시험하신 후에도 갑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신 후에 그 시험을 믿음으로 잘 이겨나가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시험이란 유혹이라는 말로서 쉽게 말하면 올무를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올무에 걸려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올무를 놓는 시험은 절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에게 올무를 놓는 시험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넘어져서 멸망하게 하는 시험을 절대 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단으로서의 시험을 주실 때도 우리가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절대 그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할만한 것을 아시고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면 여기서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어떤 것입니까?

1)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첫째로,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이 그 시험을 감당할만하다고 보시니까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절대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험이 감당치 못할 시험이라면 반드시 막으십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욥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말했습니다. “욥이 이 시험을 받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내 종 욥은 그 시험 가운데서도 끝까지 나를 부인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입증시키기 위해서 욥의 시험을 허락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 욥이 그 시험 가운데 넘어져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 시험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어떤 시험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충분히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보셨기에 허락하셨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 옆에 시험에 든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이 그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보시기에 당신에게 그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충분히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바랍니다.

2)또 감당할만한 시험이란--그 시험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험을 감당할만한 은혜를 주신 후에 그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그 시험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창22장에서 언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믿음의 시험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처음 갈대아 우리에서 나왔을 때 하나님이 그 시험을 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22장에 앞서서 아브라함과 사래의 태에서 태어날 수 없는 가운데 이삭을 태어나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이길만한 준비를 시켜놓으신 후에 그에게 그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일 여러분이 시험을 당하고 있다면 절대 그 시험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동안 주셨던 말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와같이 그동안 주셨던 은혜, 그동안 주셨던 말씀을 생각하면 여러분은 그 모든 시험을 충분히 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속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도무지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큼 믿음이 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이런 일을 격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대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도무지 이 시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만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그래서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처음 시험을 받을 때는 그 시험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당할만한 시험이란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하실 때 그 시험과 함께 그 시험을 감당하고 남음이 있는 넘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시험이 도무지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과 함께 동시에 주신 감당할 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시험은 감당할만한 시험이 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아무 것도 없는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광야는 아무것도 먹을 것 없는 광야입니다. 도무지 이스라엘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만 준비해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와 함께 하늘의 만나를 같이 준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그 광야를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서 광야는 시험거리가 아니라--그들의 역사상 가장 하나님의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광야가 되게 되었습니다.

또 고린도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그 고난을 이기고도 남을 있는 위로도 함께 준비해주셨다고 합니다.

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고난가운데)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난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과 함께 그 고난을 이기고도 남는 넘치는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고난과 함께 그 모든 고난을 이기도 남은 하나님의 위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반드시 이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올무를 놓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가 넘어지게 하는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시험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우리에게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올무를 놓는 시험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까?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 좋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좋으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뒤 끝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뒤끝이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잘해줘도 뒤에서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 뒤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좋으신 분이시고, 뒤에서도 좋은 분이십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피조물 중에서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는 낳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첫 열매란 무슨 말이겠습니까? 축복의 첫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신 목적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인간이 제일 큰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이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창조때부터 예비하시 모든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축복의 열매입니다.

창조 때부터 예비하신 하나님의 모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시험을 받을 때 항상 무슨 생각을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험하시는 것은 나를 넘어뜨리기 위하심이 아닌가? 결국 나는 이 시험에서 넘어지겠구나? 나는 이제 망하겠구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마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누구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까? 마귀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하겠습니다. 마귀에게 속지 맙시다.

또 우리가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욕심 때문입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의 욕심으로 인한 마귀의 시험은 우리에게 사망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의 시험을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제적인 가난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1:9).

또 왜 여러 가지 시험을 허락하십니까? 우리로 더 온전하고 구비하여 더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게 위함입니다(1:4).

그래서 모든 시험을 인내로서 통과한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들을 받으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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